"낮에도 여우가..." 91세 토박이가 기억하는 은평의 옛 풍경
[은평시민신문 박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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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년 은평 전경 (사진 출처 : 은평구청, 차철수 제공) |
| ⓒ 은평시민신문 |
경기도와 서울의 경계면에 위치했기 때문일까? 은평이라는 지역의 역사와 기록은 고양에서도 서울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도시 발전이라는 급행열차를 탄 것 마냥 지역의 많은 역사와 기억해야 할 장면이 훅훅 넘어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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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초 불광리 닭장뒷집 불이농장사택에서 차철수 일가(사진출처 : 은평문화관광역사관, 차철수 사진제공) |
| ⓒ 은평시민신문 |
서울혁신파크에서 독바위역에 이르는 넓은 땅에는 일본인이 지주가 운영하는 경성농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농원은 불이흥업주식회사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당시 주민들은 이 곳을 불이농장이라고 불렀고 이 곳에서는 돼지와 닭을 비롯한 다양한 과일이 재배됐고 인근 주민들은 하루 날품팔이로 농장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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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평 토박이 차철수 어르신 (사진 : 정민구 기자) |
| ⓒ 은평시민신문 |
"불이농장이 굉장히 넓었어요. 지금 녹번역에 은평면사무소가 있었는데 여기 지나서 녹번동, 양천리, 지금 혁신파크 일대 전부하고 독박골 풀장이 있던 위쪽까지 전부 다 농장이었어요. 연신내를 넘어가지는 않았는데 동네에서 농사 안 짓는 사람들은 전부 여기와서 일당 받고 밭매고 생활하고 그랬어요. 그 때는 일정 때라 아주 어려운 시절이었거든요. 갈현동, 구산동, 역촌동, 대조동, 홍제동까지 그 때 직업 없는 사람들은 전부 여기와서 일을 했는데 일당 주면 보리쌀 사고 쌀 사가지고 가서 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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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년 불이농장에서 일하는 아낙네들 (사진 출처 : 은평구청, 차철수 제공) |
| ⓒ 은평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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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년 불이농장에서 일하는 차철수 어르신 형님과 직원 (사진 출처 : 은평구청, 차철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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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년 불이농장 전경 (사진출처 : 은평문화관역사관, 사진제공 : 차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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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녹번삼거리에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사무소가 있었어요. 그게 나중에 은평출장소가 됐다가 은평구청을 옮겨 지었고 그 자리에는 소방서가 들어온 거에요. 통일로 쪽으로 내려가다보면 왼쪽에 한전이 있는데 그건 나중에 들어왔고 불광쪽으로 내려가다 왼편에는 큰 도살장이 있었어요. 여기서 잡아서 시내로 보낸다고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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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철수 어르신이 직접 표시한 예전 은평구 현황 |
| ⓒ 은평시민신문 |
"도살장에서 나오는 건 거의 다 가죽공장으로 가서 뭘 만들었죠. 그리고 관턱고개를 넘어가면 서울국제전신전화건설국이 있고 서울중개소도 있어서 말하자면 직장인들이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이 있었어요. 그 고개 넘어가면 연신내 사거리에는 큰 양조장이 있었어요. 그 양조장은 은평구 일대 뿐만 아니라 홍은동, 홍제동 일대도 거의 다 거기서 배달받고 했던 거 같아요. 양조장 일꾼들이 많아서 잔칫집에도 보내고 농사짓는데도 보내고 그렇게 잘되는 모습을 봤어요.
그리고 박석고개에서 갈현동 쪽으로 내려오면 거기가 전부 복숭아 밭이 그렇게 많았어요. 관턱고개 넘어 왼쪽으로 지금은 대조동 동사무소인데 그 일대가 전부 분뇨 처리장이었어요. 서울시내 마차꾼들이 전부 마차로 분뇨를 싣고 와서 거기에 버렸는데 그 일대가 파리떼랑 냄새 때문에 굉장히 고통을 겪었어요. 그게 꽤 오래 계속됐는데 해방 이후에 정리가 되면서 없어졌어요."
(관턱고개 : 불광에서 연신내를 넘어가는 고개. 관티고개라고도 부른다.)
"녹번삼거리에서 수색 방향으로 내려가면 왼쪽이 지금 응암동인데 여기 포수말, 매바위 이 쪽은 전부 꽃밭이었어요. 여기 사람들이 꽃을 재배해서 시내에 가져다가 팔고 그렇게 살았는데 일제 강점기 일본 사람들이나 좀 잘 사는 사람들은 전부 꽃을 좋아해서 집안에 전부 꽃을 두고 했어요.
그 때 은평구는 큰 산업시설이라고 할 게 없었는데 불광초등학교 앞하고 녹번초등학교 앞에는 당면 공장이 큰 게 있었어요. 공장이 커서 생산도 많이하고 시내로 출하하고 그랬어요.
신사동 쪽으로 내려가면 지금 숭실고등학교 올라가는 쪽, 신사동 고개 넘어 현대아파트 주변 그 근처가 전부 공동묘지였어요. 고택골이라고. 그리고 수색쪽으로 넘어가면 큰 변전소가 있어서 철도, 교통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동네에 많이 살았어요. 증산동은 산업시설이라고 할 게 없어서 불이농장 와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높은 산거리(산골고개)에서 응암시장있는 쪽은 전부 허허벌판이고 전부 논밭이고 집들이 거의 없었어요. 백년사로 넘어가는 데는 야산인데 그 때는 소나무도 작고 자라지 않은 상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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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철수 어르신이 찍은 1960년대 역촌오거리 풍경 (사진출처 : 은평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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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나무가 없었고 돌산이 돼놔서. 낮에도 여우가 캥캥하고 다녔어요. 저녁에 해거름하면 늑대들이 쌍으로 돌아다니는데 사람 혼자 가면 막 뛰어 넘어요. 사람 머리위로 그냥 펄쩍펄쩍 뛰어넘으니까 혼자 다니다가는 물려 죽어요. 여우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데 늑대는 물어요."
- 호랑이는 못 보셨어요?
"호랑이는 못 봤어요. 그리고 이 지역에 숲에 다니면 뱀이 무척 많았어요. 우리가 다니면서 모르고 밟아서 꿈틀거리면 놀라서 보면 뱀이고. 한 번은 불광동에서 뱀을 밟았는데 그냥 막 덤비고 쫓아오더라고. 마침 돌이 있길래 돌을 집어서 던졌더니 쭉 뻗더라고."
- 지도를 보니까 녹번동에 화약고가 있는데요. 이건 어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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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철수 어르신 (사진 : 정민구 기자) |
| ⓒ 은평시민신문 |
"지금은 얕은 고개가 됐죠. 옛날보다 한 10m를 올리고 메꾸고 고개를 깎고 그 아래로 하수관을 전부 묻고 그렇게 해서 편평하게 만들어서 지금은 고개가 얕은 거에요."
- 그럼 관티고개나 박석고개도 그런가요?
"많이 깎았어요. 옛날에는 경사지고 힘들었죠. 산골고개에 짐 싣고 올라가려면 힘들고 그러면 학생들도 밀어주고 어른들도 밀어주고 그렇게 해서 올라갔어요. 그 때는 사람들이 순수하고 좋아서 고개 넘을 때 힘들게 가면 서로 도와주고 그랬어요. 산골고개에 해장국집이 큰 게 하나 있었는데 얼마나 맛있고 좋았는지 기억이 나네요. 그 때 나무짐지고 넘어가서 시내가서 팔고 오는 사람들, 또 달구지 몰고 가는 사람들, 그렇게 많은 장사꾼들이 다니면서 새벽에 넘어갔다가 해장국 한 그릇씩 먹고 갔어요."
- 어르신도 드셔 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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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 독박골 이재민촌 (사진출처 : 은평구청) |
| ⓒ 은평시민신문 |
"수재민들이죠. 옛날 한강변에 수재민들이 많았으니까. 그 사람들이 쪽방에 살다 장마지면 떠내려가고 하니까 그런 사람들이 많이 왔죠. 응암시장 부근, 매바위 그 쪽 일대도 수재민들이 많이 와서 살았어요. 방 하나 부엌 하나 있는 일곱 여덟평짜리 집을 불광동 쪽에 지어서 분양을 했어요."
- 은평구에서 장을 볼 만한 시장은 어디가 있었어요?
"장을 볼 곳이 없었죠. 대조시장 5일장은 나중에 생긴 거고 그 전에는 영천시장에 가서 장을 봤어요. 그 때는 뭐 가끔 장을 가는 거고 보통은 감자나 고구마나 있고 반찬거리도 많지 않았어요.
지금 회상하면 벌써 한 80년이 넘어가는데 그때는 어릴 때니까 겨울에 독박골에 올라가면 썰매 만들어서 산꼭대기 올라가서 쫙 내려오면서 썰매 치고 내려오고 팽이치기 하고 동네 와서는 잣치기. 동전치기도 많이 하고 그런 게 지금도 머리에 선하네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은평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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