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사램’ 낚는 어부

2025. 12. 12.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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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령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부교수

진한 남도 사투리 가득 담은
성경 번역본… 겸손하게 귀
기울인 예수의 삶 실감한다

얼마 전 ‘마가복음 전라남도 방언’ 번역본(대한기독교서회, 임의진 옮김)이 출판됐다. 번역본을 소리 내어 읽다 보면 판소리를 배워본 적 없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아니리’를 하듯 말의 리듬이 생겨난다.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남도 판소리를 듣고 자랐다는 번역자의 힘이다.

누가 뭐래도 백미는 첫 제자들을 부르며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예수의 말을 다음과 같이 옮긴 것이었다. “아따메 수고가 많으시요이. 거시기 인자부턴 저를 따라 댕기셔야 쓰것소. 지비들을 물괴기가 아니라 사램 낚는 찐한 어부가 되게 해드릴텡게.” 변방 갈릴리의 가난한 어부였던 베드로가 지역 방언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미 성서에 드러난 사실이기에 그의 말을 남해의 찐한 사투리로 옮기는 것이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투리는 충격의 크기가 확실히 다르다. 이제까지 교회에서 듣고 읽어온 예수는 한결같이 점잖고 근엄한 ‘표준어’만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번역본이 너무 재미있어 여러 친구에게 소리 내어 읽어줬다. 전라도가 고향인 친구는 토박이 억양은 원래 이런 것이라며 내 서툰 억양을 교정해 줬다. 다른 지역에서 온 친구들은 즉석에서 충청도나 경상도 방언으로 바꿔 배꼽을 잡았다. 함께 소리 내어 읽는 그 자체만으로 성경 읽기가 이토록 재미있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전남 방언 번역본의 가치는 ‘재미’ 이상의 것이었다. 한참을 함께 웃던 전라도 친구는 서울로 올라와 장사를 하게 된 이후로 손님에게 절대로 고향 말로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특정 지역에 대한 편견에 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고향 말로 말하는 예수를 듣고 차별받고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했다는 예수의 이야기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확실하게 피부로 와닿았다고 했다.

기독교 선교의 역사가 서구 강국의 식민주의 확장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성경 번역의 역사도 그 일부분으로 이해한다. 강자의 언어가 약자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강자의 언어가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도 함께 전달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의 번역은 영토의 지배와 완전히 같지는 않다. 약소국의 영토는 강대국의 힘 앞에 쉽게 짓밟히고 착취당하지만, 약자의 언어는 강자의 언어를 자기 말로 번역할 때 약자와 강자의 부당한 위계 구도를 드러내면서 그 힘의 방향을 바꿔내고 새 뜻으로 창조하기도 한다. 전라도 방언으로 다시 태어난 예수의 말씀이 우리 사회에 퍼져 있던 지역 차별을 드러내고, 우리 안에 뿌리 깊게 파고든 편견의 부당함을 유쾌하게 드러내며 억눌린 자에게 해방감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번역이란 본질상 ‘번역 불가능한 것’을 번역해 보려는 시도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두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다름을 존중하며 이루어지는 번역이야말로, 원문의 뜻에 새로운 뜻을 더해 의미를 확장하고 풍요롭게 한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번역은 오역을 범하기도 하지만, 오역의 ‘배신’이야말로 번역이 창조하는 새 가능성을 시작하는 계기로 생각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번역을 ‘언어적 환대’라고 불렀다. 개신교인이었던 리쾨르는 성서 번역사를 바로 그런 ‘언어적 환대’ 사건의 한 예로 보았다. 성서는 언제나 오역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인간 실존의 모순과 위기를 새롭게 보여주는 번역본으로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가 돌아왔다. 우리에게 건네진 예수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겹겹이 쌓여온 오역의 역사와 함께 축적되어 온 복된 소식이다. 자신의 이해를 절대화하지 않고 겸손하게 다른 이해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이해를 가꿔나가는 것, 그러한 겸허함이 가득 차길 기대한다. “사램 낚는 어부”가 “물괴기 낚는 어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전혀 다른 존재를 온전히 존중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김혜령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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