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본 세상 인생도 180도

박구인 2024. 5. 6.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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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 브레이킹 국가대표 비걸 전지예
브레이킹 국가대표 전지예가 인터뷰 도중 자신의 시그니처 동작을 선보이고 있다. 전지예는 "브레이킹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종목인 만큼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봐주시면 큰 힘이 될 거 같다"면서 "올림픽에선 더 멋진 춤을 보여드리겠다"고 올림픽 출전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 고양=최현규 기자


브레이킹 국가대표 비걸 전지예(25)는 생애 첫 올림픽 출전에 도전하고 있다. 브레이킹은 오는 7월 개막하는 2024 파리올림픽에서 대회 사상 첫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지구촌 최대 스포츠 축제에서 자신의 기량을 펼쳐 보일 기회가 생긴 것이다. 전지예는 “올림픽 최초의 브레이킹 무대에 서고픈 마음이 크다. 세계 각국의 최상위 선수들과 겨뤄 메달을 목에 거는 게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챙이 빳빳한 모자를 눌러쓰더니 얼굴엔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가벼운 스텝으로 몸을 푼 뒤에는 더욱 매서운 표정과 진지한 눈빛이 살아났다. 전지예는 강렬한 음악과 점점 빨라지는 비트(박자)에 맞춰 현란한 춤 기술을 차례로 선보였다.

왼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물구나무를 서듯 거꾸로 멈춰 섰다. 오른손으론 양쪽 다리를 꼬아 잡았다. 브레이킹 기술 중 하나인 에어 프리즈를 변형한 전지예의 시그니처 동작이었다. 그는 “무릎과 팔의 각도, 허리와 골반 움직임, 표정 등 미세한 차이에 따라 보이는 모습은 천차만별”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24일 경기도 고양의 소울번즈 크루 연습실에서 만난 전지예는 “이전보다 실력이 늘었다는 걸 보여주면서도 완벽한 퍼포먼스를 구사해야 할 것 같다”며 “국가대표의 책임감을 바탕으로 더욱 신중하게 경기에 임해 파리행 티켓을 따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파리올림픽 본선 진출을 확정하려면 두 번의 관문을 더 넘어야 한다. 전지예는 지난해 각종 대회에서 랭킹 포인트를 쌓은 끝에 최종 예선전인 파리올림픽 퀄리파이어 시리즈(OQS) 출전 자격을 얻었다. OQS에선 월드클래스 비보이·비걸 각 40명이 10장씩 주어지는 본선 출전권을 두고 배틀을 펼친다. 이달 중순 중국 상하이 1차 대회와 다음 달 헝가리 부다페스트 2차 대회를 거쳐 본선 진출자가 결정된다.

그간 숱한 국제대회에 참가했지만 올림픽 준비 과정에선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전지예는 “사실 올림픽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것 같다”고 털어놨다. 올림픽은 일반 대회와 달리 중·장기적으로 꾸준한 성적을 내야 한다. 고생 끝에 최종 예선에 올랐지만, 또다시 경쟁을 이겨내야 올림픽 무대를 밟을 수 있다.


최근 전지예는 2025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몸 상태 점검을 마쳤다. OQS에 대비해 새로운 기술도 장착했다. 그는 “선발전 우승으로 자신감을 얻어 OQS에서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새 기술들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완성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현재는 진천선수촌에서 훈련 중이다. 브레이킹이 기존의 문화에서 스포츠의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시작된 국가대표 생활. 브레이킹 국가대표들은 주로 오전에 웨이트 훈련을 받고, 오후에 개인 춤 연습을 하는 일과를 보낸다. 저녁시간대엔 자율 훈련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보강한다. 전지예는 “선수촌에선 전문 트레이너 선생님이 도와주시고, 웨이트 훈련 기구도 많다. 체력을 기르는데 큰 도움을 받는다”고 말했다.

평소엔 춤 소스를 개발하고 기술을 반복하며 연습하지만 대회가 다가오면 실전 대비 훈련에 힘을 쏟는다. 이틀간 진행되는 대회 일정과 똑같은 스케줄을 짜서 움직인다. 컨디션 조절은 물론이고 국가대표 동료들과 ‘모의 배틀’을 하며 겨뤄본다. 전지예는 “라운드 방식으로 진행되는 대회 특성을 고려하면 체력을 키우고 유지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고의 퍼포먼스를 위한 루틴도 있다. 전지예는 체지방을 줄이고 근력을 키우기 위해 탄수화물 섭취를 줄인다. 그는 “제 머릿속에 체중 목표치가 있다. 몸을 가볍게 만들어 연습한 뒤 시합 일주일 전부터 다시 탄수화물을 조금씩 섭취하면서 힘을 낸다”며 수줍게 웃었다.

전지예는 2015년 브레이킹에 입문했다. 우연한 계기였다. 어린 시절부터 운동신경이 좋았지만 피겨 스케이팅을 늦게 시작한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선수의 꿈을 접었다. 이후 아이돌이 되겠단 생각에 댄스학원을 찾았다가 브레이킹을 접했다.

멋진 브레이킹 동작을 하나씩 따라하다가 곧 매력에 빠졌다. 거듭된 실패 과정을 겪으면서 기술을 하나씩 익혔다. 매일 연습실에 살다시피 하며 춤에 자신만의 색깔을 입혔다. 때로는 실수한 동작에서 새로운 영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대표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만 않았다. “사실 혼자 누워 TV보는 걸 좋아한다”는 그는 자칭 ‘집순이’다. 처음엔 낯가림도 심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춤을 추는 게 너무 힘들었다. 연습에만 몰입하다 보니 허리 디스크가 터진 적도 있었다. 부상 위험과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그의 부모도 처음엔 춤추는 걸 반대했다.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 전지예는 “이상하게도 배틀만 하면 구경하는 사람이 많아도 상대와 춤을 교류하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올림픽에 도전하는 전지예의 ‘1호 팬’이 됐다. 전지예는 “요즘엔 브레이킹 영상을 직접 찾아보시고는 ‘이런 대회가 있다. 저 선수의 기술이 괜찮던데 넌 안 하니?’라고 하시면서 조언과 패드백을 주신다”며 웃어 보였다.

국가대표가 되고선 일상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도 많이 늘었다. 전지예는 “과거엔 선수들끼리만 브레이킹 문화를 즐겼는데, 지금은 대중의 관심이 늘고 팬층도 두터워졌다. 책임감을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각종 대회에선 이전보다 많은 어린 선수들이 출전하고 가파르게 성장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그는 “제가 더 잘해서 좋은 결과를 보여준다면 더 많은 분들이 브레이킹에 관심을 가질 것 같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지난해 항저우아시안게임 출전 경험은 큰 자산이다. 브레이킹 종목이 열린 첫 종합 국제스포츠대회였다. 전지예는 “처음엔 아시안게임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긴장을 많이 했었는데, 종합 대회의 진행 방식과 분위기, 준비해야 할 부분들을 미리 익혔다. 올림픽에선 더욱 멘탈을 잡고 경기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브레이킹은 올림픽 진입을 계기로 각국 선수들이 상향평준화된 실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비걸 강국’으로 꼽히는 일본에는 경쟁해야 할 선수들이 많다고 한다. 전지예는 자신만의 해법을 찾고 있었다. “한 라운드의 시작부터 끝까지 누군가에게 스토리텔링을 하듯이,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과제를 하나씩 풀어가는 스타일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저만의 춤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브레이킹은 기술력과 표현력, 독창성, 수행력, 음악성 등 5개 항목을 평가해 순위를 가린다. 선수들은 귀를 찢을 듯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맞붙는다. 아직까지도 승패를 가리는 방식이나 경기 환경 등을 낯설게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전지예는 “화려한 기술을 뽐내는 선수가 잘 한다고 보실 수도 있지만 음악에 어우러지는 춤을 즉흥적으로 선보여야 하는 종목이다. 그런 부분을 눈여겨보시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비보이와 비걸들은 저마다의 활동명을 갖고 있다. 전지예의 활동명은 ‘프레시벨라(Freshbella)’다. 신선하고도 아름다운 춤을 보여주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전지예는 “브레이킹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종목이다. 보다 더 즐거운 마음으로 저의 도전을 바라봐 주시면 큰 힘이 될 것 같다”며 “최종 예선에서 최선을 다해 성적을 내겠다. 올림픽에선 더 멋진 춤을 보여드리겠다”고 다짐했다.

고양=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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