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대로 길바닥서 3년5개월, 목숨 건 70대 노인의 싸움
[우혜림 기자]
'주여, 저마다 고유한 죽음을 주소서.'(라이너 마리아 릴케, <소유하지 않는 사랑>)
시인 릴케는 이렇게 기도했다. 생명체라면 응당 자기만의 죽음을 맞이하기 마련인데도 릴케는 굳이 '고유한 죽음'을 신에게 간구했다. 그 참뜻은 이어진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랑과 의미와 고난이 깃들인 삶에서 나오는 죽음을 주소서.' 여기서 죽음은 생명체의 소멸이 아니다. 사랑과 의미와 고난이 깃든, 삶의 연장선이자 최종적 형태로서의 죽음이다.
▲ 이종열씨가 공사장 가림막에 쓴 글. 그 너머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
ⓒ 우혜림 |
"난 저기(염리동) 한서초등학교를 다녔어요. 전쟁 끝나고 어려운 시절에 그때부터 별의별 걸 다 해봤어. 구두닦이하고 신문도 팔아보고. 졸업하고 나서는 아현역 옆에 '한국 후로링 타일 공업사'라고 마루판 만드는 공장을 다녔어요. 내가 죽기 전까지 안 잊어버리는 게 군번, 내 이름, 그리고 첫 회사 이름이잖아. 하여간 어릴 때부터 밑바닥에서 별 걸 다했지."
▲ 1965년 9월 21일자 동아일보(좌), 7월 27일자 경향신문(우) '한국 후로링 타일 공업사' 광고(좌)와 '가두 소년(소년 가장) 실태 보도'(우) |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초등학교 졸업 후에도 배움을 열망하던 종열씨는 열다섯에 남산고등공민학교에 갔다. 고등공민학교는 가정형편상 중학교 진학이 어려웠던 청소년들이 다니던 야간 학교다. 방학 기간에 그는 공장에 취업했다. 그곳에서 쥐를 잡거나 군밤을 구울 때 쓰이는 철망을 엮는 일을 했다. 개학 후 등교를 위해 일찍 퇴근시켜달라고 했더니 공장주가 안 된다고 했다. 결국 종열씨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때 갈팡질팡하면서…. 아유, 아직도 눈물이 나. 그래도 그때 잠깐 학교 맛을 본 게 참 감사하지."
"그때 여기에서 양화대교까지 마라톤을 했어요. 내가 3등했잖아.(웃음) 신문 팔 땐 그저 물건 들고 빨리 뛰는 놈이 장땡이었거든. 그리고 당시 음악 선생님이 여자 선생님이셨는데 나한테 노래 잘한다고(하셨어.) 신문 팔 때 하도 소리를 많이 지르고 다녀서 목청이 또 좋아.(웃음) 근데 나는 내가 아예 모르는 게 잘한 것 같아요. 뭘 많이 알고 그랬으면 건방지고 못 됐을 거야. 나 잘났다고 못된 짓하고 남 무시하고 그랬을 테니까."
▲ 이종열 씨의 수첩. 트럭에서 하루를 보내며 그는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두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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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85년도에 종이 만드는 제조회사에서 운송 기사를 했어요. 근데 회사에서 갑자기 개인 자가용을 가지고 영업하겠다는 겁니다. 그때 일하던 사람들을 쫓아내고 용역으로 비용을 적게 돌리려고 한 거죠. 그래서 내가 싸웠어요. (용역들) 운행을 못하게 막고 주도적으로 그렇게 했어. 내가 근방 인쇄소들은 쫙 꿰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본부장이 와서는 피해 안 가게 하겠다고 해놓고는 나한테만 배차를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만뒀죠."
2006년 아현2구역이 재건축단지로 지정되었을 때 종열씨가 '싸움'을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협조해달라는 재건축조합의 요청에 그는 "나쁜 짓 하기 싫다"라고 답했다.
"(아현2구역 재건축이) 잘못됐다는 건 국토부도 시도 구청도 다 알아요. 여기가 왜 재건축지역이에요. 재개발 지역이지. 쉽게 말해 천 평 땅이 있다고 쳐요. 거기에 아파트를 새로 짓겠다는 건데, 여기 사람들은 땅이 한 평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분양받을 만큼의) 소유권이 없는 사람들이야. 그럼 조합에서 (재건축을) 할 게 아니라 정부나 공공기관에 맡겨야 할 거 아니에요. 거기서 돈 있는 사람, 가진 땅이 넓은 사람은 분양권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아닌 사람은 임대주택에 입주하게 해야죠. 그게 내가 하는 말의 전부에요."
▲ 연도별 도시정비사업 지구 개수 추이 2005~2014년 10년간 재개발과 재건축을 포함한 도시정비사업의 지구 개수 추이. |
ⓒ 통계청 |
아현2구역 재건축조합은 관리처분 인가가 내려진 2016년 6월 이후 철거 작업을 시작했다. 사업시행 인가 조건에는 강제집행 사전 통보 원칙이 있었다. 또한 서울시가 2018년 5월 발표한 '정비사업 강제철거 예방 종합대책'에 따라 강제집행은 시·구청 공무원과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인권지킴이단 참관하에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재건축조합은 이러한 조건들을 여러 차례 어겼다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
"용역이 시도 때도 없이 막 들이닥치니까 사람들이 일도 그만두고 집을 지키고 그랬어요. 나는 막 3층 높이 되는 곳에 올라가서 (용역들) 오면 뛰어내린다고 하고 그랬어. 2018년 겨울에는 비가 엄청 많이 쏟아지는데 6시간을 지키고 그랬어요. 근데 할 수가 없지. 나이 70, 80 먹은 사람들이 어떻게 싸워. 근데 이게 법이래."
▲ 아현2구역 재건축 전후 모습 2014년(좌)와 2024년(우)의 모습 변화. |
ⓒ 네이버 로드뷰 |
"잊을 수가 없죠, 그런 일은. 이해가 안 가요. 걔(박준경 씨)가 왜 죽어야 했는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해. 걔는 세입자였어요. 집 뺏기고 날은 쌀쌀해지지, 찜질방, 피시방 다니는데 돈은 떨어지지…. 그러니까 돈 몇 푼만 줬으면 될 거 아니에요."
준경씨의 죽음 이후 12월 7일 마포구청은 아현2구역 재건축공사를 전면 중지했다. 2019년 1월 9일 서울시와 마포구는 박씨 유족과 재개발 사업 지구에 남은 세입자 가족들에 임대주택을 지원하는 방안 등을 협의체와 합의했다. 하지만 재건축 사업 세입자에 대한 보상 규정이 없는 도시정비법 개정은 없었다. 강제집행 시 거주민들의 인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도록 하는 '강제퇴거금지법'은 18·19·20대 국회 모두에서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는 발의조차 되지 않았다.
▲ 이종열씨(75)가 인터뷰 중이다. |
ⓒ 우혜림 |
"내가 내 집에서 산 것이 부당이득이래요. 내가 법적 근거 없이 무리한 보상을 요구했다는데, 내가 뭔 무리한 요구를 해요? 내 땅과 집이 필요하면 적어도 내가 살던 집만큼의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해달라는 거예요. 그게 뭐가 잘못된 건데요. 이게 상식적이에요? 이게 정의로운 나라냐고요."
▲ 이종열 씨의 투쟁 공간. 2021~2024년(위에서부터 순서대로) 기간 동안의 이종열 씨의 투쟁 공간이다. |
ⓒ 네이버 로드뷰 |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늙어도 사람답게 남은 인생을 잘 마무리하자(는 거예요.) 내가 편하고 내가 잘 먹고 잘 사려고 온 거지. 사실 죽으려면야 약이라도 먹고 죽을 수 있죠. 근데 할 게 있어. 그냥은 안 죽어."
- 할 게 뭔데요?
"저기 써 있잖아요.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데요."
"그래. 그러면 이겨야죠. 여태까지 왜 싸웠어요. 불의와 싸운 거예요. 불의. (이 상황이) 정당한 것이냐고. 불교에서 그래요.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고통의 바닷속에서 산다 이거야. 여기서 나 혼자 전기도 없고 물도 없지만 뭐 어때요. 심심하면 술 한 잔 먹고 노래도 부르고. 여기는 내 카페야.(웃음)"
▲ 이종열 씨 이종열 씨가 인터뷰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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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지금 손주들이 9살, 8살, 5살이에요. 근데 보면 안 되는 게, (한 번 보면) 자꾸 봐야 해.(웃음)"
종열씨는 지난해 4월 4일 아내와 이혼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2억 원 정도의 합의금을 송금했다. 최근에는 따로 보관해 둔 세간살이를 지인에게 부탁해 장애인 복지관 등에 기부했다. 틈이 나면 생각들을 정리해 공책에 기록한다던 종열씨는 요즘 읽지도 쓰지도 않는다.
"이제 한계가 온 것 같아요. 요즘은 화가 나기보다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에요. (뭘요?) 숨 쉬는 거. 숨 쉬는 걸 끝내려고. 나 스스로 계속 말해요. '이제 가자. 그만 가자.' 근데 아직 미련이 남았나 봐. 전에는 드문드문 생각했거든요.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사실 그만두려면야 다 정리하고 어디 가서 혼자 살 수도 있죠. 근데 그럴 거였으면 진즉에 (시작도) 안 했지. 나는 이제 나와 싸워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건 원하지 않아. 그냥 내가 태어난 곳에서 떠나면 돼. 그게 내 목표."
▲ 이종열 씨가 공사장 가림막 외벽에 붙여둔 현수막. '어느 늙은 투쟁 아주 재미 있어요 왜?'라고 적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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