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의 탄핵 깃발에 홀려버린 서울대 교수
[정초하, 유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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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 당시 <일리아스>의 문장을 변형해 '분노를 노래하소서, 민중이여'라는 깃발을 들었던 석민주씨와 안재원 서울대 서양고전문헌학과 교수가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월대 앞에서 다시 만나 깃발을 함께 들어보이고 있다. |
| ⓒ 유성호 |
"분노를 노래하소서, 민중이여!"
그때였다. 웬 아저씨가 다가와 민주씨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대뜸 민주씨가 깃발에 수놓은 <일리아스>의 첫 구절("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을 그리스어 원어로 읊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일리아스>를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민주씨의 깃발을 알아본 건,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서양고전문헌학과 교수(남, 56)였다. <일리아스>를 좋아하는 20대 여성 '덕후'와 <일리아스>를 가르치는 50대 남성 교수의 기묘한 만남이었다. '덕후'와 '교수'의 교류는 이어졌고 뜻밖의 사건들을 탄생시켰다.
첫 만남으로부터 10개월가량이 흐른 지난 18일, 민주씨와 안 교수는 다시 한 번 그들이 처음 만났던 광화문 광장 월대 앞에 섰다. <일리아스> 깃발을 사이 좋게 나눠 들며 활짝 웃은 두 사람은, 그간의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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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 당시 <일리아스>의 문장을 변형해 '분노를 노래하소서, 민중이여'라는 깃발을 들었던 석민주씨와 안재원 서울대 서양고전문헌학과 교수가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다시 만나 근황을 나누고 있다. |
| ⓒ 유성호 |
"당시 각자 좋아하는 걸 주제로 깃발 만드는 게 유행이었어요. (2024년 12월) 7일 탄핵소추안 표결이 한 번 불성립했을 때 사태가 장기화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자는 심정으로 <일리아스> 깃발을 제작해 들고갔어요." - 민주씨
지인과의 술 약속 때문에 우연히 광장을 찾았던 안 교수가 민주씨의 깃발을 알아본 것도 우연이 겹친 덕이었다.
"당시 광장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만나기로 한 지인을 찾을 수 없었어요. 때마침 깃발들이 많으니까 지인에게 내 위치를 알려주려고 '이 깃발' 밑에 있다고 사진을 찍어보냈는데, 가만 보니 문구가 익숙했어요. 그게 바로 <일리아스> 깃발이었던 거죠." - 안 교수
"고전의 재활용이 흥미로웠다"는 안 교수는 곧장 민주씨에 다가가 "깃발 문구가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물었다. 민주씨도 처음엔 안 교수를 "문구가 멋있어서 물어보러 온 사람인 줄 알았"으나, 전공 교수라는 말을 듣고 "너무 반갑고 신기했다"고 전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아킬레우스(<일리아스>의 주인공) 이름 뜻풀이"에 관한 대화를 나눴고, 신이 난 민주씨는 <일리아스> 첫 문장을 새긴 반지를 안 교수에 보여주며 자랑하기도 했다.
민주씨는 이 만남을 엑스(X, 옛 트위터)에 생중계했고 많은 이들이 호응했다. INFP로 밖에선 낯을 가린다는 민주씨는, 엑스에서만큼은 '하길'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헤비 트위터리안'이다. 안 교수 또한 인터뷰하는 내내 민주씨를 "엑스의 여왕"이라 칭하며 "난 한 게 없는데 '엑스의 여왕' 덕분에 (사연이) 알려졌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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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민주씨는 2024년 12월 28일 탄핵 집회 현장에서 <일리아스> 깃발을 알아본 안재원 교수를 만났고 이 이야기를 엑스(X, 옛 트위터)를 통해 생중계했다. 해당 게시글은 리트윗 수가 1만 3000회를 넘어갈 정도로 큰 화제가 됐다. |
| ⓒ 석민주(하길)씨 엑스 |
깃발 아래 첫 만남은 둘의 '서사시'로 치면 시작점일 뿐이었다. 현장에서 안 교수가 민주씨에 명함을 건네며 "대화를 더 나누고 싶다"며 본인의 연구실로 초대했고, 이후 두 사람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첫 만남 직후 안 교수는 엑스 이용자인 제자를 통해 민주씨에 "해물라면에 삼겹살을 사주고 싶다"고 재차 '러브콜'을 보냈다. 안 교수의 초대에 민주씨 역시 "한없이 설렜"다. "평소 좋아하던 <일리아스>에 대한 설명을 연구자로부터 들을 수 있다"는 점이 민주씨의 심장을 뛰게 했다.
해가 바뀌고 1월 6일, 두 사람은 안 교수의 연구실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안 교수는 이 자리에서 "<일리아스>에 나오는 죽음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 다섯 가지"를 민주씨에게 들려줬다. 민주씨 또한 안 교수의 설명을 경청하며, 직접 제작한 <일리아스> 소형 깃발과 자석 굿즈를 안 교수에 선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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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민주씨와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서양고전문헌학과 교수가 <일리아스>의 해석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았던 카카오톡 대화. |
| ⓒ 석민주(하길) 제공 |
민주씨와의 대화는 안 교수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덕후'가 던지는 질문들이 연구자인 그에게는 새롭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서로가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안 교수는 "아직도 생각나는 건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은 왜 썩지 않았는지 그 질문이 가장 힘들었다"며 "이는 학계에서는 저평가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죽어서도 온전했으면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관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논의다"고 평가했다.
안 교수는 "'덕후'들은 섬세하고 독특하며, 나보다도 훨씬 깊이 파고든다"며 "학계에서는 '<일리아스>의 저자가 한 사람이냐, 두 사람이냐'를 두고 싸우지만 이러한 논쟁만이 학문적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고전이 일반 독자와 '덕후'들에 던져질 때는 전혀 다른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원하는 해석의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열 달 사이 : 성덕이 된 덕후, 덕질 잔치 연 교수
| ▲ '일리아스'를 아세요?...50대 교수는 탄핵 집회서 20대 '덕후'를 만났다 ⓒ 유성호 |
둘의 교류는 점점 더 화제가 됐고, 새로운 기회가 열리기도 했다. 을지로에 위치한 독립서점 '소요서가'에서 안 교수에게 그리스 고전을 가르치는 강연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안 교수는 월 1회 소요서가에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플라톤의 <국가> 등을 가르치는 특강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2월 4일 '소요서가'에서 열린 첫 특강은 두 사람에게 뜻깊은 <일리아스>를 주제로 했다. 이 자리엔 안 교수와 민주씨 외에도 둘의 이야기를 듣고 달려온 또다른 고전 문학 '덕후'들로 가득했다. 안 교수는 "셰익스피어 덕후, 오페라 덕후 등 별별 덕후들이 다 있었다"며 "일종의 '덕질 잔치'인 셈인데, 한국에서 드문 새로운 종류의 취미 공동체의 탄생이었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근처 술집에서 뒤풀이를 했는데 <일리아스> 속 캐릭터와 장면 분석도 하고 '윤석열 언제 쫓겨나나' 이런 얘기들도 했다"고 했다. 얘기를 듣던 민주씨 역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하는 바람에 지하철 막차 때쯤 돼서 뛰고 그랬다"고 맞장구치며 웃었다.
민주씨의 삶도 180도 뒤바뀌었다. 그는 <일리아스>를 즐겨 읽던 독자에서, <일리아스>에 대한 해석을 전하는 저자가 됐다. 민주씨는 지난 2월 전자책 구독 서비스인 '밀리의 서재'로부터 연재 제안을 받았다. 이후 "일리아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으로 총 13화 분량의 에세이를 지난 6월까지 연재하며, 본인만의 시각으로 <일리아스>를 풀어냈다.
내년 4월에는 정식 책 출판도 목표로 하고 있다. 출판사 '창비'로부터 "탄핵 광장과 <일리아스>"를 주제로 책을 써달란 요청을 받아 작업 중이다. 민주씨에게 이 기회가 더 뜻깊은 건, 공동 저자로 이준석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민주씨는 이 교수의 번역본을 통해 <일리아스>를 처음 접했다. 민주씨는 "유명한 곳들에서 자꾸 출판을 제안하니 얼떨떨하면서도 영광이었다"며 "특히 이 교수님과 함께 책을 쓰며 진정한 '성덕(성공한 덕후)'이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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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 당시 <일리아스>의 문장을 변형해 '분노를 노래하소서, 민중이여'라는 깃발을 들었던 석민주씨와 안재원 서울대 서양고전문헌학과 교수가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
| ⓒ 유성호 |
안 교수 역시 "탄핵 집회 당시 나부꼈던 수많은 깃발들에 적힌 내용들의 성격이 중요하다"며 "당시 고양이 밥주자는 사람들을 포함해 온갖 좋아하는 것들을 적은 깃발이 등장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광장에서 자랑한다는 것은 곧 타자가 좋아하는 것도 인정한다는 뜻이고, 이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성숙도와 포용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안 교수가 민주씨에게 선물받은 <일리아스> 깃발 굿즈를 그리스에 전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안 교수는 지난 2월 말 직접 그리스를 찾아 아리스토텔레스대학의 학생들에게 민주씨가 제작한 <일리아스> 깃발 굿즈를 나눴고 "탄핵 광장이 지닌 가치"를 설명했다.
안 교수는 "전세계적으로 극우화가 진행 중이고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한국이 이를 극복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로서 탄핵 광장의 <일리아스> 깃발 일화를 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를 듣던 민주씨 역시 "(깃발 수출 사실이 알려지자) 다들 '김구 선생님, 보고 계십니까?'라고 그랬다(김구는 생전 문화의 힘을 강조 - 기자 주)"라며 웃었다.
두 사람은 이 우연한 만남이 각자의 삶에 미친 영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안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일리아스>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고 분석했는데 또 다른 적성을 찾은 느낌입니다. 생업에서의 스트레스를 푸는 돌파구이자 세계를 확장하는 경험이습니다." - 민주씨
"내 인생 재밌는 에피소드의 한 챕터이자, 탄핵 광장 이후 공동체가 무엇일까, 국가와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 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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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재원 교수는 석민주씨로부터 선물받은 <일리아스> 굿즈를 지난 2월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대학의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
| ⓒ 안재원 교수 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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