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어록 자리에 "다치면서까지 할 일, 없어요" 붙은 이유 [기로에 선 K조선]
“우리 회사에는 당신이 다치면서까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HD현대그룹은 지난해 HD현대중공업·HD현대일렉트릭 등이 위치한 울산공장 외벽에 이런 문구를 내걸었다. 원래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 선대회장의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란 어록이 붙어있던 자리다. 정 선대회장의 어록은 여전히 옆 건물과 공장 곳곳에 남아있다. 창업주의 어록과 ‘안전제일’ 문구를 나란히 붙여 강조한 셈이다.
한국의 조선업계는 중국의 추격을 물리치는 동시에 높은 수준의 국내 산업재해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숙제를 갖고 있다. 18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올해 ‘빅3 조선사’ 산업재해 사망자 수는 한화오션 3명, 삼성중공업·HD현대중공업 각 1명 등으로 집계됐다.
업계는 K조선의 역사가 쌓여온 만큼 선박 제조 시설이 노후화됐고, 조선업 호황에 따라 납기를 맞추기 위해 작업 속도를 끌어올리는 상황이어서 각종 사고 위험도 높아지고 있다고 본다.
이에 따라 국내 조선업계는 글로벌 기술 경쟁력을 갖추면서도, 시설 첨단화를 통해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올해(9월 현재기준) 사망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한 한화오션은 안전 관련 예산을 대폭 확대해, 2026년까지 1조9760억원을 투자해 ‘세계 최고의 안전한 조선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한화오션은 안전 예방을 위한 상시예산으로 향후 3년간 1조1300억원을 편성했다. 또 650억원을 투자해 2026년까지 업계 최초로 종합 스마트 안전 시스템을 구축한다.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통합관제센터를 구축해 조선소 곳곳의 불안전한 상황이나 화재·폭발·누출 등 위험 상황을 자동감시하고, 안전취약지역의 모니터링 시스템을 마련한다.
또 잠재적 대형사고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 노후 설비·장비 교체에 7000억원을 투입한다. 잠재적 위험이 예상되는 장비와 설비에 대해서는 노후화·고장 여부와 관계없이 선제적으로 교체한다는 방침이다. 김희철 한화오션 사장은 “내·외부에서의 지적들과 안전 현황들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기존의 안전관리 체계에 대한 전반적인 재점검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HD현대중공업은 매년 3000억원 이상을 안전관리 예산에 투입하고 있다. 올해는 3410억원을 편성해 지난해(3085억원)보다 약 400억원 늘렸다. 이 회사는 지난달 카카오페이와 손잡고 ‘HD안전페이’ 안전사고 예방 인센티브도 도입했다. 작업자가 현장 위험성 평가, 안전 제보 등의 활동에 참여하면 포인트를 부여하고, 이 포인트는 카카오페이 가맹점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노진율 HD현대중공업 사장은 “임직원이 안전 활동에 대한 보상을 즉각적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안전관리 의욕을 높이고 안전 활동을 습관화·생활화하고자 도입한 것”이라며 “자발적인 안전 활동 참여를 늘려 조직 전체의 안전 문화 수준 향상을 이끌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이밖에 HD현대중공업은 업계 최초로 도입한 가상현실(VR) 안전교육을 통해 작업자들이 가상으로 화재·추락 등 사고상황을 경험해보고, 잠재적 위험요소를 인지하도록 했다. 지난 7월에는 한국안전학회·대한인간공학회 등과 안전협약을 체결하는 등 안전관리 고도화에도 힘쓰고 있다.
HD현대중공업·한화오션·삼성중공업 등 국내 8개 조선사는 고용노동부·안전보건공단과 지난 4월 ‘안전 보건 협의체’를 구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합동 안전 점검을 하고, 조선업계에 외국인 노동자 비중이 높은 것을 고려해 최대 25개 언어로 번역된 안전교육자료 등을 공유할 예정이다.
고석현 기자 ko.suk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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