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의 도시에서 3만 2천 보를 걷다
[김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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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포항 삼학도 유람선 선착장이다. 멀리 영산강 하굿둑이 보인다. |
| ⓒ 김재근 |
도시도 기억을 한다. 어떤 형태로든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 거리에 건물에 물건에 이야기를 담고 특징을 만들어간다. 목포는 물 위의 도시다. 시가지의 80%가 바다였다. 일제 강점기 때 는 호남 최대 항구도시였다. 유달산을 경계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었다. 언덕배기 북촌은 조선인, 신시가지 남촌은 일본인 거주지.
목포역 광장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좌측으로 5분쯤 걸으면 오거리가 나온다. 원도심 주요 공간을 연결하는 교차로로, 조선인과 일본인 거주지역의 경계점이었다. 오거리에서 유달산 쪽으로 몇 걸음, 옛 동본원사 목포별원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사찰로 해방 후에는 교회로 지금은 문화센터로 이용한다. 지붕 경사가 급한 낯선 일본식 건물 앞에서 실감했다. 목포의 기억 속에 들어섰음을.
'목포근대문화공간'의 시작
기억의 입구에서 무모하게 길을 나건 걸 잠시 후회했다. 카페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다. 그리 헤픈 남자는 아닌데, 순전히 더위 탓이다. 바게트에 얼음 동동 띄운 커피 한 잔. 이런 행복이라니. 눈부신 창밖 세상이 새삼 무섭다. 왼손엔 지도 오른손엔 스마트폰을 들고 앞뒤로 배낭을 맨 외국 관광객이 지나간다. 낯선 저 남자에게서 친밀감이 느껴진다. 세상에 이런 사소한 것에 위안을 받는 날씨라니.
오거리에서 바다 쪽으로 넘어지면 배꼽 닿을 즈음에 2층의 붉은 벽돌 건물이 있다.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이다. 지금은 대중음악의 전당으로 이용된다. 이곳부터 '목포근대문화공간'이 시작된다.
과거 일본인들이 다니던 소학교에서 목포역 방향으로 이어진 대표 도로를 중심에 놓고, 유달산·목포진·항구를 연결하는 구조이다. 구 일본영사관을 비롯하여, 동양 척식 회사, 교회, 민가, 백화점을 비롯한 상업 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조선시대 군사 시설인 목포진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주변 해안가를 간척하여 근대 시가지가 형성된 이후, 항구도시 목포 사람들 삶의 터전이었다. 1980년대까지도 목포 상권의 중심이었다. 지금도 당시의 바둑판식 도로 구조와 근대 건축물이 원형대로 잘 남아있다. 이 일대가 등록문화재 제718호로 지정되어 지붕 없는 문화재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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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포원도심 유달산에서 본 목포원도심이다. 사진 중앙이 목포항, 좌측이 삼학도이다. 멀리 보이는 건 영암이다. |
| ⓒ 김재근 |
먼 항해를 다녀온, 고기잡이를 마치고 돌아온 배들이 한가로웠다. 햇살이 내려앉고 갈매기가 몇 마리 날았다. 연락선은 어디로 떠나려는지 더운 숨을 토해냈다. 여객터미널 건물은 웅장했다. 국내선 대합실엔 띄엄띄엄 부채질을 하는 사람이 보였지만, 국제선 대합실은 할머니 한 분이 그림처럼 졸고 있을 뿐 한산했다. 가거도로 홍도로 흑산도로 가거도로 가는 배편 안내서가 대신 인사했다.
"작고 반짝이는 병어는 마치 별을 따다가 놓은 듯하다. 유순한 강아지처립 고분고분하게 보여, 그 눈망울을 보면 도저히 회칼을 들이밀기 어렵다. '세꼬시'란 뼈 채로 썰어낸다는 뜻의 '세고시(せごし)에서 유래한 일본식 요리 용어다. '세밀하고 고소하게 써는 법'은 아니다. 기름기 가득한 병어 갈빗살 회는 유리창에다 던지면 찰싹 붙을 정도다. 입에 한 점, 지방이 녹으면서 살점이 잇몸에 달라붙는다. 그러고선 솜사탕처럼 혀에서 녹는다."
소년 김대중의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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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년 김대중 공부방 목포항이 삼학도가 환하다. 두 개의 봉우리 사이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이 보인다. |
| ⓒ 김재근 |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처음 본 목포를 별천지였다고 소회했다. 그는 목포에 올 때마다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목포의 딸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은, 가락도 구슬프지만, 노랫말 또한 예사롭지 않다. 님이란 이순신 장군을 가리킨 것이니 나라를 뺏긴 설움을 토해낸 것이다. 목포만의 노래가 아니라 나라 잃은 겨레의 노래였다."
옆방에선 이난영이 목포의 눈물을 쉼 없이 불렀다. 창밖으론 목포항이 삼학도가 환하다. 액자 속 그림 같은 풍경이다. 삼학도는 목포의 반도이면서 섬이다. 사모하는 이를 기다리다 지쳐 죽어 학으로 환생했다가 그리운 임의 활에 다시 죽어 섬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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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 일본영사관 왼쪽은 시내 중심 도로에서 본 구 영사관 건물. 오른쪽은 영사관 2층 중앙 창에서 본 시내 풍경 사진 끝에 고하도 케이블카 기둥이 보인다. |
| ⓒ 김재근 |
원근법에 충실한 점령자의 오만이 담겼다. <에디톨로지>에서 김정운은 "베르사유 궁전 앞 그 넓은 정원을 왜 만들었을까. 루이 14세는 끝까지 가 봤을까. 이 궁전은 원근법을 구현한 절대권력의 상징이다. 원근법은 세상을 보는 눈은 하나여야 한다는 독점적 시각이다. 그래서 소실점은 권력이 된다. 자신의 눈이 닿는 공간 끝까지 규칙적이고 대칭적인 문양을 넣었다. 자신의 성이 소실점의 정 반대편에 위치하도록 했다. 자신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자기 권력 안에 있음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이 건물이 그랬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을 뒤로 두고 고하도가 정면으로 보이는 높직한 터에 위치했다. 중앙으로 일직선 대로를 두고 바둑판식으로 시내를 만들었다. 대로에서 바라보면 소실점은 영사관 2층 발코니로 향했다. 2층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 끝에는 고하도가 있다. 바로 앞에는 우체국을 두고, 국도 1호선과 2호선 도로의 원점으로 잡았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지배하고자 하는 점령자의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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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산동 벽화거리 어촌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담아 2015년부터 3년에 걸쳐 조성했다. |
| ⓒ 김재근 |
"어부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항구가 가깝고 평지보다는 싸게 터전을 마련할 수 있어서죠. 그들의 애환이 어린 말이 있는데, '조금 새끼'입니다. 사리에 고기를 잡고 조금 물살이 잔잔할 때 집에 왔습니다. 모든 어부가 그러했으니 부부가 만나는 시기가 다들 같았죠. 아이들 생일이 거의 비슷해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어촌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담아 2015년부터 3년에 걸쳐 조성했다고 한다. 골목엔 빈집과 생활하는 집이 가게가 있고, 찻집이 있고, 체험장있다. 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거리가 떠올랐다. 이름과 달리 벽화가 없는 동네다. 주민들이 지워서다. 생활에 도움은커녕 피해만 되는 관광객의 귀찮아서란다. 발길이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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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광장 위, 갓바위에서 바라 본 평화광장 야경. 아래, 춤 추는 바다 분수. |
| ⓒ 위, 김재근. 아래, 최순희 |
바닷바람 벗삼아 갓바위 해상보행교까지 걸었다. 산책하는 운동하는 구경하는 사람들을 지나서. 강아지를 유일한 관객으로 두고 기타 연주 버스킹을 하는 분에게 박수도 보냈다. 광장 중앙에 있는 춤추는 바다 분수 앞에 앉았다. 음악과 레이저가 조화로운 초대형 분수다. 안개처럼 피어오른 물이 바람에 실려 얼굴에 닿았다. 짭짤한 시원함이다. 목포의 낮이 이성적이라면 밤은 감성적이었다.
항구에선 이별과 만남이 교차한다. 이별은 사연이 되어 노래와 영화가 된다. 어쩌면 항구라는 이름 자체만으로 낭만이 떠오르는 건 인지상정일지도. 거기다 밤바다까지 더해졌으니. '애달픈 정조'는 낭만이 되었다. 목포엔 일본에 상처 입고 이난영과 눈물 흘렸지만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키워 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어제의 아픔을 견뎌냈으니, 오늘은 평화를 이야기하며 낭만을 그리워해도 되겠다.
낭만은 남녀 사이에 있다는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다. 낭만적이라는 말은, 부드럽고 나긋나긋하고 감상적인 분위기가 있다는 뜻도 있지만, '철 없다'는 의미도 있다. 어쩌면 허구나 상상에 가깝다. 낭만을 찾는 것은 정말 철없는 짓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찾고도 싶다. 한 번쯤 철부지가 되어보고 싶은 꿈, 그 꿈에서 살아가는 힘을 얻기도 하니까. 여행의 한 가지 이유일지도 모른다.
막차 떠날 시간이 가까워온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올 때다. 나는 기차를 타고, 강물은 바다가 되어 흐르고. 평화를 마음속 종이배에 실어 물에 띄웠으니, 신안 천사섬을 돌고 돌겠지.
여행을 계획하고 이끈 화순군 최순희, 안내와 도움을 주신 최영민·박인숙 그리고 차주면·김상안·김문심 목포시 전남문화관광해설사님께 고마움 전한다.
덧붙이는 글 | 화순매일신문에 실린다. 네이버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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