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이 만든 피로와 혐오, 이란 전쟁이 앞당길 새 질서
[오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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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일(현지 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 국제공항에 도착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
| ⓒ AFP 연합뉴스 |
그러나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줄 수 있는 전문가는 사실상 없습니다. 한국에서 중동 문제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조차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라며 방송 출연 요청을 고사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답을 아는 유일한 사람은 이 전쟁을 시작한 도널드 트럼프 한 사람뿐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조차 어제 말과 오늘 말이 다른 '럭비공' 같은 행보를 이어가고 있으니, 누구도 확신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나든, 세계는 이미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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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지난 13일 새벽 거대한 화염이 치솟고 있다. |
| ⓒ A.P 연합뉴스 |
이 관점에서 보면, 지금 벌어지는 이란 전쟁은 그 충돌이 더욱 격화한 버전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럽에서 벌어진 균열의 서막이었다면, 이란 전쟁은 세계 에너지 공급의 심장부인 중동에서 그 균열을 결정적으로 심화한 사건입니다. 파장은 경제와 안보, 외교를 가리지 않고 훨씬 넓고 깊게 번질 것입니다.
일부 국제 정치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세계 질서의 균열을 드러낸 사건이었다면, 이란 전쟁은 그 균열을 돌이킬 수 없는 단층으로 만드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무너지는 규칙 기반 국제 질서
2차 대전 이후 세계 질서는 미국이 설계하고 주도한 자유주의 국제 질서 위에 세워졌습니다. 국제법과 동맹, 자유무역, 국제기구라는 네 개의 기둥이 그 건물을 떠받쳤습니다. 이른바 규칙 기반 국제 질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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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 이사회 공식 회의 종료 후 기자회견에서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 위원회 위원장(왼쪽)이 발언하고 안토니오 코스타 유럽 이사회 의장(오른쪽)이 듣고 있다. 정상들은 고조되는 지정학적 및 경제적 긴장 속에서 이란을 포함한 중동 정세,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 유럽 경쟁력, 국방 및 이민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2026.3.20 |
| ⓒ EPA=연합뉴스 |
그 첫 신호는 올해 초 다보스포럼에서 울렸습니다. 캐나다의 마크 카니 총리는 미국의 관세 압박 외교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중진국들의 연대를 강조했습니다. 이란 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스페인의 페드로 산체스 총리가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미국의 군사 행동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천명했습니다. 불과 몇 년 전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웠을 장면입니다. 미국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도, 공개적으로 반기를 드는 것은 동맹의 문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호르무즈해협에 군함을 보내 달라고 주요국들에 요청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명받은 나라 중 중국은 물론이고 영국·프랑스·한국·일본 어느 나라에서도 즉각적인 파병 약속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요청을 받지 않은 독일과 호주 같은 전통적 우방국들에서는 "우리가 시작한 전쟁이 아니다"라는 냉담한 반응이 흘러나왔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마찰이 아닙니다. 미국의 지도력에 대한 신뢰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신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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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9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 자리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연설을 하고 있다. |
| ⓒ 로이터/연합뉴스 |
그러나 일본도 신중함을 택했습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19일,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서방 국가들과 이란 규탄 공동 성명을 앞세운 채 "법적으로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라는 논법으로 군함 파견 요구를 비켜 갔습니다. 한국 정부 역시 서방 국가들의 공동 성명에 이름을 올리는 선에서 대응을 마무리했습니다. 동맹의 언어를 쓰면서도 행동은 꺼리는, 이 조심스러운 줄타기야말로 지금 중견국들의 공통된 생존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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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 테헤란 북부의 한 아파트 건물에 폭탄이 터져 잔해 속에 갇힌 생존자들을 구조팀이 수색하고 있다. 이번 공격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상대로 진행 중인 합동 공세 와중에 발생했다. 2026.3.23 |
| ⓒ UPI=연합뉴스 |
세계 곳곳에서 트럼프식 외교에 대한 피로와 혐오가 쌓이고 있습니다. 물론 국가 차원에서는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의식해 정면충돌을 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시민 사회와 여론의 세계에서는 "트럼프가 없는 세계가 더 안정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국경을 넘어 번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집단적 욕망이 가시적인 외교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종종 여론이 먼저 움직이고 정치가 뒤따르는 방식으로 전환점을 만들어왔습니다.
다극 세계로 향하는 길목에서
많은 국제정치 전문가는 세계 질서가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이동하고 있다고 전망합니다. 미국·중국·러시아 그리고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영향력을 나누는 구조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 변화를 예고했다면, 이란 전쟁은 그 속도를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릴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에 이것은 단순한 지정학적 관전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파병 압박과 전쟁 확산의 위험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긴 시야로 보면, 다극화된 세계 질서 속에서 어떻게 외교적 선택지를 넓히고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할 것인지를 지금 당장 고민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란 전쟁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냉혹하고 가장 중요한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쟁은 저 멀리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그 질문은 이미 우리 발밑에 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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