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김화빈 기자]
▲ 육군 헌병대 제15범죄수사대 대장 시절 방자명의 모습. |
ⓒ 방자명 유족 |
63년. 쿠데타를 막으려다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한 군인이 재심에서 무죄를 받기까지 걸린 세월이다.
아버지의 출소를 반기던 초등학생 아들은 장성해 가정을 꾸리고 나서야 알았다. 아버지가 박정희 소장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의 희생양이었다는 것을. 아내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25년이 지나서야 말할 수 있게 됐다. 내 남편은 무죄라고.
하지만 여전히 국가는 사과하지 않고 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지난해 2월 14일 국가를 향해 "사과와 화해, 법적구제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권고했으나 묵묵부답인 상황이다.
▲ 1961년 10월 28일 <동아일보> 1면에 보도된 방자명 중령의 첫 공판 당시 모습. 가운데가 방자명 중령이다. |
ⓒ 김화빈 |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육군 헌병대 제15범죄수사대 대장이었던 방자명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쿠데타 군 저지를 명령하자 헌병 50명을 이끌고 한강교로 향했다. 그는 쿠데타 세력이 한강을 넘지 못하도록 방어하면서 부하들에게 '발포해서라도 막으라'고 지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 방자명 중령이 1962년 수감 초기 유족에게 보낸 편지. 수감 중 구타 등을 당해 필체가 휘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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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수감 후반부에는 간수들과도 친해져 초기와 달리 필체가 정돈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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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아버지의 소식을 듣지 못했던 문성씨는 법정에 피고인의 모습으로 선 신문 1면 사진으로 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방자명의 회고록엔 당시 상황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구금되던 날 집에는 수사요원들이 부리나케 드나들었으며, 나의 부친은 이 사건이 신문에 발표되자 졸도 그 후 수년간 뇌출혈 증세를 (보였고)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중략) 한 주일에 한 번 면회 오는 아내도 생기가 없어져 갔다. (아내는) '큰아들은 휴학시켜 춘천 (친정) 아버지께 보냈다'면서 내색은 안 하지만 생활이 고생스러운 모양이다.
이 무렵 나는 독감에 걸려 독방에서 죽을 고생을 하던 중 왼팔의 조그마한 상처가 곪아서 퉁퉁 부어올랐다. 의무실 조수인 김아무개라는 간수가 일요일 비번에 나를 의무실로 데리고 가 메스로 화농 부분을 도려냈다. 마취도 못 하고 그대로 쑤시고 자르니 그 아픔은 무서운 고문이었다. 붕대를 하고 그의 어깨 기대 내 방에 돌아오니 한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군인으로서 상관 명령에 따랐으며 신념에 의해 의무를 다한 것인데, 이렇게까지 수모와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빨갱이' 취급 당한 참전용사, 끝까지 "군 정치개입 반대"
▲ 1963년 8월 15일 방자명 중령에게 발급된 사면장 |
ⓒ 김화빈 |
국가는 6·25전쟁에서 공적을 세워 무성충무훈장(3급)과 금성화랑훈장(4급)을 받은 방자명을 강제 퇴역시켰고 연금을 몰수했다. 참전용사 대우를 대신한 건 '빨갱이' 딱지였다.
"(아버지) 출소 후 이사를 다녔는데 경찰이 어디로 가는지 조사하고 다녔어요. 경찰이 (이사 온) 동네 구멍가게 주인한테 '남로당 출신 간부가 왔으니 감시 잘하라'고 말했죠. 그래도 아버지는 개의치 않으셨어요. 사실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당당했죠." - 문성씨
▲ 5·16 쿠데타 군의 한강 진입을 저지했다는 이유로 2년여간 옥살이를 한 방자명 중령이 1963년 8월 15일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가족들을 껴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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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에서 생과 사를 넘나들던 방자명에게 군은 "목숨을 걸고 국민을 지키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하는" 존재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무력으로) 정치에 개입해선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 1968년 8월 18일 방자명 중령이 <조선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정치활동정화법 등 박정희 정권 독재를 비판하고 있다. |
ⓒ 김화빈 |
문성씨는 "아버지가 지인의 도움으로 강남에서 사업을 하셨는데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고 살던 분이 아니어서 그런지 임대료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라며 "그 시절 아버지는 '내가 6·25 전쟁 때 말 타고 지켰던 땅인데 지금은 한 평도 없다'고 종종 넋두리하셨다"라고 전했다.
방자명은 젊은 날 치렀던 옥고 후유증으로 말년에 고생하다가 1999년 12월 26일 생을 등졌다. 그의 나이 75세였다. 문성씨는 "불법 구금 과정에서 고문을 당해 오른쪽 귀 청력을 잃으셨다. 나중에는 조금만 큰 소리로 얘기하면 깜짝 놀라셨다"라며 "본인 뜻대로 살지 못한 탓인지, (연세가 드실 수록) 마음이 피폐해지셨는지 자서전을 쓰실 때 혼신의 힘을 다하셨다가 세상을 뜨셨다"라고 회고했다.
▲ 1970년대 말 신림동 인근 천주교 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은 방자명 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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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자명 중령의 장남 방문성씨가 지난 13일 경기도 화성시청에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혁명방해혐의로 징역 15년이 선고된 아버지의 1·2심 판결문 원문을 설명하고 있다. 이 법은 부칙에 공포한 날로부터 3년 6개월 전까지 소급적용하도록 규정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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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국가와 국가정보원은 고 방자명에 대한 수사과정에서의 불법구금 등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 유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나. 국가는 고 방자명 및 그 유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재심 등 법적 구제와 그 밖의 조치를 신속히 강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국가는 사과는커녕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 또한 취하지 않고 있다. 문성씨는 "참 허무하고 공허했다"라며 "진실화해위 결정문 덕분에 무죄도 받을 수 있었지만, '언제 누가 나한테 (국가의 조치를 전달하는) 연락을 줄까' 이런 의구심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법원 또한 무죄를 선고해 주셨지만, 판결문에는 아버지에게 적용됐던 '법의 소급적용'을 지적하는 내용이 없었다"라며 "소급적용을 금하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제13조 1항)과 형법(제1조 1항)의 정신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문성씨는 "과거사를 바로잡는 일에 여야는 없다"라고도 강조했다. 그는 "잘못된 법 집행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을 구제해야 하는 건 국가의 몫"이라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 전쟁을 벌일 게 아니라 정치권과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이러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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