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청년, 남들과 다른 시간을 걷고 있을 뿐” [조금 느린 세계]

신소영 기자 2024. 10. 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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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 지능인의 삶 ②
주문이 들어오자 능숙하게 커피를 내리는 최원재씨./사진=윤승현 인턴기자
햇볕이 뜨거운 어느 날, 더 뜨거운 열정으로 문을 연 가게가 있다. 당산동 골목의 '카페별'은 향긋한 버터 냄새와 커피 내리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사단법인 '별의친구들'은 경계선 장애 청년들의 정서적,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카페별이라고 하는 카페를 열었다. 경계 청년들은 카페별을 통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카페 안쪽 작업장에선 청년들이 직접 쿠키를 만든다. 유리창의 시부터 메뉴판까지, 카페의 모든 곳에 청년들의 손길이 닿아 있다.
별의친구들은 중·고등 통합 대안교육기관인 '성장학교 별'과 청년들의 사회 참여를 지원하는 '청년행복학교 별(이하 별학교)'을 운영하고 있다. 이 두 학교를 졸업 또는 수료하면 '가디언'으로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 파트타임으로 카페나 쿠키팀에 채용된 청년을 가디언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일을 시작하기 전 기본적인 직업 교육, 서비스 교육 등을 충분히 이수한다. 가디언은 별학교 교장이자 별의친구들 대표인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현수 교수가 직접 지은 이름이다.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따왔다. 전설 속 영웅처럼 완벽하진 않더라도 한 팀이 되어 힘을 모으는 사랑스러운 모습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당산동 '카페별' 외관./사진=윤승현 인턴기자
별학교 입학 후 자신의 가능성을 발굴한 세 명의 청년을 만났다. 최원재(29·경기 의정부시)씨는 2008년 입학해 16년째 별학교와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카페별에서는 7년째 근무 중이다. 박윤수(24·서울 성북구)씨는 카페별에서 3년간 인턴으로 일하다 지난 7월 정직원이 됐다. 자폐성 장애 3급 진단을 받은 정현규(27·서울 관악구)씨는 별학교 3년 차로, 예술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아래는 세 청년과의 문답.

-카페별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박윤수씨: "카페 일을 하기 전까지는 음악 활동만 했는데, 음악 하나만으로 살아가기엔 생활이 빠듯할 수 있겠다 싶어 이것저것 찾아봤다. 첫날은 긴장돼서 잠이 안 왔다. 결국 지각을 했는데, 계속 다니다 보니 몸이 익숙해졌다. 몇 시에 일어나서 얼마나 준비해야 하는지 머리에 저절로 새겨졌다.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지각한 적 없다."

-별학교에서의 특별한 경험도 궁금하다.
정현규씨: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홍보 동영상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당시엔 처음이라 말이 유창하지 않았다. 하지만 갈수록 자신감도 생기고 말하는 것도 많이 늘었다. 작년 2월에는 국회 심포지엄 토론회에 경계 청년 대표자로 나섰다. 별학교에 입학한 뒤로 전시회에 미술 작품을 출품하거나 밴드 보컬로 활동하는 등 여러 경험을 했다."

박씨: "마찬가지로 그림 한 점을 전시한 적이 있다. 당일 전시회 현장에 가고 있었는데, 이미 어느 기업 회장님께 팔렸다고 해서 기뻤던 기억이 난다."

최원재씨: "발달장애인만 참여할 수 있는 '스페셜 올림픽'에서 글로벌 선수 위원회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에 동아시아 대표로 선정됐다. 미국에 있는 스페셜 올림픽 본부도 방문했고, 중국도 다녀왔다. 보통 올림픽은 금, 은, 동이 정해지는데 스페셜 올림픽에서는 모두가 승리자다. 첫 번째 승리자, 두 번째 승리자 이런 식이다."

-카페에서 일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최씨: "예전에는 당산 말고 봉천에 카페가 있었다. 그때 항상 오셔서 핫도그를 시키는 손님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시던 분이었다. 나중에 합격했다고 다시 방문해 주셔서 특히 기억에 남는다."

박씨: "외국인 손님이 오신 적이 있다. 문을 여시는 순간 동공이 흔들렸다. '영어 한마디도 못 하는데 큰일이네'라고 생각하던 차에 옆에 계시던 한국인분이 대신 주문을 해 주셨다. 가장 당황했던 순간이다."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한 것 같다. 이전에는 몰랐던, 새롭게 발견한 나의 모습이 있다면?
최씨: "아무래도 신체 변화가 크다. 전에는 집에서 잘 안 나가다 보니 살이 많이 쪘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땐 학교에서 적응하는 게 좀 힘들었다. 원래 다니던 학교에서 자퇴하고 별학교에 입학한 뒤로 많이 변했다. 카페 일을 하고, 스페셜 올림픽에서 배구도 하다 보니 몸과 정신 모두 건강해졌다."

박씨: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을 벌었다.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거나 밥을 사기도 하고, 직접 번 돈으로 여행도 가니 정말 뿌듯했다. 여러모로 얻은 게 많다."

정씨: "어릴 때 외국에서 살았다. 그땐 여러 소리를 무서워했고, 말도 어눌해서 친구 사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별학교에 입학한 뒤로 재능을 발견하게 됐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됐고, 밴드에서도 활약 중이다. 앞으로도 예술 쪽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계획도 생겼다."

-사회 인식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편견이 남아 있다. 당사자 입장에서 사회에 바라는 점은?
정씨: "정부나 기업에서 발달 장애인에게 일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 줬으면 한다. 제빵, 바리스타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일에 도전하고 싶다. 경계 청년들이 쉽게 자립할 수 있도록 사회가 점진적으로 변화하길 바라고 있다."

박씨: "취업도 취업이지만 희망을 줄 수 있는 환경이 제일 중요하다고 본다.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여 줬으면 한다."

최씨: "요리로 비유하자면 완성된 밥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줘야 한다. 어촌이나 농촌에 가서 직접 재료를 구하고 요리하는 모 예능처럼, 자급자족할 방법을 제시해 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본인처럼 방황하고 있을 경계 청년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 한마디.
최씨: "최근 애니메이션 OTT 회사 '라프텔' 창업자에 대한 기사를 봤다. 공동 창업자이자 척수성근위축증 환자인 신형진씨가 틈틈이 저축한 돈을 강남세브란스병원 호흡재활센터에 기부하셨다는 내용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기사를 읽을 때마다 용기가 많이 난다. 이런 사람들을 보며 조금만 용기를 내 한 발짝 나서길 바란다. 또,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희망을 품었으면 한다."

정씨: "발달이 조금 느려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겠지만, 본인이 결코 나약하고 무능력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다.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활동에 도전해 봐라."

박씨: "공감한다. 뒤처지는 게 아니라 남들과 다른 시간을 걷고 있을 뿐이다.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들을 찾아 함께 나아가면 좋겠다."

세 청년은 반짝이는 경험을 발판 삼아 더 큰 꿈을 좇는다. 빛나는 꿈 한편에는 또 다른 청년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최원재씨는 경계선 지능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이들을 말로써 돕고자 한다. 연단에 올라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싶다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정현규씨는 경계 청년의 대변인으로서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다양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카페별에서 일하기 전 음악 활동을 하던 박윤수씨의 꿈은 본인만의 개성이 가득 녹아 있는 음악이다. 경계 청년을 넘어 더 많은 사람에게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게 그의 최종 목표다.

별학교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필요한 건 오직 종합심리평가서와 입학신청서, 그리고 잠깐의 용기다. 한 OTT 회사 창업자의 이야기가 최원재씨에게 용기를 줬듯, 이들의 이야기가 또 다른 청년을 이끌길 바란다.
정현규씨가 그린 '차별의 폭풍우가 사라지고 평화롭고 맑게 개인 세상'./사진=윤승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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