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빼앗긴 오리지널 맥주, 이게 다 버드와이저 때문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 기자]
▲ 언필터드 오리지널 부드바이저 부드바르 |
ⓒ 윤한샘 |
이름에 관해 이 맥주보다 우여곡절이 많은 경우는 흔치 않다. 체코 국영 맥주이자 필스너 우르켈의 강력한 라이벌. 그러나 한국에서 본명을 드러낼 수 없는 기구한 운명을 가진 부드바이저 부드바르(Budweiser budvar)다.
부드바이저? 버드와이저를 잘못 본 거 아닌가? 한국에서는 부드바이저 부드바르라는 이름으로 이 맥주를 찾을 수 없다. 대신 부데요비체 부드바르(Budějovice budvar)를 머릿속에 넣어야 한다. 도대체 왜 한국에서 생뚱맞은 이름을 갖게 된 걸까? 이게 다 버드와이저(Budweiser) 때문이다.
▲ 버드와이저와 관계를 알려주는 각종 문서들 |
ⓒ 윤한샘 |
이 소송은 버드와이저를 소유한 안호이저-부시를 거의 백 년 넘게 괴롭혔다. 2006년 안호이저-부시의 대표가 된 부시 4세는 부드바이저 부드바르를 인수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경쟁사였던 사브밀러가 1999년 필스너 우르켈을 품에 안는 모습을 보며 지긋지긋한 소송도 끝내고 체코 시장도 장악하려는 야망을 꿈꿨으리라.
부시 4세의 이런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체코 정부는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부했다. 아이러니하게 부시 4세가 이끌던 안호이저-부시가 초국적 맥주 기업 인베브에게 적대적 인수를 당하고 만다.
부드바이저와 버드와이저의 상표권 문제는 2008년 안호이저-부시를 인수합병한 AB 인베브에도 골칫거리였다. 2009년 새로운 대표 카를로스 브리토가 부드바이저 부드바르를 다시 인수하려 했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다만 부분적 합의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북미 대륙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다. 부드바이저 부드바르는 아시아에서 부데요비체 부드바르, 미국과 남미에서는 체스크 부드바르로 팔리는 반면 버드와이저는 유럽과 체코에서 버드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어쩌면 버드와이저가 30년 동안 국제축구연맹(FIFA)의 파트너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유럽으로 나가는 월드컵 광고에서 버드와이저를 사용할 수 있을 테니.
▲ 부드바이저 부드바르 브루하우스 전경 |
ⓒ 윤한샘 |
제발 빨리 가자. 10분이라도 늦으면 우리는 예약한 투어에 참여할 수 없었고, 그건 내가 그토록 바라던 숙성조에서 바로 나온 부드바이저 부드바르를 마실 수 없다는 뜻이었다.
조급한 내 마음과 달리 가을 유럽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침엽수가 뻗어있는 숲과 지평선이 보이는 들판을 지날 때는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작고 예쁜, 전형적인 유럽 마을의 모습은 엽서 그림, 그 자체였다.
3시 50분, 정확히 투어 10분 전에 방문객 센터 앞에 도착했다. 부드바이저 부드바르 양조장은 쇼핑센터가 즐비한 상권 근처에 있었다. 지도에서 봤을 때는 외진 곳에 있는 줄 알았는데 주위로 꽤 많은 자동차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버스에 내려 서둘러 센터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아담한 기념품 숍이 보였고 통로에는 부드바이저 부드바르 역사가 묻어있는 배럴과 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기념품 숍 앞에는 양조장과 맥주에 대한 소개를 볼 수 있는 대형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양조장 역사는 1265년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 2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의 모습을 갖춘 시기는 1895년이었다. 체코 정부는 양조장을 주식회사로 바꾸며 대부분의 지분을 가져갔다.
흥미로운 건 역시 이름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부드바이저는 체스케 부데요비체를 독일어로 부드바이스(Budweis)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됐다. 부드바이스는 체코어로 맥주를 의미하는 피보바르(Pivovar), 뒤에 붙은 부드바르는 양조장이라고 하니, 부드바이저 부드바르를 직역하면 '맥주 양조장'이라는 뜻이었다. 체스케 부데요비체, 그렇다면 이 도시 자체가 맥주 양조장이라는 말 아닌가.
글 말미는 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결코 부드바이저라는 이름을 뺏기지 않을 것이며 자랑스러운 체코 맥주의 역사를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다짐으로 끝을 맺었다. 이 정도의 자부심이면 버드와이저가 아니라 필스너 우르켈을 저격하는 소리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우리가 진짜 체코 맥주라고! 외국 회사에 매각된 필스너 우르켈이 아니라.
▲ 부드바이저 부드바르 투어 입구. 케틀을 본떴다. |
ⓒ 윤한샘 |
황금색 구리 케틀은 다름 아닌 입구였다. 나에겐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들어간 나무 구멍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가자마자 중세 시대 양조장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맥즙을 끓이던 작은 솥과 나무 주걱들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옛 양조사들의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애피타이저가 끝나자 드디어 부드바이저 부드바르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과거에 맥주를 날랐던 자동차와 진짜 양조에 사용된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장식장과 벽에는 비중계, 저울, 레시피, 병입기, 각종 문서와 사진들이 다닥다닥 놓여 있었다. 19세기, 부드바이저 부드바르가 본격적인 공장 형태를 갖추었을 시절의 물품들이었다.
버드와이저 분쟁 관련 문서들도 깨알같이 붙어 있었다. 안호이저-부시가 이곳에 와서 영감을 얻고 베껴갔다는 노골적인 증거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부드바르가 버드와이저보다 더 큰 스트레스와 위기감을 받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부시 4세에게 매각했다면 이 맥주는 시나브로, 사부작사부작 사라졌겠지. 비로소 부드바르의 분노와 고통이 이해됐다.
양조장 속으로
이제 다시 현재로 돌아갈 시간. 문을 열고 야외로 나가자 멀리서 솔솔 맥즙 냄새가 흘러나왔다. 허브와 향신료 향이 섞인 걸 보니, 분명 홉을 넣고 끓이는 맥즙이었다. 가이드는 향의 진원지로 우리를 데려가는 중이었다.
중간중간 투어를 위한 볼거리도 흥미로웠다. 작은 홉 밭에서는 부드바르에 들어가는 사츠 홉을 직접 만질 수 있었고 지하 300미터에서 뽑아내는 물을 볼 수 있는 작은 사이드 글라스도 있었다. 물은 체코가 밝은색 라거를 인류 최초로 만들 수 있게 한 장본인이다.
▲ 브루하우스 입구에 있는 양조 과정 드로잉 |
ⓒ 윤한샘 |
디콕션은 열원이 부족하던 시절, 당화 온도를 올리기 위한 방법이었다. 섭씨 64~74도에서 진행되는 당화 과정은 순간적으로 온도를 높여야 한다. 이를 승온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64도에서 당화를 진행하다 72도로 빠른 시간 도달해야 원하는 당을 가진 맥즙을 얻을 수 있다.
▲ 맥즙을 끓이고 있는 모습 |
ⓒ 윤한샘 |
부드바이저 부드바르는 디콕션을 두 번 진행하는 더블 디콕션을 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당화 중 맥아를 당화 보일러로 이송해서 끓인 후, 다시 당화조로 끌어와 승온을 한다고 설명했다. 부드바르의 깊은 향미의 원천이 여기 있었다.
▲ 건조 홉이 보인다 |
ⓒ 윤한샘 |
▲ 지하 숙성조에서 맥주를 따르는 모습 |
ⓒ 윤한샘 |
브루 하우스가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면 지하는 찬 공기로 가득했다. 통로 사이사이 거대한 원통 숙성조가 보였다. 몇몇 양조사들은 맥주를 이송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가이드는 통로 끝에 있는 방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안에는 거대한 원통 숙성조가 두 줄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 언필터드 오리지널 부드바이저 부드바르 |
ⓒ 윤한샘 |
사츠 홉에서 나오는 향긋한 허브와 섬세한 풀 향이 입안 곳곳을 물들였다. 옅은 캐라멜 향과 자잘한 탄산이 배경에서 느껴졌다. 맥주는 살아있었다, 이 표현이 정확했다. 한국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생동감이었다.
모두가 맥주에 빠져 말을 잊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어설픈 발음으로 소리쳤다. '건배!' 현지 양조사의 건배 소리가 우리를 현실로 소환했다. 그제야 모두 건배를 외치며 진짜 부드바르를 즐기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 좋은 인생의 호사가 있을까.
한국에서도 오리지널 부드바이저 부드바르를 마실 수 있다. 아, 부드바이저 부드바르가 아니라 부데요비체 부드바르다. 이름이 어렵다면 그냥 부드바르만 기억하자. 그리고 만약 마트 선반에서 버드와이저 옆에 있는 부드바르를 본다면 응원의 말을 건네 보자. 네가 애쓴다. 파이팅!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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