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지 않은 곳에서도 아름다움은 태어난다
[김성호 기자]
눈물이 찔끔 솟았다. 달린 방울이 거의 떨어질 지경이 되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양 코를 풀고 슬쩍 휴지로 눈가를 훔쳐내었다. 책을 읽고 감정이 동한 것이 꽤나 오랜만이어서, 또 낯선 도시 카페의 한가운데 자리였으므로, 무엇보다 책이 그리 슬픈 내용이 아니었기에, 나는 더욱 당황스런 기분이 되고 말았다.
이 책을 만난 건 우연이라 해도 좋겠다. 멀리 어느 영화제를 찾는 길에, 도시와 도시를 잇는 직통 차편이 없는 관계로, 나는 대전의 어느 카페에 들러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이 카페엔 주인장이 직접 꾸린 책꽂이 몇 칸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주인장은 누구든 원하는 이는 자유롭게 책을 꺼내 읽도록 열어두고 있었다.
2시간 남짓 시간이 났던 터라, 나는 개중 금세 읽을 수 있을 듯했던 이 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부커상 역대 후보작 가운데서 가장 짧은 소설이란 점이 책과 나 사이 놓인 문턱을 절반 이상 낮춰준 듯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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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처럼 사소한 것들 책 표지 |
| ⓒ 다산책방 |
1985년 아일랜드 작은 소도시에 펄롱이라는 사내가 산다. 아내 아일린과 다섯 딸을 둔 가장, 대단히 부유하진 않아도 당장 먹고 살 걱정은 없는 건실한 가정을 이룬 그다. 소원이라면 딸들이 자라 지역 명문으로 꼽히는 세인트마거릿 학교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쇠락한 지역에서 그래도 잘 자란 여자 아이들은 모두 이 학교 출신이니까.
소설은 마치 시처럼 읽히는 뭉툭하고 그래서 더 몽글몽글한 문장으로 펄롱의 과거와 오늘까지를 적어 내린다. 그는 시쳇말로 흙수저로 태어났다. 엄마는 미시즈 윌슨이라는 제법 규모 있는 농장을 가진 지주의 집에서 가사일을 도맡아 했다.
어쩐 일인지 열여섯이 되어 배가 불렀고, 다른 이들은 그녀를 외면했지만 미시즈 윌슨이 그녀를 거둬 계속 일을 할 수 있도록 돌봤다. 그렇게 아비 없이 태어난 아이가 펄롱이었는데, 미시즈 윌슨의 품 안에서 아비 없는 설움이 무언지 알지 못하고 자랐다.
주변 어디에나 실직자가 넘쳐나고, 고양이 우유 그릇을 들어 담긴 우유를 몰래 마시는 아이가 있는 도시. 그곳에서 설움을 모르고 자랄 수 있었단 게 무슨 뜻인지를 펄롱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미시즈 윌슨의 울타리 덕분이라는 것도. 잘 자란 그가 아일린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그나마 회사를 차려 꾸려가는 데는 미시즈 윌슨의 공헌이 결코 작지 않은 것이다.
펄롱은 언제나처럼 일상을 산다. 아침이면 일어나 일터로 향하고 저녁엔 아내와 딸이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언제나 그렇듯 펄롱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무슨 일인가는 일어나는 모양, 어느 딸은 하루가 다르게 밝아지고 또 어느 딸은 낯선 남자를 보면 화들짝 놀라는 겁 많은 아이로 자라난다.
소설이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건 펄롱의 일상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펄롱 앞에 펼쳐진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던 그의 심경이 어디 그만의 것일까. 쳇바퀴 위에 오른 쥐처럼 매일 성실히 달리다가 과연 삶이란 이게 전부일까를 고민하는 모습이 마치 또래 친구들의 마음처럼 생생하게 다가든다.
평범한 가장이 마주한 일생의 선택
펄롱 안에 무언가가 벌어진 건 한순간의 일이다. 그건 벌어졌다기 보다는 차라리 마주쳤다고 해야 옳을 만한 것이었다. 평소처럼 주 고객인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간 날이었다. 그가 광을 열었을 때 웬 여자 아이가, 그것도 맨발에 헐벗은 몸을 가진 아이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끔찍한' 회색 옷을 입고 가슴팍에선 젖이 새고 있는 '아이'가 펄롱에겐 낯설다. 제 딸과 비슷한 또래일 아이가 펄롱을 향하여 '내 아이가 어떤지 물어봐달라'고 말한다. 아이가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를 빼앗겨 어떻게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 펄롱의 마음이 요동친다.
그 며칠 전인가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펄롱이 물건을 배달하러 수녀원을 찾았을 때 마침 담당자가 없었고, 교회당 바닥을 닦던 여자 아이들만이 있었다. 그때 한 소녀가 죽고 싶다며 강가로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했던가. 금세 나타난 수녀 때문에 펄롱은 소녀와 떨어지게 됐고, 그 아이의 부탁을 받아줄 생각도 물론 없었다. 그러나 그 만남이 얼마나 오래 마음에 무겁게 얹혔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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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
| ⓒ 그린나래미디어 |
기형도는 시 '기억할 만한 지나침'에서 혼자 울고 있는 다 큰 사내에 대해 쓴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는 혼자 울고 있었다!'고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고통스러웠다던 그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지나침은 그대로 그에게 기억할 만한 지나침이 되었지만, 때로는 그저 침묵과 지나침만으론 해소되지 않는 울음이 있단 걸 나도, 펄롱도 이제는 아는 것이다.
소설은 그날 원장수녀 앞에 소녀를 두고 돌아온 펄롱의 심경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 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 –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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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
| ⓒ 그린나래미디어 |
그로부터 펄롱은 아이를 '기억할 만한 지나침' 쯤으로 남겨둘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지나친다면 기억할 만한 것이 아니게 될 것이며, 기억할 만한 것이 되게 하려면 지나칠 수 없다는 것. 두 가지 선택지 앞에서 펄롱은 고뇌한다.
다시 찾은 수녀원 석탄 광으로 이끌리듯 다가서고, 그 앞에서 문을 열지를 고민한다. 그 안에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고, 그 아이를 데리고 무사히 수녀원을 나올 수 있을까를 걱정한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다.
눈물이 찔끔 솟은 게 그 순간이었던가. 나는 세상의 많은 아름다움을 보았는데, 그중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특별히 값지게 기억한다.
세상의 많은 아름다움 가운데는 전혀 아름답지 않은 곳에서 피어나는 것이 있다. 그저 아름답지 않을 뿐 아니라, 일찍이 어떠한 아름다움도 자리한 적 없던 곳에서 태동하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그 눈치 없는 싹틈과 마주하여 그것이 마침내 도달할 찬란함이 아니라 외로움과 의심과 수없이 일어날 후회 비슷한 무엇들을 떠올리는 건 내가 아름답지 못한 때문인가 한다.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안온한 일이란 걸 알고 있다.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권할 수도 없겠다. 그러나 세상엔 슬픔이 짙게 깔린 거리를 어떻게든 나아가는 이가 있는 것이라고, 나는 펄롱의 운명을 응원하기로 결정한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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