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펜 정신’으로 살린 ‘적신의 괴수’가 쓴 실록[이기환의 Hi-story](109)

2023. 11. 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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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작품(추정)인 <금강산 도권>에서 표현된 오대산 사고(왼쪽). 지난 11월 12일 개관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오른쪽). 강원 평창 오대산 사고는 임진왜란 직후에 재편찬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5대 사고 중 하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제공



“‘빨간펜(주묵사) 정신’을 잊지 마세요.” 강원도 평창에 설립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 ‘오대산 사고본 실록과 의궤’가 상설 전시된다는 자료를 받고 단박에 ‘빨간펜’이 떠올랐습니다. 우선 ‘오대산 사고본’ 실록이 뭔지 잠깐 소개해보죠.

실록은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472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일어난 순서대로 서술하는 방식)로 기록한 책이죠. 책은 춘추관(서울), 정족산(강화), 봉화(태백산), 적상산(무주), 오대산(평창) 등 ‘5대 사고’에 한 부씩 보관했습니다.

이중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일본 도쿄대(東京大)로 반출됐다가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대부분 불타 없어졌고요. 용케 살아남은 75책(<성종실록>·<중종실록>·<선조실록>·<효종실록>)이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 상설 전시된 겁니다.

■‘빨간펜’(붉은 먹글씨)의 흔적

그중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은 정본이 아닌 교정본이라는 특징이 있는데요. 임진왜란 직후에 실록을 찍을 때 교정을 본 흔적이 남아 있는 ‘교정쇄본’을 버리지 않고 ‘오대산 사고’에 보낸 겁니다. 전쟁 직후 궁핍했던 시절이니 ‘교정본을 그냥 버리기 아깝다’는 이유였죠. 그래서 오대산 사고본 중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에는 교정을 보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붉은 먹글씨의 교정글자가 남은 두 실록을 보면서 ‘주묵사’ 정신을 떠올렸습니다. ‘주묵사(朱墨史)’는 송나라 역사가인 범충(1067~1141)이 <신종실록>을 수정하면서 <고이(考異·차이점 살펴 비교)>를 쓸 때 활용한 서술기법입니다. 즉 원문은 검은 글씨로, 뺄 것은 노란 글씨로, 새로 삽입하는 것은 붉은 글씨로 썼습니다. 이중 고치는 대목의 역사를 붉은 먹글씨로 썼다 해서 ‘주묵사’라 했습니다(<송사> ‘열전 범충전’).

여기서 질문 나오겠네요. 그냥 ‘교정’이라 하면 될 것을 왜 어려운 용어까지 동원해 ‘주묵사 정신’ 운운했냐고요. 이유가 있습니다. 오대산 사고본엔 단순한 오자교정용 ‘빨간펜’이 있었죠. 실록에는 그러나 ‘보이지 않는 빨간펜’, 즉 ‘주묵사 정신’도 담겨 있답니다.

■‘극과 극’의 인물평

우선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볼까요.

1)“류성룡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고 선비의 억울한 죽음에도 입을 닫았다. …재상의 그릇이 부족한 인물이다.”(<선조실록> 1603년 10월 7일)

“실록 편찬자가 비방하고 배척했다. 류성룡은 나라 걱정을 집안일처럼 했다.”(<선조수정실록> 1603년 10월 1일)

2)“이덕형은 젊은 시절 재능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임진왜란 때 군소배와 어울려 예절을 상실….”(<선조실록 1598년 4월 26일)

“이덕형은 청렴한 인재라는 중망으로… 나라를 위해 집을 잊은… 어진 재상인데 기자헌 무리가 시기해서… 얼토당토않은 사실 기록….”(<선조수정실록 1598년 12월 21일)

3)“정철은 편협하고 망령돼… 원망을 자초했다. …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선조실록> 1593년 12월 21일)

“정철을 권간이나 적신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 이산해·류성룡 등 다른 정승들도 있는데 어떻게 권세를 부린단 말인가.”(<선조수정실록> 1593년 12월 1일)

4)“이이첨은 천성이 영특하고 기개가 있으며 간쟁하는 풍도가 있었다.”(<선조실록> 1597년 10월 17일)

“이이첨은 간적의 괴수다. 실록을 쓸 때 스스로 거리낌 없이 칭찬했으니 통탄스럽다.”(<선조수정실록> 1597년 12월 1일)

5)“기자헌은 도량이 넓고 덕망이 있었다.”(<선조실록> 1605년 8월 2일)

“기자헌이 실록을 감수할 때 자기 입맛대로 스스로 칭찬했으니 주벌을 가해도 모자라다.”(<선조수정실록> 1605년 8월 1일)

■‘적신의 괴수’가 편찬한 역사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인물평이 극과 극이죠. 왜 그랬을까요. 1623년(인조 원년) 8월 18일 이정구(1564~1635) 등이 “<선조실록>은 적신의 괴수가 편찬한 부끄러운 역사”라면서 “반드시 재편찬돼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섭니다.

요컨대 광해군 때(1609) 편찬한 <선조실록>은 대북파인 기자헌(1562~1624)과 이이첨(1560~1623)이 중심이 돼 찬술했기 때문에 객관성을 잃었다는 겁니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강원 평창 오대산 사고. 1910년 국권 상실 후 오대산 사고의 서책은 국권피탈 후인 1913년 10월 일본 도쿄대학(東京大) 도서관으로 반출됐다가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자료



사실 본래 <선조실록>의 편찬 책임자는 기자헌, 이이첨 등이 아니었답니다. 처음에는 이항복(1556~1618)과 이정구, 신흠(1566~1628) 등이 맡았는데,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소북파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옥사)로 이항복 등 3인이 축출되죠. 이후 <선조실록>의 편찬은 기자헌과 이이첨 등 대북파가 주도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세상이 바뀌어 광해군과 대북파가 쫓겨가자 옳다구나 싶어 수정작업에 나선 겁니다.

■부실 논란에 휩싸인 실록

<선조실록>은 태생부터가 부실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록 편찬을 위한 원자료인 사초가 임진왜란 와중에 불타버렸기 때문입니다. 왜적들의 소행이냐고요? 아닙니다. 선조 임금을 따라 의주로 몽진하던 사관 조존세(1562~?), 김선여(1567~?), 임취정(1561~1628), 박정현(1562~1637) 등 4인이 사초 책을 몽땅 불태우고 도망가버렸습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12월 1일).

이로써 선조 즉위년(1567)~임진왜란 직전(1592년 3월)까지 25년의 기록이 송두리째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지금 남아 있는 <선조실록> 221권 가운데 ‘사초 실종’ 25년의 기사는 26권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임진왜란과 그 이후의 기사들은 충실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축옥사 이후 <선조실록> 편찬을 맡은 대북파의 편협하고 일방통행식 역사 서술도 문제였습니다.

당색을 떠나 인망이 두터운 한준겸(1557~1627)·이덕형(1561~1613)·이현영(1573~1642) 등과 류성룡(1542~1607)·정구(1543~1620) 등 남인 관료와 학자, 서인 계열의 성혼(1535~1598)·이항복·윤두수(1533~1601)·신흠·이정구·정철(1536~1593)·김상헌(1570~1652) 등은 닥치는 대로 비방했습니다.

반면 기자헌, 이이첨 등 자파 인물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군자로 표현했습니다. 올바른 역사서술이라고 볼 수 없죠.

그래서 <선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 중 가장 형편없다는 평을 받고 있죠. 그럴 때 인조반정으로 서인 세상이 됐으니 실록의 수정 여론이 비등해졌던 겁니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는 일본에서 환수된 의궤 82책도 소장하게 된다.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 주요 행사의 준비와 시행·사후 처리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국가기록물이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제공



■“당신 혼자 써라”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의 편찬도 녹록지는 않았습니다. 이괄의 난(1624)과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등 병란이 이어지면서 지지부진했죠.

또 <선조실록>보다 <광해군일기>의 편찬이 급하다는 논의가 우선했습니다. 이이첨 등 대북파 때문에 광해군 초기 시대의 역사를 메모한 사초가 더할 수 없이 왜곡된 게 더 심각한 문제라는 의론이 일어났거든요. 반정 세력으로서는 갖가지 병란을 겪으면서 실추될 대로 실추된 ‘반정의 정당성’을 먼저 입증하는 것이 우선이었겠죠.

결국 <선조수정실록>은 이정구 등의 문제 제기 후 18년이 지난 1641년(인조 19)이 돼서야 재론됩니다. 대제학 이식(1584~1647)이 나섰습니다.

“잇단 변란 때문에 사초는 물론 민간에 떠도는 야사와 각 가문에서 전하는 서책도 거의 인멸됐습니다. 또 옛일을 아는 신하들이 죽었거나 늙어서….”(<인조실록> 1641년 2월 12일)

이로써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이 급물살을 탑니다. 처음엔 “수정실록의 편찬을 이식 개인이 전담하고, 실록청도 이식의 집에 설치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실록편찬을 개인에게 맡긴다는 건데요.

전례가 있었습니다. 즉 사마광(1019~1086)의 <자치통감>이나 김부식(1075~1151)의 <삼국사기>처럼 1명이 책임을 지고 역사서를 일관되게 찬술하는 편이 효율성과 비용 절감 측면에서도 낫다는 판단이 든 거죠.

오대산 사고본 중 <중종실록>에서 보이는 교정 흔적. 임진왜란 이후 다시 찍어낸 실록 중 오대산 사고에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의 마무리 교정본을 보관했다. 물자를 아끼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박수희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원 제공



■“당대의 역사를 혼자 쓴다고?”

이식은 그러나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전조(당나라)의 역사였고, 조선왕조실록은 당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다르다”(<인조실록> 1641년 4월 6일)는 겁니다. 이전 왕조의 역사야 개인이 차분히 앉아 편찬할 수 있지만, 당대의 역사를 어찌 홀로 감당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식은 “절충하고 필삭할 일은 마땅히 함께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딴은 그렇죠. 역사 서술이 개인 의견이나 당론에 의해 좌지우지되면 안 되겠죠. 여러 사람의 논의를 통한 첨삭, 즉 공적인 논의의 필요를 역설한 겁니다.

이런 이식의 주장이 가납돼 <선조수정실록>은 사관 개인의 저술이 아니라 공론에 따라 진행됐습니다. 빈 관사를 정해 편의를 제공하고 전국 팔도의 감사에게 사관을 지낸 적이 있는 사람들의 사초와 야사를 수집해 올려보내도록 했습니다(<인조실록> 1641년 5월 7일).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도 수정작업은 1657년(효종 8년)이 돼서야 마무리됐습니다. 인조 원년(1623)에 시작했으니 34년의 장구한 세월을 필요로 했던 겁니다.

일제강점기 오대산 사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빛나는 포인트

<선조수정실록> 편찬 과정에서 ‘빛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수정작업을 마무리했다면 어떨까요. ‘적신의 괴수가 편찬한 부끄러운 역사’로 지목된 <선조실록>은 폐기하거나 불에 태웠어야 했겠네요.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사이좋게 남겨 두었는데요.

물론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자들은 첨삭·수정한 흔적인 ‘빨간펜’, 즉 붉은 먹글씨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주묵사’의 정신은 그러나 살렸습니다. “야사나 각 가문의 기록을 수습해서 절충하고 첨삭해서 사고에 ‘함께 보관하는 것’은 ‘주묵사’가 남긴 뜻입니다.”(이식·<인조실록> 1641년 2월 12일) 역시 <선조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한 채유후(1599~1660)의 말을 들어볼까요.

“역사기록에는 잘못된 곳이 많기 때문에 갖가지 수정서 및 해석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잘못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으니 송나라 범충의 ‘주묵사’가 그것입니다. …실록은 신구본을 모두 보존해 이 ‘주묵사’처럼 참고하도록 했습니다.”(<선조수정실록> 후기 및 1657년 10월 5일조)

이식과 채유후는 잘못된 역사를 고쳤다고 해서 원래의 역사서를 폐기하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묵사’의 교훈이라는 겁니다. ‘원본과 수정본을 함께 남겨 둠으로써 후대의 공정한 평가를 받아보겠다’는 역사가의 정신이 아닐까요. 그 덕에 저 같은 기자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비교해서 인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라가 있어도 역사가 없으면 나라가 아니요, 역사가 있어도 공정치 못하면 역사가 아닙니다.”(이식)

“<선조수정실록>에서 무고되고 모욕당한 사실을 일일이 거론해 말끔히 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의 처음과 끝을 살피면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사람이 자세히 살필 일이다.”(채유후)

지난 11월 12일 개관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실록의 원본을 상시로 직접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실록과 함께 오대산 사고본 의궤 원본도 전시된다. 박물관은 관련 유물 1207여 점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수장고와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실감형 영상관 등으로 구성됐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제공



■정세에 따라 실록을 고쳤지만…

이러한 주묵사의 정신은 훗날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과 <숙종실록보궐정오>, <경종실록>과 <경종수정실록> 등의 편찬 때도 이어집니다. 비록 볼썽사나운 당쟁 등 갖가지 이유로 실록을 고쳤지만, 기존의 실록도 어떤 경우든 폐기하지 않았습니다. 1779년(정조 3) 7월 28일 <경종수정실록>이 마무리될 즈음 경연관 송덕상(?~1783)이 “실록을 바로잡았으니 이제 구본(舊本·<경종실록>)은 물이나 불에 넣어 버리자”는 의견을 냅니다.

이에 정조(재위 1776~1800)는 “우리 실록 중에서도 수정본과 구본을 함께 남겨 둔 일도 있다”고 ‘주묵사’ 정신을 거론하면서 “수정본과 구본을 모두 남겨 두는 것은 또한 옛 법”(<정조실록> 1779년 7월 28일)이라고 일축했습니다. 조선의 중흥 군주다운 ‘사이다’ 발언이죠. 실로 뜬금없는 얘기처럼 들렸을 조선의 ‘빨간펜 정신’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겠죠.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는 간토대지진 등에서 용케 살아남은 75책(<성종실록>·<중종실록>·<선조실록>·<효종실록>)이 상설 전시된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제공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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