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펜 정신’으로 살린 ‘적신의 괴수’가 쓴 실록[이기환의 Hi-story](109)
“‘빨간펜(주묵사) 정신’을 잊지 마세요.” 강원도 평창에 설립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 ‘오대산 사고본 실록과 의궤’가 상설 전시된다는 자료를 받고 단박에 ‘빨간펜’이 떠올랐습니다. 우선 ‘오대산 사고본’ 실록이 뭔지 잠깐 소개해보죠.
실록은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472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일어난 순서대로 서술하는 방식)로 기록한 책이죠. 책은 춘추관(서울), 정족산(강화), 봉화(태백산), 적상산(무주), 오대산(평창) 등 ‘5대 사고’에 한 부씩 보관했습니다.
이중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일본 도쿄대(東京大)로 반출됐다가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대부분 불타 없어졌고요. 용케 살아남은 75책(<성종실록>·<중종실록>·<선조실록>·<효종실록>)이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 상설 전시된 겁니다.
■‘빨간펜’(붉은 먹글씨)의 흔적
그중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은 정본이 아닌 교정본이라는 특징이 있는데요. 임진왜란 직후에 실록을 찍을 때 교정을 본 흔적이 남아 있는 ‘교정쇄본’을 버리지 않고 ‘오대산 사고’에 보낸 겁니다. 전쟁 직후 궁핍했던 시절이니 ‘교정본을 그냥 버리기 아깝다’는 이유였죠. 그래서 오대산 사고본 중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에는 교정을 보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붉은 먹글씨의 교정글자가 남은 두 실록을 보면서 ‘주묵사’ 정신을 떠올렸습니다. ‘주묵사(朱墨史)’는 송나라 역사가인 범충(1067~1141)이 <신종실록>을 수정하면서 <고이(考異·차이점 살펴 비교)>를 쓸 때 활용한 서술기법입니다. 즉 원문은 검은 글씨로, 뺄 것은 노란 글씨로, 새로 삽입하는 것은 붉은 글씨로 썼습니다. 이중 고치는 대목의 역사를 붉은 먹글씨로 썼다 해서 ‘주묵사’라 했습니다(<송사> ‘열전 범충전’).
여기서 질문 나오겠네요. 그냥 ‘교정’이라 하면 될 것을 왜 어려운 용어까지 동원해 ‘주묵사 정신’ 운운했냐고요. 이유가 있습니다. 오대산 사고본엔 단순한 오자교정용 ‘빨간펜’이 있었죠. 실록에는 그러나 ‘보이지 않는 빨간펜’, 즉 ‘주묵사 정신’도 담겨 있답니다.
■‘극과 극’의 인물평
우선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볼까요.
1)“류성룡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고 선비의 억울한 죽음에도 입을 닫았다. …재상의 그릇이 부족한 인물이다.”(<선조실록> 1603년 10월 7일)
“실록 편찬자가 비방하고 배척했다. 류성룡은 나라 걱정을 집안일처럼 했다.”(<선조수정실록> 1603년 10월 1일)
2)“이덕형은 젊은 시절 재능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임진왜란 때 군소배와 어울려 예절을 상실….”(<선조실록 1598년 4월 26일)
“이덕형은 청렴한 인재라는 중망으로… 나라를 위해 집을 잊은… 어진 재상인데 기자헌 무리가 시기해서… 얼토당토않은 사실 기록….”(<선조수정실록 1598년 12월 21일)
3)“정철은 편협하고 망령돼… 원망을 자초했다. …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선조실록> 1593년 12월 21일)
“정철을 권간이나 적신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 이산해·류성룡 등 다른 정승들도 있는데 어떻게 권세를 부린단 말인가.”(<선조수정실록> 1593년 12월 1일)
4)“이이첨은 천성이 영특하고 기개가 있으며 간쟁하는 풍도가 있었다.”(<선조실록> 1597년 10월 17일)
“이이첨은 간적의 괴수다. 실록을 쓸 때 스스로 거리낌 없이 칭찬했으니 통탄스럽다.”(<선조수정실록> 1597년 12월 1일)
5)“기자헌은 도량이 넓고 덕망이 있었다.”(<선조실록> 1605년 8월 2일)
“기자헌이 실록을 감수할 때 자기 입맛대로 스스로 칭찬했으니 주벌을 가해도 모자라다.”(<선조수정실록> 1605년 8월 1일)
■‘적신의 괴수’가 편찬한 역사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인물평이 극과 극이죠. 왜 그랬을까요. 1623년(인조 원년) 8월 18일 이정구(1564~1635) 등이 “<선조실록>은 적신의 괴수가 편찬한 부끄러운 역사”라면서 “반드시 재편찬돼야 한다”고 촉구하고 나섭니다.
요컨대 광해군 때(1609) 편찬한 <선조실록>은 대북파인 기자헌(1562~1624)과 이이첨(1560~1623)이 중심이 돼 찬술했기 때문에 객관성을 잃었다는 겁니다.
사실 본래 <선조실록>의 편찬 책임자는 기자헌, 이이첨 등이 아니었답니다. 처음에는 이항복(1556~1618)과 이정구, 신흠(1566~1628) 등이 맡았는데,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소북파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옥사)로 이항복 등 3인이 축출되죠. 이후 <선조실록>의 편찬은 기자헌과 이이첨 등 대북파가 주도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세상이 바뀌어 광해군과 대북파가 쫓겨가자 옳다구나 싶어 수정작업에 나선 겁니다.
■부실 논란에 휩싸인 실록
<선조실록>은 태생부터가 부실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록 편찬을 위한 원자료인 사초가 임진왜란 와중에 불타버렸기 때문입니다. 왜적들의 소행이냐고요? 아닙니다. 선조 임금을 따라 의주로 몽진하던 사관 조존세(1562~?), 김선여(1567~?), 임취정(1561~1628), 박정현(1562~1637) 등 4인이 사초 책을 몽땅 불태우고 도망가버렸습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12월 1일).
이로써 선조 즉위년(1567)~임진왜란 직전(1592년 3월)까지 25년의 기록이 송두리째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지금 남아 있는 <선조실록> 221권 가운데 ‘사초 실종’ 25년의 기사는 26권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임진왜란과 그 이후의 기사들은 충실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축옥사 이후 <선조실록> 편찬을 맡은 대북파의 편협하고 일방통행식 역사 서술도 문제였습니다.
당색을 떠나 인망이 두터운 한준겸(1557~1627)·이덕형(1561~1613)·이현영(1573~1642) 등과 류성룡(1542~1607)·정구(1543~1620) 등 남인 관료와 학자, 서인 계열의 성혼(1535~1598)·이항복·윤두수(1533~1601)·신흠·이정구·정철(1536~1593)·김상헌(1570~1652) 등은 닥치는 대로 비방했습니다.
반면 기자헌, 이이첨 등 자파 인물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군자로 표현했습니다. 올바른 역사서술이라고 볼 수 없죠.
그래서 <선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 중 가장 형편없다는 평을 받고 있죠. 그럴 때 인조반정으로 서인 세상이 됐으니 실록의 수정 여론이 비등해졌던 겁니다.
■“당신 혼자 써라”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의 편찬도 녹록지는 않았습니다. 이괄의 난(1624)과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등 병란이 이어지면서 지지부진했죠.
또 <선조실록>보다 <광해군일기>의 편찬이 급하다는 논의가 우선했습니다. 이이첨 등 대북파 때문에 광해군 초기 시대의 역사를 메모한 사초가 더할 수 없이 왜곡된 게 더 심각한 문제라는 의론이 일어났거든요. 반정 세력으로서는 갖가지 병란을 겪으면서 실추될 대로 실추된 ‘반정의 정당성’을 먼저 입증하는 것이 우선이었겠죠.
결국 <선조수정실록>은 이정구 등의 문제 제기 후 18년이 지난 1641년(인조 19)이 돼서야 재론됩니다. 대제학 이식(1584~1647)이 나섰습니다.
“잇단 변란 때문에 사초는 물론 민간에 떠도는 야사와 각 가문에서 전하는 서책도 거의 인멸됐습니다. 또 옛일을 아는 신하들이 죽었거나 늙어서….”(<인조실록> 1641년 2월 12일)
이로써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이 급물살을 탑니다. 처음엔 “수정실록의 편찬을 이식 개인이 전담하고, 실록청도 이식의 집에 설치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실록편찬을 개인에게 맡긴다는 건데요.
전례가 있었습니다. 즉 사마광(1019~1086)의 <자치통감>이나 김부식(1075~1151)의 <삼국사기>처럼 1명이 책임을 지고 역사서를 일관되게 찬술하는 편이 효율성과 비용 절감 측면에서도 낫다는 판단이 든 거죠.
■“당대의 역사를 혼자 쓴다고?”
이식은 그러나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전조(당나라)의 역사였고, 조선왕조실록은 당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다르다”(<인조실록> 1641년 4월 6일)는 겁니다. 이전 왕조의 역사야 개인이 차분히 앉아 편찬할 수 있지만, 당대의 역사를 어찌 홀로 감당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식은 “절충하고 필삭할 일은 마땅히 함께 의논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딴은 그렇죠. 역사 서술이 개인 의견이나 당론에 의해 좌지우지되면 안 되겠죠. 여러 사람의 논의를 통한 첨삭, 즉 공적인 논의의 필요를 역설한 겁니다.
이런 이식의 주장이 가납돼 <선조수정실록>은 사관 개인의 저술이 아니라 공론에 따라 진행됐습니다. 빈 관사를 정해 편의를 제공하고 전국 팔도의 감사에게 사관을 지낸 적이 있는 사람들의 사초와 야사를 수집해 올려보내도록 했습니다(<인조실록> 1641년 5월 7일).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도 수정작업은 1657년(효종 8년)이 돼서야 마무리됐습니다. 인조 원년(1623)에 시작했으니 34년의 장구한 세월을 필요로 했던 겁니다.
■빛나는 포인트
<선조수정실록> 편찬 과정에서 ‘빛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수정작업을 마무리했다면 어떨까요. ‘적신의 괴수가 편찬한 부끄러운 역사’로 지목된 <선조실록>은 폐기하거나 불에 태웠어야 했겠네요.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사이좋게 남겨 두었는데요.
물론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자들은 첨삭·수정한 흔적인 ‘빨간펜’, 즉 붉은 먹글씨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주묵사’의 정신은 그러나 살렸습니다. “야사나 각 가문의 기록을 수습해서 절충하고 첨삭해서 사고에 ‘함께 보관하는 것’은 ‘주묵사’가 남긴 뜻입니다.”(이식·<인조실록> 1641년 2월 12일) 역시 <선조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한 채유후(1599~1660)의 말을 들어볼까요.
“역사기록에는 잘못된 곳이 많기 때문에 갖가지 수정서 및 해석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잘못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으니 송나라 범충의 ‘주묵사’가 그것입니다. …실록은 신구본을 모두 보존해 이 ‘주묵사’처럼 참고하도록 했습니다.”(<선조수정실록> 후기 및 1657년 10월 5일조)
이식과 채유후는 잘못된 역사를 고쳤다고 해서 원래의 역사서를 폐기하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묵사’의 교훈이라는 겁니다. ‘원본과 수정본을 함께 남겨 둠으로써 후대의 공정한 평가를 받아보겠다’는 역사가의 정신이 아닐까요. 그 덕에 저 같은 기자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비교해서 인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라가 있어도 역사가 없으면 나라가 아니요, 역사가 있어도 공정치 못하면 역사가 아닙니다.”(이식)
“<선조수정실록>에서 무고되고 모욕당한 사실을 일일이 거론해 말끔히 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의 처음과 끝을 살피면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사람이 자세히 살필 일이다.”(채유후)
■정세에 따라 실록을 고쳤지만…
이러한 주묵사의 정신은 훗날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과 <숙종실록보궐정오>, <경종실록>과 <경종수정실록> 등의 편찬 때도 이어집니다. 비록 볼썽사나운 당쟁 등 갖가지 이유로 실록을 고쳤지만, 기존의 실록도 어떤 경우든 폐기하지 않았습니다. 1779년(정조 3) 7월 28일 <경종수정실록>이 마무리될 즈음 경연관 송덕상(?~1783)이 “실록을 바로잡았으니 이제 구본(舊本·<경종실록>)은 물이나 불에 넣어 버리자”는 의견을 냅니다.
이에 정조(재위 1776~1800)는 “우리 실록 중에서도 수정본과 구본을 함께 남겨 둔 일도 있다”고 ‘주묵사’ 정신을 거론하면서 “수정본과 구본을 모두 남겨 두는 것은 또한 옛 법”(<정조실록> 1779년 7월 28일)이라고 일축했습니다. 조선의 중흥 군주다운 ‘사이다’ 발언이죠. 실로 뜬금없는 얘기처럼 들렸을 조선의 ‘빨간펜 정신’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겠죠.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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