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행복하지 않은 난민 그리고 환대
[김성민]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과 불안
익숙함을 떠난다는 것은 불편함을 넘어 외롭고 두렵기도 한 일이다. 낯선 곳에서는 부자유한 '타자'로 머문다. 시인 윤동주의 <고향집>에서 민족을 잃은 설움과 타향에서의 외로움을 본다.
고향집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엔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 집
▲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익숙한 삶터와 일터를 떠나야만 했던 난민 |
ⓒ @Unsplash / Oleksandra Pe |
유엔난민기구(UNHCR)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강제로 고향과 조국을 떠나 이주한 사람의 수는 1억 2천만 명에 달한다. 전 세계 인구 70명당 한 명꼴이다. 1년 전과 비교하면 거의 2천만 명이 늘어난 것으로, 난민과 실향민 추적을 시작한 이래 전년 대비 가장 큰 증가 폭이라고 UNHCR은 밝혔다. 대한민국 인구의 두 배를 넘어서는 이 숫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익숙한 삶터와 일터를 떠나야만 했던 난민의 숫자다.
12년 넘게 전쟁을 벌이고 있는 시리아의 난민 문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2011년 이후 680만 명이 넘는 시리아 국민이 본국을 떠나야 했고, 680만 명 정도는 국내 실향민으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2022년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이 격화되면서 현재 830만 명이 넘는 난민들이 우크라이나를 떠났고 약 370만 명의 국내 실향민이 발생했다. 박해를 피해 방글라데시로 넘어온 로힝야 난민이 100만 명에 이르고, 군사 독재의 탄압이 심각한 미얀마에서도 난민 상황에 이른 사람들이 무려 3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비단 전쟁과 박해를 피해 이주한 난민만이 아니다. 2015년 이후 베네수엘라에서는 7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었다. 재난과 기후, 기아 등으로 인한 난민은 앞으로도 늘어날 전망이다.
2018년에는 500명이 넘는 예멘인들이 제주도로 입국해 난민 신청을 하면서 한국 사회에 큰 화두로 대두되기도 했다. 예멘 사람들이 대거 입국하면서 찬반 논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난민 신청 허가 폐지' 청원이 무려 70만 명을 넘기도 했다.
이뿐인가. 기후 위기로 인한 자연재해로 살던 곳에서 떠날 수밖에 없는 이주민들이 늘고 있다. 지난해 홍수로 큰 피해를 본 파키스탄과 장기간 계속되는 가뭄으로 심각한 기아 위기에 처한 소말리아에서 늘어나는 '기후 난민'이 그 예다.
그동안 역사적으로 난민 문제를 풀기 위한 난민 구제 운동 및 법적·제도적 차원에서 노력이 있어 왔다. 하지만 최근 동유럽을 중심으로 난민 유입에 대한 '제노포비아'나 거부감이 확산되고, 여기에 편승한 우파 정당들이 각국에서 지지율을 높이고 있어 난민 문제 해결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 곁의 타자들, 환대의 경계를 넘어
난민과 이주민은 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에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23년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 체류 외국인은 25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어느 국가든 인구 대비 외국인 숫자가 4%를 넘게 되면 '가시적'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 한국에서의 이주민, 난민 문제는 현실화할 것이다. 난민과 이주민들에 대해 문턱 높이기와 장벽 쌓기로 풀어갈 문제로 치부할 수는 결코 없다. 법적이고 제도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하려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내 외국인들에 대해 주체라는 우리 앞에 마주 선 '타자'로서만 인식하기보다, 경계를 허물고 타자 안으로 들어가려는 존재론적 인정이 필요하다.
난민과 이주민은 거주자에게 이방인이고 낯선 '타자'로 불릴 수 있다. 데리다(Jacques Derriad)가 말하듯이 타자와의 관계는 균형을 잡을 수 없고 상호성도 확보하기 힘든 비대칭적인 관계다. 타자를 향한 말과 타자를 호명하는 말의 차원은 때로 언어와 법적 폭력을 통해 타자를 주체(거주자)의 목적이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타자의 자유'를 이해하기 위해 타자에 대한 관찰자적 시선보다 참여자적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타자의 삶에 대한 관심은 타자의 '자유'를 도외시하지 않아야 한다. '공공성'은 타자의 자유를 옹호하는 차원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타자의 처지에 서 보고, 타자의 처지로 들어가 보는 '공감(共感, sympathy)'에서 '환대(歡待, hospitality)'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이방인에게 정부가 베푸는 시혜적 관용은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관용은 우리의 울타리와 법, 언어에 익숙하도록 허락해 주는 위계적 질서로 편입하는 관문일지도 모른다. 관용은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조건적 환대'인 셈이다. 데리다는 타자에 대한 관용 이면에 감추어진 속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권은 오만하게 내려다 보면서 타자에게 이렇게 말하죠. 네가 살아 가게 내버려 두마, 넌 참을 수 없는 정도는 아니야, 내 집에 네 자리를 마련해 두마, 그러나 이게 내 집이라는 건 잊지 마...
- 데리다
그렇다면 조건적 환대를 넘어 서는 무조건적인 환대란 어떤 것일까. 데리다의 말을 빌려 보자. "순수하고 무조건적인 환대는, 기대되지도 초대되지도 않은 모든 자에게, 절대적으로 낯선 방문자로서 도착한 모든 자[일어난 모든 것]에게, 신원을 확인할 수 없고 예견할 수 없는 도착자에게, 사전에 개방되어 있다. 이를 초대(invitation)의 환대가 아니라 방문(visitation)의 환대라 부르자."
하지만 이러한 제한없는 환대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데리다도 알고 있다. 데리다는 무조건적인 환대에 대한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법과 정치의 조건이 정해지기를 요청했다고 볼 수 있다.
국제구조위원회(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의 밀리밴드(David Miliband) 국제 총재가 "무고한 민간인들은 이 사태의 원인이 아니라 희생자이며, 그들의 존엄성과 희망에 대한 지원이 핵심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뿐더러, 이러한 환대는 법적·제도적으로 구체화돼야 한다.
▲ 김성민 국민총행복전환포럼 부이사장 |
ⓒ 국민총행복전환포럼 |
덧붙이는 글 | <공공정책> 226호(2024.08)에 실린 여는글 “익숙함과 낯섦-난민과 환대에 대해”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국민총행복전환포럼에서 보내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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