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가슴에 품은 꿈... 영정 속 앳된 얼굴로 영원히 남다 [이태원 압사 참사]
이태원 참사로 목숨을 잃은 158명.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어떤 꿈을 꾸며, 어떤 미래를 그리며 살았을까요. 참사 한 달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 그들의 이름을 호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참사 이후 나온 언론 보도와 취재를 종합해 85명 희생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20대, 그리고 10대·30대·40대·50대, 외국인 등 세 차례로 나눠 사연을 소개합니다. 거리에서 죽어간 158명을 기억하기 위한 기록입니다. <오마이뉴스>에 희생자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으신 분은 record1029@ohmynews.com으로 연락주십시오. <편집자말>
[소중한, 이주연, 조혜지 기자]
▲ 14일 오후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서울 용산구 해밀톤호텔 일대 골목의 통제가 풀려 추모의 글과 꽃이 놓여 있고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 이희훈 |
▲ 이태원 참사 후 첫 주말인 5일 여러 시민과 외국인이 참사 장소 인근인 이태원역 1번 출구를 찾아 추모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
ⓒ 소중한 |
착한 아들·딸이자, 든든한 손주이자, 살가운 친구. 이태원 참사로 숨진 10대 희생자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꿈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들은 앳된 얼굴로 유족과 친구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게 됐다.
30대 희생자들은 이제 막 꿈을 펼치기 시작한 이들이었다. 주택청약 당첨에 웃고, 승진을 앞둬 설레고, 번창하기 시작한 사업에 두근거리고, 취업 준비를 하며 마음을 다잡던 그들의 영정 앞에서 유족들은 "보고싶다"는 말을 되뇌었다. 40·50대 희생자들은 가족의 기둥이었고, 믿음직한 부모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그들을 기억했다.
이태원 참사 발생 후 한 달. <오마이뉴스>는 숫자 안에, 국화 꽃 뒤에 가려졌던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희생자 158명 중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85명의 삶, 꿈, 바람을 정리했고, 이 기사엔 한국인 10·30·40·50대 희생자(총 46명) 중 26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 이태원 참사 후 첫 주말인 5일 여러 시민과 외국인이 참사 장소 인근인 이태원역 1번 출구를 찾아 추모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
ⓒ 소중한 |
윤아무개(15·여)·정아무개(46·여)·정아무개(53·여) : 이태원 참사 희생자 중 가장 어린 윤(15)양은 어머니(46), 이모(53)와 함께 이태원을 찾았고 셋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동아일보> 등에 따르면, 구청 공무원었던 이모는 '분위기 메이커'라 불릴 만큼 활달한 성격이었다. 30년 근속한 그는 내년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그의 지인은 "어린 아들을 남겨놓고 이렇게 가면 어떡하냐,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 아직 초등학생이라..."며 말을 삼켰다. 그의 슬하에는 두 딸과 아들이 있었다. 한편 윤양과 어머니 정씨 모녀의 빈소엔 두 사람의 영정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분향소에는 윤양 친구들이 남긴 편지들이 쌓였다.
"왜 자꾸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는 건지. 난 아직도 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 10월 30일 일요일 오후 11시 34분 잠들기 전 윤OO 딱 세 글자 카톡으로 보냈어. 아직도 그 카톡의 1 표시는 사라지지 않았어. 오늘 애도 교육을 받았어. 이 교육을 받는 게 너무 서러웠어. 왜 하필 너였을까. 꿈에서라도 나타나줘. 보고싶어."
"너는 나한테 특별한 친구였어. 커서 대기업에 들어가 돈 많이 벌 거라고 했던 게 생각나. 돈도 못 벌고 놀지도 못하고 너무너무 마음이 아파. 다음 생에 태어나기 전에 친구를 고를 수 있다면 나 꼭 골라줘야 해!"
"거기서는 잘 지내고 엄마랑 손 꼭잡고 하고 싶은거 다 하고 살아. 학원이나 숙제 같은 건 하지 말고! 나랑 다녀줘서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해. 잘 지내."
"우리 OO한테 네일도 받아야 하고 마라탕도 먹어야 하고 코엑스도 또 가야 하는데 ㅎㅎ 너를 이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마음 아프다. 하느님은 왜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데려가는 건지 야속하다. 이제 너의 삶에선 행복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정말로 다음 생에도 내 친구가 되어줘."
"학생증 너무 예쁘게 잘 나왔더라고 보고가면 좋았을 걸. 너가 이 세상에서 제발 예쁘고 완전 OO(연예인)처럼 나왔어!! 체육도 엄청 잘했잖아!! 뜀틀 진짜 잘했는데 그리고 너 공부도 완전 잘했잖아. 이렇게 보니까 못하는게 없었네 OO, 우리 OO 하늘에서는 푹 쉬자 우리 잊진 말고!! 20살 30살 10000살이 되도 우린 너랑 함께 한다는 거 잊지마 ♡♡"
한아무개(16·여) : <한겨레>에 따르면, 한양의 꿈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다. 메이크업 자격증까지 땄던 그는 지인의 화장을 해주거나 머리를 예쁘게 만져줬다. 지난 6월 한양과 '병동 메이트'로 지낸 문아무개(15)양은 그를 '초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양이 장난기가 많고 밝고 에너지가 넘쳤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한 달 동안 병원 생활을 함께 했다. 두 사람은 "한강에서 꼭 라면을 먹자"고 약속했으나 지킬 수 없게 됐다. 문양은 "다 포기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하냐"고 묻자, 한양이 "포기하면 안 되지"라며 잡아줬다. 문양은 "언니 몫까지 살아가야겠다, 정신과 의사가 돼서 저처럼 아픈 사람도 치료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서아무개(16·남) : <뉴시스> <천지일보> 등에 따르면 서군은 3대 독자였다. 공부를 잘해 특목고에 진학했다고 한다. 서군의 할머니는 "소중한 애를 데려가고 너무하다, 눈물로 키웠다"며 통곡했다. 서군은 친구들과 함께 이태원을 찾았다 홀로 돌아오지 못했다.
▲ 이태원 참사 후 첫 주말인 5일 여러 시민과 외국인이 참사 장소 인근인 이태원역 1번 출구를 찾아 추모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
ⓒ 소중한 |
이아무개(17·남)·김아무개(17·남) : <조선일보>에 따르면, 같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두 친구는 함께 이태원을 찾았다가 숨을 거뒀다. 두 학생의 빈소엔 아직 장례식장과 정장이 어색한 청소년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이군은 4남매 중 맏이로 동생들을 잘 챙기는 믿음직한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영정이 실린 운구차에 오르며 막내딸에게 "오빠 잘 배웅해주고 올게"라고 말하면서도 이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성품이 착하디 착했다. 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해 동생 용돈이라도 주고 싶다면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고 손자를 떠올렸다. 이군과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는 한 남학생은 "평소 굉장히 밝고 쾌활한 친구라 인기도 많았었다"며 "로봇에 관심이 많아 관련 진로로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고 했다. 아들의 영정을 든 김군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학교를 찾았고 교사와 학생들은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관을 어루만지며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아 쓰러지고 말았다.
김아무개(17·남) :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김군은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옷을 선물하던 다정한 손자이자, 아들이었다. 김군의 할머니는 대기업 취직을 약속하며 '용돈을 드리겠다'고 포부를 이야기하던 손자의 모습을 두고두고 기억했다.
박아무개(19·여) : 1남 2녀 중 막내. <경향신문>·<뉴스1> 등에 따르면 그는 평소 가족을 살뜰히 챙기는 애교 많은 딸이었다. 미용 관련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아무개(19)씨는 실력을 인정받아 졸업 전에 취업을 했고, 지난 6월엔 서울 강남에 있는 미용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직장 동료 7명과 이태원을 찾았다가 참변을 당했다. 아버지의 휴대폰에 박씨는 '귀여운 막둥이♡'로 저장돼있었다. 참사 당일에도 박씨는 아버지에게 "아빠 사랑해", "예쁜 딸래(내)미지?"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아버지는 "사랑한다고 메시지 보낸 딸에게 무뚝뚝하게 '응'이라고 답장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며 "무슨 수를 써도 우리 딸이 돌아오는 건 아니지 않느냐. 사진을 더 찍어둘 걸 그랬다"라고 한없이 울었다. 추석 땐 단 하루 집에 머물면서도 아버지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염색해줬다. 다음에 내려오면 머리카락을 잘라주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다.
박아무개(19·여) : <뉴욕타임스>·<뉴스1> 등에 따르면 박씨의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대전에 위치한 대학의 디자인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내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명절 때도 아르바이트를 해왔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결혼 후 아내가 아파 수술을 해 아기를 갖기 힘든 상황에서 어렵게 얻은 딸"이라며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조차 펼치지 못하고 허망하게 이렇게 되다니"라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박씨의 어머니는 딸의 사진을 안으며 "너무 너무 예뻤다"고 회상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라며 자신의 상실감을 표현했다.
서아무개(19·여) : <문화일보>·<서울신문> 등에 따르면, 사남매의 둘째 딸이었던 서씨는 평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생들과 엄마에게 용돈을 주던 착한 딸이었다. 참사 당시 입대를 압둔 남자친구와 이태원을 찾았다가 인파에 휘말렸고 남자친구의 심폐소생술로 잠시 숨이 돌아왔으나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서씨가 아르바이트를 해 산 새 옷은 흙범벅이 돼 돌아왔다. 서씨의 어머니는 "둘째 딸한테 '엄마 나 나갈 건데 5만 원만. 히히'하고 연락이 왔다. (유류품으로 받은) 지갑을 보니 3만 원이 남아 있었다. 남기려고 조금만 쓴 것 같은데 더 줄걸, 돈이 뭐라고"라며 침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 이태원 참사 후 첫 주말인 5일 여러 시민과 외국인이 참사 장소 인근인 이태원역 1번 출구를 찾아 추모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
ⓒ 소중한 |
안아무개(30·여)·강아무개(30·여)·김아무개(29·여) : <울산매일>·<울산제일일보>·<국민일보> 등에 따르면, 친구 사이인 강씨와 김씨는 결혼식 참석을 위해 서울을 찾아 또 다른 친구인 안씨와 함께 이태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참변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교사인 강씨는 최근 주택청약이 당첨돼 남자친구와 결혼을 꿈꾸던 중이었다. 강씨의 동생은 "누나가 다음 달 부모님께 남자친구를 소개할 예정이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강씨가 근무하던 학교의 관계자는 "밝고 좋은 선생님"으로 그를 떠올렸다. 서울에 온 두 친구를 맞이했던 안씨는 며칠 전에도 새로 이사한 집에 부모님을 초대했다. 안씨의 아버지는 "딸이 서울 구경을 시켜줘서 창경궁도 구경하고 광장시장에서 맛있는 것도 먹었다"며 침통한 심경을 토로했다. 안씨의 남편 역시 참사 직전 세 사람과 식사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임아무개(30·여) : <조선일보>·<머니투데이>에 따르면, 임씨는 최근 창업한 기업을 꼭 성공시키겠다며 큰 포부를 품기 시작한 청년이었다. 국내 특목고, 해외 명문대를 졸업한 후 대기업에 취업하며 "부모에게 걱정할 것 하나 없는 자랑스러운 딸"(아버지)이었던 임씨는 이태원 참사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말 한 마디 할 수 없었던 유족과 친구들은 침통한 마음으로 임씨의 관을 운구차에 실었다. 그를 기리는 조화엔 "◯◯아, 너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을 기억할게. 우리는 언제나 함께야. 고맙고 사랑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사랑스럽게 자라 이제 결혼시킬 일만 남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아무개(30·남) : <경기신문>·<경인일보> 등에 따르면 한씨는 아버지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최근 배달요식업 사업을 시작해 밤낮없이 열심히 일해왔고, 사업이 잘 돼 아버지에게 옷과 구두를 선물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 아빠가 많이 보고싶다, 꿈에 자주 나타나다오"라고 통곡했다.
김아무개(30·남) : <중앙일보>에 따르면 김씨는 병원의 방사선과에서 일했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함께 이태원을 방문했고, 여자친구는 가까스로 참사를 피했다. 어머니 홀로 김씨 누나와 김씨를 키웠다고 한다. 김씨 부모의 지인은 "친누나가 최근 뉴질랜드에 들어와서 함께 가족사진을 찍었다"고 전했다.
정아무개(30·여) : <서울신문>·<문화일보> 등에 따르면 정씨는 독립해 살고 있었지만 매일 아버지와 메시지를 주고받던 딸이었다. 참사 당일 아버지가 저녁을 먹자고 했으나 친구와 선약이 있어 만나지 못했다. 정씨는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 위해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에서 카페를 운영했다.
최아무개(32·여) : 헤어디자이너로 일했던 최씨는 얼마전 '실장'이 됐다. <한국일보>·<문화일보> 등에 따르면, 최씨는 미용 관련 학과에 입학해 수습기간 3년을 버텨 지금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최씨 여동생은 "언니가 특히 밝은 성격이었다"고 전했다. 최씨는 세 남매 중 첫째다. 큰 딸 최씨와 셋이 살고 있던 부모님에게는 최씨의 빈자리가 더 크다. 아버지는 "어렸을 땐 제가 엄했는데 커서는 저녁에 맥주도 자주 먹는 친구 같은 사이였다"고 말했다.
OOO(33·남) : <뉴시스>에 따르면, 그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했다. 여자친구와 이태원에 갔다가 변을 당했다. 그의 여자친구도 함께 세상을 떠났다.
OOO(34·여) : <전북도민일보>·<노컷뉴스> 등에 따르면, OOO씨는 세 자매의 첫째 언니였다. 유족들은 이태원 참사 다음 날인 30일 오후 6시에야 사망 소식을 접했다. 30일 새벽 1시께 이미 실종신고를 했지만 사고로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위치추적이 늦어졌다. 그는 국립중앙의료원 영안실에서 꼬박 12시간이 넘게 있었다. 그의 둘째 동생은 "장례를 하루밖에 못 치르는 게 말이 되냐"라며 "차가운 곳에 언니가 외롭게 남겨졌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 그의 동생은 "세 자매는 티켝태격하며 잘 지내왔다"라며 "진짜 솔직하고 정많은 사람인데 우리 언니 없으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하염없이 울었다.
서아무개(34·남) : <조선일보> 등에 따르면 서씨는 아버지와 매일 영상통화를 하던 살가운 아들이었다. 최근 취업 준비에 매진했다고 한다. 백발의 아버지는 아들 영정 사진 앞에서 "아들아, 아들아,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아들아"라며 낭독하다 말을 잇지 못했다.
▲ 1일 오후 이태원 압사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국화와 메모가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
ⓒ 이희훈 |
차아무개(42·남) : <연합뉴스>·<광주일보> 등에 따르면, 차씨는 집안의 기둥이자 자랑이었다. 고3 때 백혈병을 앓기 시작한 쌍둥이 형을 위해 두 번의 골수이식을 해줬던 그는 이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학업에 정진했다. 차씨는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금융공기업에서 근무 중이었고 일을 시작한 지 11년 만인 지난 추석에 부모님에게 새 아파트를 선물했다. 그는 시간 날 때마다 부모님에게 안부전화를 하고 서울 구경을 시켜주던 아들이기도 했다. 차씨의 어머니는 "엄마 속이라도 좀 썩이고 가지"라며 애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로스쿨 동기는 "선한 친구였다. 자기보다는 부모님을 더 챙겼던 것 같다"며 "변호사가 되면 누구라도 쉽게 민사소송법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고 떠올렸다.
박아무개(43·남) : <매일신문> 등에 따르면, 인천에서 의류사업을 하던 박씨는 거래처 방문 때문에 이태원에 갔다가 목숨을 잃었다. 박씨의 동창에 따르면, 그는 2남 1녀의 막내로 3년 전 형이 있는 인천으로 가 본격적으로 의류업에 뛰어들었다. 박씨는 김천에서 서울 명문대에 합격해 상경했었다고 한다. 박씨 누나는 "가족들에게 착한 아들, 동생이었고 누가 봐도 정말 착한 아이였다"라며 울먹였다. 그의 동창은 "학창시절은 물론 지금까지 누구보다 성실하고 부지런했던 친구였다"고 말했다.
박아무개(44·여) : <경향신문>에 따르면 박씨는 부모님과 함께 서울에서 식당을 운영해왔다. 그의 어머니는 "큰 사고 당해도 살아남았는데, 제발 이겨주고 살아주길 바랐는데"라며 오열했다.
황아무개(59·여) : <국민일보>에 따르면, 황씨는 이태원 참사 직후 희생자 156명(최종 희생자는 158명) 중 가장 마지막으로 신원이 확인됐다. 주민등록된 지문이 흐릿해 조회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황씨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친구 품에 안긴 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오마이뉴스>에 희생자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으신 분은 record1029@ohmynews.com으로 연락주십시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우려 이상으로 위험한 인물... 윤 대통령 밑에서 살아남기
- 나경원 "'고딩엄빠' 의미 있어...어떤 가족에서 태어나든 차별 안돼"
- 한국은 안전하다고 믿었던 카자흐스탄 유학생의 죽음
- 직접 지은 집의 최고 매력, 다신 아파트로 못 돌아가
- 노란봉투법 농성 돌입 정의당 "국힘, 불법기업 방탄 하자는 것?"
- 컵라면을 먹을지언정, 여기서 혼밥은 싫습니다
- [보도 후] 버스회사가 서울시장 상대로 행정심판 청구한 이유
- 미 상원 '동성결혼 존중법' 초당적 통과... "기념비적 법안"
- 대통령실 앞 철도노동자들 "더 이상 죽지 말자" 외친 까닭
- [오마이포토2022] 시멘트 화물노동자들 "업무개시명령 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