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키니를 아십니까?
[황용하 기자]
'비키니'라고 하면 많은 사람은 수영복의 일종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 이름의 유래가 핵실험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휩쓴 지 1년여 후인 1946년 6월과 7월, 미국은 마셜 제도의 비키니 환초에서 두 번째 핵실험 '오퍼레이션 크로스로드'를 실시했다. 당시 한 프랑스 디자이너는 자신이 선보일 투피스 수영복이 불러올 반향을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 핵실험의 파괴력에 빗대기 위해 수영복의 이름을 비키니로 지었다. 그 디자이너는 핵실험의 파괴력이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간과 환경에 깊은 상처를 남길 줄 상상이나 했을까?
비키니 환초의 비극
하와이와 필리핀 사이 1000개 이상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마셜 제도는 1921년부터 일본의 위임통치령 하에 있다가 1944년 미국의 군 통제 하에 들어오게 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46년 2월, 미군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온 마셜 제도 내 산호초 지역인 비키니 환초를 이상적인 핵실험 장소로 선정했다.
일요일 오후의 교회 예배 후, 미국 군정관 벤 와이엇 제독은 비키니의 지도자 주다 왕과 주민들에게 호소하며, 모든 인류의 복지를 위해 그들의 섬을 희생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이미 핵실험 준비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일본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한 지 불과 6개월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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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년 7월 비키니 환초에서 이루어진 핵실험 |
| ⓒ NationalSecurityArchive캡처 |
하지만 핵실험은 단순히 주목을 끄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핵확산 시대를 열었으며, 자금과 의지를 가진 국가들이 하나둘씩 자체 핵무기 프로그램 개발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선례를 따라 외딴 지역에서 실험을 진행했는데, 소련은 카자흐스탄에서, 프랑스는 아프리카와 폴리네시아에서, 중국은 신장에서, 영국은 호주에서 무기를 실험했다.
아직까지 고통받는 핵실험 생존자들
핵실험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미국의 과학자들은 방사성 낙진이 초래하는 위험에 대해 점점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핵폭발로 형성된 스트론튬-90과 같은 방사성 동위원소가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 나가 낙농 지역에서 비가 되어 떨어지는 현상이었다. 스트론튬-90은 칼슘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체내로 섭취되면 뼈와 치아에 축적되며 암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 초, 당시 미국의 핵무기 감독 기관이었던 원자력위원회는 국내외에 약 150개의 원격 모니터를 배치해 방사능 징후를 포착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연구가 진행되던 중에도 미국 정부는 마셜 제도에서 핵실험을 계속 진행했고, 1954년 3월 1일 코드명 캐슬 브라보(Castle Bravo)로 명명된 최대 규모의 핵실험을 실시했다.
하지만 핵무기 설계자들은 폭발 규모를 세 배나 과소평가했으며, 이는 치명적인 계산 오류였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보다 1000배나 강력했던 이 폭탄은 태평양 상공 400여 km 이상까지 눈부신 섬광을 내뿜었다. 세 개의 작은 섬이 즉시 증발했으며, 버섯구름은 성층권 40km까지 치솟았고 1000만 톤의 산호 파편이 빨려 들어갔다.
몇 주 만에 폭발 지점으로부터 160km 이내에 살던 마셜제도 주민들은 극심한 피로와 메스꺼움, 피부 병변, 그리고 대량의 탈모 증상을 겪기 시작했다. 미군은 230명 이상의 주민을 근처의 콰잘레인 환초에 있는 미 해군 기지로 대피시켰고 대부분은 비밀리에 미국 정부의 의료 프로그램인 프로젝트 4.1에 등록되었다.
이들은 급성 방사선 피폭과 관련된 광범위한 증상을 경험했으며, 첫 4년 동안 피폭 여성의 유산 및 사산율은 비피폭 여성보다 약 두 배 높았다. 신생아들은 투명한 피부와 뼈 없는 상태로 태어났는데, 마셜 제도의 조산사들은 이들을 '해파리 아기'라고 불렀다. 또한, 어린이들은 신체 크기와 대사율로 인해 갑상선 이상, 암 등을 불균형적으로 많이 겪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1951년 이후 생존한 미국 본토의 모든 사람은 핵실험에서 방출된 방사성 물질에 어느 정도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들의 후손들과 그 여파를 장기적으로 연구하는 데에는 놀랄 만큼 적은 자금이 투입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다운윈더 (downwinder)'로 알려진 핵실험 생존자들은 정부로부터 외면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현재도 다운윈더의 후손들은 질병이 미래 세대로까지 이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핵폭탄이 폭발하면 지구 반대편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캐슬 브라보 실험의 명확한 교훈이었다. 핵실험의 낙진은 마셜 제도 주민들만 해친 것이 아니었다. 인근 일본 어선의 어부들도 피폭되었으며, 일본산 어류에 대한 오염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약 20만 명이 사망한 지 불과 10년 만에 일본인들에게 다시 한번 큰 충격을 안긴 것이다. 낙진은 한 달 만에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퍼졌고, 실험의 여파는 뉴스와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 그러자 전 세계적으로 핵실험 중단 요구가 빗발쳤다.
과거를 외면하려는 핵보유국
캐슬 브라보 실험 당시, 미국, 소련, 영국 등 세 개의 핵보유국은 모두 대기권에서 핵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10년여 후인 1963년 세 강대국은 부분 핵실험 금지 조약(Limited Test Ban Treaty)에 서명하여 핵실험을 지하로 제한하기로 공식 합의했지만, 프랑스는 1974년까지 대기권 실험을, 중국은 1980년까지 실험을 계속 진행했다. 지하 실험에서는 핵폭발이 지하 300m 이상의 수직 구멍 안에 설치된 용기 안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용기와 연결된 수 마일의 전기 케이블은 폭발 정보를 지표면의 기록소로 전송했다. 이 과정은 방사성 낙진의 확산을 막았으나 여전히 지하수를 오염시키거나 방사성 물질이 지하에서 대기로 유출되는 사고를 유발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1996년에 세계 주요 핵보유국들은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 (Comprehensive Nuclear Test Ban Treaty)에 서명하여 지상 및 지하 모든 핵폭발을 금지하고, 전 세계적인 모니터링 시스템을 통해 실험을 감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은 인도와 파키스탄은 1998년에 지하 핵실험을 진행했으며, 그 이후로는 북한만이 핵실험을 진행한 바 있다.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에 서명한 모든 핵보유국은 조약을 실질적으로 준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중국과 미국 모두 내부 정치적 문제와 핵실험 옵션을 열어두려는 의지 때문에 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2023년 11월, 러시아는 미국의 비준 실패를 이유로 비준을 철회했으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워싱턴이 다시 실험할 경우 모스크바도 실험을 재개할 것임을 암시했다. 그는 2024년 6월 7일 "러시아는 핵무기를 실험할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필요하지 않다"고 발언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주요 핵보유국 중 어느 한 국가라도 단 한 번의 핵실험을 진행할 경우, 다른 국가들 또한 실험을 재개할 가능성이 크다고 많은 핵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첫 번째 핵 시대의 여파를 아직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불안정한 핵 시대의 또다른 챕터를 열 가능성을 시사한다. 대기권에서 발생하는 버섯 구름이 퍼지던 냉전 시대의 광경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낮으나, 지하 핵실험조차도 여전히 유해한 방사능을 방출할 수 있으며, 이는 새로운 세대에게 환경 및 보건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
세계는 이러한 위험한 악순환을 다시 시작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과거의 핵실험이 초래한 피해와 여전히 씨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핵보유국들은 그 과정에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신음을 무시하듯 핵실험 재개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인류를 핵전쟁의 수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러한 위험은 3편에서 다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참고 기사:
Hennigan, W.J. "The Victims of U.S. Nuclear Testing Deserve More Than This" <The New York Times>(온라인), 2024년 5월 22일;
(https://www.nytimes.com/2024/05/22/opinion/nuclear-testing-victims-reca-congress.html)
Hennigan, W.J. "The human toll of nuclear testing" <The New York Times>(온라인), 2024년 6월 20일;
(https://www.nytimes.com/interactive/2024/06/20/opinion/nuclear-weapons-testi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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