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사소한 게 잘 기억나지 않고, ‘아, 그 뭐였더라? 무슨 얘기하려고 했지?’라는 생각이 빈번하게 든다면 건망증이 아닌 신종 질환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질병이라기보다 기억장애에 해당하는 건망증은 일시적으로 무언가 기억하지 못하거나 깜빡하는 빈도가 잦은 상태로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 주목받는 문제적 신종 증상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건망증과 확연히 다르다. 간단한 계산이 잘 안 되거나 스마트폰에 의존하지 않으면 스스로 생각하기가 어렵고, 익숙한 길도 헤매는 등 아예 다른 차원의 문제기 때문이다. 연령과 성별을 불문하고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의 전자 기기와 일상을 함께 살아가는 10~40대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젊은 세대를 위협하는 이러한 증상은 #디지털치매 #영츠하이머로 불린다. ‘영츠하이머’는 젊음을 뜻하는 ‘영(young)’과 퇴행성 치매의 일종인 ‘알츠하이머(Alzheimer)’를 합성한 신조어다. 깨어 있는 시간의 약 3분의 1 이상을 손바닥보다 작은 기계에 의존하며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뇌 활동 둔화로 기억력이 감퇴하는 젊은 치매를 일컫는다. 모든 일을 스마트폰으로 해결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 엄지손가락을 사용해 빠르게 결과를 보려는 습관으로 인해 뇌 기능이 퇴화되는 것이다.
디지털 치매 증후군이라니!
10~40대 사이에서 위와 같은 치매 유사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영츠하이머에 대한 우려는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영츠하이머란 다양한 디지털 기기의 발달로 인해 개인이 스스로의 뇌를 사용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기계에 의존하게 된 현대인들의 기억력 감퇴 현상으로, 국립국어원은 이미 이를 일컫는 신조어로 ‘디지털 치매 증후군’이란 용어를 등재했다. ‘아직 젊고 어린데 치매가 웬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디지털 치매 증후군은 컴퓨터와 스마트폰, 태블릿 등을 자주 사용하는 디지털 네이티브에게 특히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스마트폰 보급이 일상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지만 스마트폰 자체가 생각의 기준이 돼버린 ‘포노 사피엔스’라는 신인류를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다. 높은 지적 능력을 가졌지만 디지털 기계에 일상과 생각이 잠식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 전문가들 역시 스마트폰, 태블릿 등의 의존도가 높을수록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을 점차 잊게 되고 뇌의 장기 기억에 저장되는 정보량이 현저히 감소해 인지 능력, 기억력, 연산력 등 뇌 기능이 저하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한다.
치매와 뭐가 다를까?
그렇다면 이러한 뇌의 퇴화 및 감퇴는 노인성 치매와 어떻게 다른 걸까? 퇴행성 질환인 치매는 뇌의 하드웨어가 손상돼 기억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그에 반해 디지털 치매는 뇌 손상이 아닌 뇌 기능의 둔화가 원인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이 점차 줄어들면 새로운 정보를 기억하고 저장하는 뇌의 해마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다. 기억을 회상할 수 있을 정도의 기억 강도가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뇌의 기억 능력이 퇴화돼 디지털 치매가 생길 수 있다. 독일 뇌 과학계의 일인자이자 〈디지털 치매〉 저자 만프레드 슈피처 박사 역시 노년기의 치매와 달리 디지털 치매는 스마트폰 중독이 대표적 원인이며 정보의 과부하로 인해 집중력 문제와 업무 능률 저하, 지능 지수 하락 등 잠재적 위험이 더 크다고 경고했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이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터넷 중독에 비해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이 크게 증가하는 추세며, 연령이 낮을수록 더 높은 중독 경향을 보인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역시 국민의 23.1%가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에 해당되고, 특히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은 국민의 75%가 시청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또한 스트레스, 우울증 같은 정신적인 문제나 과도한 음주 습관으로 인한 알코올성 질환도 뇌의 해마를 손상시키기 때문에 영츠하이머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심할 경우 초기 치매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특히 주의가 필요하다.
치매는 약도 없다는데…
치매나 알츠하이머 질환이 불치병으로 알려진 데 반해 디지털 치매 증후군은 개인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극복 및 개선이 가능하다.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스마트폰의 사용 빈도를 줄이는 것이다. 물론 요즘 세상에 컴퓨터나 태블릿, 스마트폰을 아예 안 쓰고 생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는 평균적으로 하루 4~6시간 정도를 스마트폰 사용에 쓰고 있다. 몇 년 전 서울시는 전자 기기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휴대폰 전원을 끄는 ‘1.1.1 운동’을 진행하기도 했고, 최근 주요 통신사들은 ‘디지털 디톡스’ 키워드를 앞세워 전자 기기와 거리두기할 수 있는 아날로그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휴대폰 데이터를 많이 사용할수록 수익을 보는 통신사들이 이런 마케팅에 동참하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요즘 숏폼(짧은 길이의 영상) 중독이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기업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흐름으로 풀이된다. 취침 전 휴대폰 전원을 꺼두거나 잠자리에 들기 2시간 전부터는 휴대폰을 아예 안 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뇌의 과부하를 덜어내기 위해 멀티태스킹을 중단하는 것도 방법이다. 현대인들은 마치 일잘러의 기본인 것처럼 멀티태스킹 능력을 소위 올려치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면 뇌를 과도하게 사용하게 돼 오히려 능률이 떨어질 수 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순서대로 일을 차분히 처리하는 것도 뇌 건강을 위한 방법이니 꼭 시도해보길. 좋든 싫든 문명의 발달은 막을 수 없고 우리는 여전히 오늘도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의 등장이 ‘파괴적 혁신’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전자 기기에 지배당하고 파괴되지 않기 위해선 개인의 노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무한한 디지털 세상 속에서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생각을 잠식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SELF CHECKLIST
설마 했는데 진짜? 일본의 한 임상의학연구소가 제시한 디지털 치매 자가 진단 질문은 아래와 같다. 아래 항목 중 4개 이상이면 디지털 치매, 3개라면 디지털 치매 위험군을 의심해봐야 한다.
□ 상대방과 대화할 때 휴대폰과 메신저, DM을 주로 이용한다.
□ 외우고 있는 연락처가 3개 이하다.
□ 분명히 알고 있었던 영어 단어와 한자가 쉽게 생각나지 않는다.
□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 자주 흥얼거렸던 애창곡이어도 가사를 보지 않으면 노래 부르기 힘들다.
□ 운전할 때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목적지를 찾아가는 게 어렵다.
□ 예전에 만났던 사람을 처음 봤다고 착각한 적이 있다.
□ 몇 년째 사용하는 전화번호가 잘 외워지지 않고,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다.
□ 손으로 글씨 쓰는 일이 거의 없다.
□ 전날 먹은 식사 메뉴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숏폼 대신 숏퀴즈!
Q : 다음 중 디지털 치매 증후군에 해당되지 않는 사례는?
1. 평소 여자 친구 생일도 기억 못 하는 남자 친구. 이번엔 3주년 기념일을 깜박 잊어버렸다.
2. 디지털 네이티브 나야 나~. 어느 날 스마트폰 배터리가 소진돼 갑자기 전 원이 꺼졌다.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초조하고 불안한 걸까?
3. 책을 분명히 꼼꼼히 읽었는데 머릿속에 내용이 남지 않는다. 대체 무슨 줄거리였더라?
A : ► 1번의 사례는 날짜 개념이 없다기보다 무관심에 의한 건망증에 해당된다. 언어·공간·인지 능력이 저하되는 디지털 치매는 전자 기기 과의존으로 기억력이 일시적으로 떨어지는 현상이니 습관만 바꿔나가도 충분히 치유가 가능하다.
Q : 영츠하이머가 지속되면 치매로 이어질 수 있을까?
A : 그렇지 않다. 하지만 과도한 스마트폰 사용은 뇌에 과부하를 일으키고, 높은 스트레스와 우울증 같은 정신적 질환, 잦은 음주를 즐기는 습관도 뇌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40대 중후반부터는 특히 주의해야 한다.
Q : 뇌에 좋은 자극을 주는 방법은 무엇일까?
A : 운전할 때 내비게이션을 끄고 목적지로 향해볼 것. 시각 정보에만 의지하지 말고 골목의 방향, 소리 등 여러 감각을 이용해 길을 찾는 행위만으로도 뇌는 인지, 이해, 기억, 상상 등 정신 활동의 모든 영역을 활용한다. 지적 자극에 도움이 되는 종이 신문이나 책을 읽거나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도 추천한다. 메신저나 카톡 등을 장시간 하기보단 상대방을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시간을 늘려보는 방법도 있다. 가끔 손 글씨로 메모를 하는 습관도 뇌에 적당한 자극을 줄 수 있는 팁이다. 무엇보다 스마트폰의 불빛은 멜라토닌 분비를 막아 오후 동안 뇌가 습득한 정보 처리를 돕는 꿀잠을 방해하는 요소다. 잠자리에 들기 전 스마트폰을 멀리하는 등 스마트폰 사용을 줄여나가고, 통화 시 이어폰을 이용해 전자파를 차단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