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향한 '동아' 논설위원의 조언, 적절한가
[서부원 기자]
▲ 10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송평인 칼럼 '한강, 문학과 역사' |
ⓒ 동아일보 |
외람되지만, 현대사에 천착하는 역사 교사로서 글에 담긴 위원님의 주장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위원님은 '문학의 기능 중 하나는 역사의 거대한 힘에 짓밟힌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언뜻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의 핏빛 현대사를 소재로 한 작품에 부합하는 정의는 아닙니다. 역사가나 정치인이 해야 할 몫을 작가들이 '목숨을 걸고' 해왔다는 점을 부인하시진 못할 겁니다.
역대 독재 정권은 피해자의 피맺힌 한을 위로하기는커녕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연좌제로 유가족들을 얽어맸고, 겪었던 일을 입 밖에 내지 않도록 을러대고 감시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연좌제의 금지를 공식적으로 명문화한 건 1980년대에 들어섭니다.
산산이 부서진 비석... 은폐된 잿빛 역사
제주 4.3 당시 집단 학살된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백조일손지묘'에는 처참하게 부서진 위령비가 한쪽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 6.25 전쟁 당시 공비 토벌의 명목으로 마을 주민 719명을 집단 학살한 '거창 사건'의 현장에도 부서져 땅에 묻혔다 꺼낸 비석의 잔해가 있습니다.
4.19 혁명 직후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 요구하며 세운 겁니다. 휴전 이후 이승만 독재 정권하에서는 입 뻥긋도 할 수 없었던 가혹한 현실을 방증하는 유물입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울분이 서린 그 비석들은 채 1년도 안 되어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킨 박정희는 반공을 국시로 삼고, 6.25 전후에 벌어진 숱한 민간인 학살 사건들을 묵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위령비조차 파괴되어 피해자들은 다시 입막음 당한 채 한을 가슴으로 삭이는 모진 세월을 견뎌야 했습니다. 찰나의 '봄'을 지나 '겨울 공화국'에 들어선 겁니다.
대중가요조차 마음 놓고 부를 수 없었던 엄혹한 시절, 정치인들과 학자들은 권력에 시나브로 순치되었습니다. 독재 권력을 미화하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앞장선 어용 역사가들이 권세를 등에 업고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에 합류하였습니다. 교과서에서조차 민간인 학살 등 '잿빛' 역사는 은폐되고, 경제 성장 등 '핑크빛' 역사만 기록된 채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이렇듯 뒤틀린 현실 앞에 애먼 작가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겁니다. 사건 직후 정치인들이 진상규명에 나서고 역사가들이 정당한 역사적 평가로 명예 회복에 앞장섰다면, 굳이 작가들이 뛰어들진 않았을 겁니다. 은폐된 진실을 탐구하고 드러내야 한다는 작가 정신의 발로입니다.
▲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책 표지 |
ⓒ 문학동네 |
출간되자마자 작가는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금서'로 지정되어 독자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순이 삼촌>은 수능 시험에도 출제될 만큼 대중적인 역사 교양서가 됐습니다. '허구적' 문학일지언정 소설 속 내용이 왜곡됐다고, 작가의 시각이 편협하다고 지적하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난 뒤, 공중파 방송에서 제주 4.3을 주제로 한 특집 방송을 제작하면서 비로소 여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수립된 직후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방송의 제목이 의미심장했습니다. 지금껏 말할 수 없었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도 불의한 권력은 은폐와 왜곡, 폄훼를 일삼았지만, 제주 4.3의 진실을 알리려는 작가들의 몸부림은 이어졌습니다. 이산하 작가는 장편 서사시 <한라산>을 썼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처벌을 받았지만, 최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로부터 재심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또, 재일교포 김석범 작가는 총 10권짜리 대작 <화산도>를 통해 제주 4.3의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섰습니다.
제주 4.3을 비롯한 우리 현대사 속 수많은 은폐된 진실들이 햇빛을 보게 된 건 작가들의 양심과 피와 땀에 빚졌습니다. 그들에게 감사해하지는 못할망정 그 의미조차 모호한 '심정 윤리', '책임 윤리' 운운하며 훈수를 두는 건 노벨문학상에 대한 몽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장담하건대, 작가들이 아니었다면, 제주 4.3의 진실은 영영 묻히고 말았을 겁니다.
제주 4.3에 대한 납작한 인식
한편, 위원님이 거론한 역사적 사실도 왜곡투성이고, 기껏해야 양비론적 시각입니다. 제주 4.3이 공산주의자들의 경찰서 공격으로 촉발되었다는 건, 역사를 칼로 두부 자르듯 이해하는 납작한 인식입니다. 말하자면, 제주 4.3을 1948년 4월 3일의 역사로 한정을 짓는 어처구니없는 관점입니다.
제주 4.3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에서 벌어진 미군정의 발포 사건을 시작으로 보는 게 정설입니다. 당시 무고한 주민 6명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그들은 광복 2주년을 기념하며 미군정의 실정에 항의하는 평범한 주민들이었을 뿐입니다.
이에 제주의 민심은 크게 동요했고, 미군정의 공식적 사과와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이게 됩니다. 이를 미군정과 이승만을 비롯한 우익 세력은 공산주의자의 책동으로 몰아세우며 극단적 반공주의 단체인 서북청년단을 동원합니다. 이후 5.10 총선거와 맞물리며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죄다 '빨갱이'로 치도곤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후 맥락을 '거두(去頭)'하는 주장은 치졸합니다. 거기에 셰익스피어 비극 속 이야기까지 끌어온 건 전형적인 견강부회입니다. '군경이 제주에서 특히 사악해진 이유'는 마땅히 '초토화 작전'을 명령한 이승만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은근슬쩍 당시 제주도민들이 군경의 가혹한 토벌을 자극했다는 식으로 말끝을 흐린 건 비루합니다.
위원님은 한강 작가의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지적하셨지만, 6.25가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양상이었다는 것 또한 학계의 오래된 정설입니다. 북한의 남침으로 전면전이 시작됐다고 해서 전쟁 도발 책임을 오롯이 김일성에게 뒤집어씌우는 건, 미국과 소련을 비롯해 우익 세력에 빌붙은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라고 지적합니다. 6.25를 '친일파의 해방 전쟁'으로 호명할 정도입니다.
▲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17일 서울 강남구 아이파크타워에서 열린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있다. |
ⓒ 사진공동취재단 |
그나마 5.18을 민주화의 원동력으로써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사건이라고 평가하신 부분엔 십분 공감하지만, 제주 4.3을 마치 반대되는 사례인 양 언급한 점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제주 4.3이 패배, 곧 진압되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주장은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논리입니다.
당시 '초토화 작전'의 빌미가 된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주장을 문제 삼고 계신 듯합니다. 결과적으로 5.10 총선거 당시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도의 두 개 선거구만 무효 처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위원님의 논리대로라면, 분단을 막아야 한다며 5.10 총선거에 불참한 김구와 김규식 등의 독립운동가들도 '반대한민국 세력'이라는 뜻이 됩니다.
글의 말미, 위원님이 한강 작가에 건넨 '조언'을 읽고는 한참을 웃었습니다. 작가의 책을 제대로 읽고 나서 쓴 건지 의심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일례로, 작가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소설 <채식주의자>는 개인적 트라우마가 아닌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폭력성을 고발한 작품입니다.
위원님은 부러 '극단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채식주의와 평화주의를 조롱하고 있지만, 인간이든 국가든 나아가야 할 방향인 건 맞습니다. 작품 속 채식주의는 곧 평화주의의 다른 말입니다. 한강 작가가 그의 작품들을 통해 줄곧 말하고자 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작가의 문학적 관점이 '현실적인지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하신 위원님의 말씀은 강자와 주류 편에 서라는 뜻의 겁박처럼 들렸습니다. 역사는 현실에 입각한 답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럴수록 '승자의 기록'인 역사에 의문을 제기하고 '패자의 사연'에 귀 기울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역사뿐만 아니라, 현실 역시 강자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79년 전 <동아일보>가 우리 사회에 끼친 엄청난 폐해
사족 삼아 한마디만 얹겠습니다. 위원님이 근무하고 계시는 <동아일보>는 우리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대한 1945년 12월 27일 자 머리기사가 그것입니다. 지금껏 해당 기사를 쓴 기자가 누군지도 밝혀지지 않은 채 미궁에 빠진 상태이지만, 해방 직후 극단적인 좌우 이념 대립의 불쏘시개가 된 희대의 오보였습니다.
소련이 신탁 통치를, 미국이 즉각 독립을 주장하였다는, 사실과 정반대의 내용입니다. 다른 언론도 이를 베껴 쓰면서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찬탁과 반탁의 대립이 폭력으로 비화했습니다. 당시 미군정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 했고, 이 와중에 생존을 모색하던 친일파들이 그 틈바구니에서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뜬금없이 문학에서 소재로 삼은 역사에 대한 평가는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하시기 전에 79년 전 <동아일보>의 오보가 우리 사회에 끼친 엄청난 폐해에 대해 성찰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내로라하는 메이저 언론사의 모든 언론인의 꽃이라는 논설위원이시니 그 말씀의 무게감은 남다를 겁니다. 부디 건필하시길 응원하며, 위원님의 반론을 기대합니다.
지역 한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역사 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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