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팬데믹 ‘항생제 내성’…떠오르는 치료 대안 ‘박테리오파지’
2050년부터 매년 ‘항생제 내성’으로 1000만명씩 사망
WHO, 세계보건 10대 우선과제 항생제 내성 선정
인체무해 ‘박테리오파지’…특정 유해균 선택적 제거
현대 의학의 기적이라 불리는 항생제는 수많은 생명을 감염병으로부터 구원해 왔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퍼져나가는 항생제 내성은 이 기적을 위협하는 그림자가 되고 있다. 세균들이 항생제에 대한 저항력을 갖추면서 한때 쉽게 치료 가능했던 감염병들이 다시금 인류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생제 내성은 단순히 치료 기간을 늘리고 의료 비용을 증가시키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내성균에 감염된 환자들은 효과적인 치료법을 찾지 못해 고통받고 심각한 경우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게다가 내성균은 병원 내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가 면역력이 약한 환자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항생제 내성 문제는 개인의 건강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안전을 위협한다. 내성균은 사람 간 전파가 가능하며,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할 수 있다. 이는 팬데믹과 같은 대규모 감염병 발생 가능성을 높여 공중 보건 시스템에 막대한 부담을 안겨주기도 한다.
현재 우리는 항생제 내성이라는 침묵하는 팬데믹에 직면해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 의료계, 정부, 그리고 관련 산업 모두의 협력과 노력이 절실하다. 항생제의 올바른 사용과 새로운 항생제 개발, 그리고 감염 예방을 위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건강한 세상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2050년부터 매년 1000만명씩 사망
항생제 내성(AMR)이란 일부 세균과 바이러스, 곰팡이, 기생충 등이 더 이상 항생제와 같은 항생제재에 반응하지 않게 된 것을 말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9년 항생제 내성을 세계보건 10대 우선과제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항생제 내성에 의한 직접적 사망자 수는 130만명, 간접사망자 수는 450만명으로 이미 말라리아나 에이즈 사망자 수를 추월했다. 4년 평균 기준 매년 150만명 사망자 수를 기록한 코로나19와도 규모다.
영국의 경제학자 짐 오닐 보고서에는 2050년 이후부터 전 세계적으로 매년 1000만명이 사망해 현재 암 환자의 사망률과 유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와 함께 약 100조 달러(약 13경원)의 경제적 손실도 예상했다.
WHO 서태평양지역사무소(WPRO) 분석 보고서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담겼다. 보고서에는 2020년에서 2030년까지 항생제내성균에 의한 사망자 수는 중국 393만2315명, 베트남 29만6581명, 필리핀 26만8744명, 일본 22만5215명, 한국 13만4330명으로 추정된다.
경제적 피해는 사망자 수와는 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경제적 피해가 가장 큰 국가는 사망자 수가 압도적인 중국(한화 약 127조원)이나 두 번째로 피해가 큰 국가는 한국이다. 한국의 경제적 피해는 약 25조원 정도로 의료환경이 외국에 비해 우수해 사망자 수가 상대적으로 낮지만 경제적 피해는 더 크다는 분석이다.
신규 항생제 개발, 투자 대비 수익성 낮아 개발 지연
항생제 내성을 방지하는 방법으로 항생제 처방 가이드라인 준수, 감염 관리 강화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들 모두 새로운 항생제 개발과 병행돼야 한다. 내성균 출현에 대비해 새로운 항생제 개발 연구와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새로운 항생제 개발이 더딘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막대한 개발 비용과 긴 개발 기간 대비 낮은 수익성이다. 새로운 항생제 개발에는 평균 10년 단위의 시간과 수십억 달러의 비용이 소요된다. 임상 시험 과정에서 안전성 및 효능 검증을 위한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만큼 개발 과정도 길고 복잡하다.
어렵게 개발했다고 하더라도 항생제는 다른 약물과 달리 단기간 사용된다. 내성균 출현으로 인해 새로운 항생제의 수명이 짧아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장기적인 수익 창출이 어렵다는 뜻이며, 투자 대비 수익성이 낮아 제약회사 입장에서 쉽게 개발 의지를 드러내지 않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특히 새로운 항생제는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되도록 권장돼 시장 규모가 제한적이라는 단점도 있다. 실제로 2019년 글로벌 항생제 R&D 파트너십(GARDP) 보고서에는 항암제의 경우 투자 대비 18배, 피부치료제는 7배, 호흡기 질병 치료제 및 심장약은 5배의 수익을 낼 수 있지만 항생제는 오히려 적자를 낸다.
세균으로 세균을…잠재력 가진 미생물 ‘박테리오파지’
질병청은 제2차 국가 항생제내성관리대책(2021년~2025년)에 따라 항생제 적정사용, 내성균 확산 방지, 감시체계 강화, 연구개발 확충, 항생제 내성관리 협력체계 활성화 분야에 노력 중이다.
특히 항생제 내성균 신속진단 도구 및 치료제 개발을 강화하고 있다. 기존 항생제와 다른 기전인 비전통적 방식(항생제 보조/대체재)의 항균물질인 항균펩타이드, 약물재활용, 숙주표적치료제, 병독력 조절제, 생균의약품, 유전자치료제, 박테리오파지 등이다.
이 가운데 박테리오파지가 최근 새로운 치료제로 주목받고 있다. 인체에 무해한 유익균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특정 유해균만을 선택적으로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테리오파지는 ‘세균(bacteria)’을 ‘먹는다(phage)’는 뜻이다. 세균을 숙주로 삼아 감염시키고 증식하는 바이러스다.
인체에 무해한 것과 함께 토양, 물, 동물의 장내 등 다양한 환경에 존재해 세균보다 훨씬 많다는 장점이 있다.
해외에서도 여러 박테리오파지 치료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벨기에와 호주, 조지아의 경우는 자체 프로세스에 따라 이미 치료에 사용이 가능하며 미국은 FDA(미국 식품의약청) 응급승인을 받아 항생제로 치료가 안 되는 환자를 대상으로 치료에 사용 중이다.
실제로 최근 임상에서 치료 성공사례도 다수 보고된 바 있다. 미국 톰 패터슨 교수는 이집트 여행 후 다제내성 아시네토박터균에 감염돼 모든 항생제를 사용해도 치료할 수 없어지자 박테리오파지를 투여해 치료에 성공했다.
또 영국에서도 폐 이식 수술 후 마이코박테리움에 감염돼 표준치료가 실패하자 6개월간 맞춤형 박테리오 파지주입 치료를 통해 상처를 회복하고 심각한 부작용 없이 치료했다.
국내 박테리오파지 연구와 미래는
현재 국립보건연구원에서는 카바페넴 내성 대장균, 페렴막대균 등 치료가 어려운 그람음성 내성균을 대상으로 하는 박테리오파지를 분리, 자원화하고 다제내성 세균에 효과적인 박테리오파지 및 박테리오파지 유래의 유효 항균물질을 개발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다만 극복해야 할 과제들도 산적하다.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한 치료제 개발 및 사용에 대한 명확한 법적 규정이 아직 마련돼 있지 않다. 이는 연구 및 개발 과정의 불확실성을 높이고 투자 유치 및 상용화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또 유용한 박테리오파지를 개발한다고 하더라도 환자에게 사용 허가가 되기 위해선 임상적용을 해야 한다.
임상적용에는 두 가지 트랙이 있는데 먼저 기존 의약품처럼 GMP 시설에서 생산해 임상 1, 2, 3을 거쳐 승인되는 방법이 있다. 남은 하나는 항생제로 치료가 되지 않는 환자에 한해 규제기관의 응급승인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국내에는 아직 응급승인의 사례가 없는 만큼 식품의약안전처와 협의를 통해 필요한 절차와 방법을 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유정식 국립보건연구원 약제내성연구과장은 “국립보건연구원에서는 다제내성균에 감염돼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의 치료에 박테리오파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연구 및 인프라 구축을 계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치료용 박테리오파지 뱅크를 구축해 자원을 확보하고 치료에 사용 가능한 박테리오파지의 품질기준 개발, 표준화된 효능 분석법, 환자 맞춤형 파지 임상적용 등을 2025년부터 5년에 걸쳐 추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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