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의 맥]의약품 품절 사태가 던진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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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래끼 치료에 필요한 안연고 하나를 약국에서 구하지 못한다면 어떨까.
사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게 국민이 필요로 하는 의약품의 상당 부분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나라다.
적어도 필수의약품에 대해서는 '약가를 얼마나 낮게 유지할 것인가'가 아니라 '국민이 필요한 순간 약을 구할 수 있도록 어떻게 공급망을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의약품은 필요할 때 존재해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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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래끼 치료에 필요한 안연고 하나를 약국에서 구하지 못한다면 어떨까. 어린이 해열제나 항생제가 전국적으로 품귀를 빚는다면 어떨까. 한두 번의 불편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이는 단순한 품절이 아니라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 경고 신호다.
사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게 국민이 필요로 하는 의약품의 상당 부분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나라다. 팬데믹이나 국제 분쟁 같은 위기 상황에서도 필수 의약품을 공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작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의약품의 공급은 점점 불안해지고 있다.
최근 발생한 안연고 공급 부족 사태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래끼와 안검염 치료에 사용되는 항생제 안연고는 생산기업들이 잇따라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사실상 한 곳의 제조사에 의존하는 구조가 되었다. 어린이용 해열제와 항생제 품귀 현상도 같은 맥락이다. 꼭 필요한 약이지만 수익성은 낮고 생산 부담은 커 기업들이 생산을 늘리기 어려웠다.
안연고 부족 사태의 시사점 되새겨야
이러한 현상은 특정 품목에 국한되지 않는다. 감기약, 해열진통제, 항생제 같은 일상적 의약품은 물론 암 치료제와 희귀질환 치료제까지 공급 차질 사례가 늘고 있다. 최근 5년간 생산·수입·공급 중단 또는 부족 보고 건수가 1,400건을 넘어섰다는 사실은 의약품 공급 부족이 더 이상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 원인은 단순하지 않다. 글로벌 공급망 불안, 원료의약품 해외 의존, 품질관리 기준 강화, 수요 급증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공통된 현실이 존재한다. 필수의약품을 생산해도 충분한 수익을 확보하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건강보험 재정을 아끼기 위해 약값을 관리하는 정책은 필요하다. 국민이 낸 보험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정부의 당연한 책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보험재정을 절약하기 위해 약값을 낮춘 결과, 정작 국민이 필요한 순간 약을 구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보험재정을 지키려는 정책이 국민의 치료 기회를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것은 아닐까.
약가 인하가 반드시 국민에 이익 되진 않을 수도
그동안 정부도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퇴장방지의약품 제도 운영, 생산지원 사업 확대, 국산 원료의약품 우대 정책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이미 수십 년간 누적된 구조적 문제를 일부 약가 보정만으로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적어도 필수의약품에 대해서는 '약가를 얼마나 낮게 유지할 것인가'가 아니라 '국민이 필요한 순간 약을 구할 수 있도록 어떻게 공급망을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격 중심 정책에 공급 안정성이라는 새로운 축이 추가돼야 한다. 국가 차원의 필수의약품 관리체계를 재정비하고, 생산기업 수와 공급 위험도를 상시 점검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생산기업이 줄어드는 품목에 대해서는 공동생산 플랫폼 도입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비영리 의약품 공급 플랫폼인 Civica Rx는 좋은 참고 사례다. 또한 정부와 기업이 공급 안정 계약을 체결해 최소 생산 기반을 유지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의약품은 일반 소비재가 아니다. 자동차나 가전제품은 공급이 늦어져도 기다릴 수 있지만 치료제는 환자가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있어야 한다. 의약품은 필요할 때 존재해야 가치가 있다. 보험재정을 지키기 위해 약가를 관리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국민이 약을 구하지 못한다면, 아낀 보험재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노연홍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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