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우울해서 빵 샀어”를 보는 F와 T의 시각 [사이에 서서

조회 58,1932023. 11. 21.

한 유튜브 코미디 채널에서 시작되었다는 “너 T야?”라는 말이 유행 현상, 밈(meme)이 된 지도 몇 달이 흘렀다. 대세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되었다. 이제는 한물간 유행어인 “팩트 폭행”을 일삼으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T의 발언에 대한 반발처럼 시작된 이 말은, ‘나는 당신의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은근한 경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여기서 나아가 비속어를 돌려 말하는 표현, “T발 너 C야?” 라던가 “T발롬”이라는 과격한 표현까지 등장했다.

사진: Unsplash의Daniel Eledut

T가 뭐길래?
MBTI 담론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잠시 소개하자면, T(Thinking - 사고형)는 의사결정 방식에 있어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형의 사람들이다. 과정을 중시하는 F(Feeling - 감정형)와는 다른 과정을 거쳐 사고하고, 표현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다.

사진: Unsplash의Mae Mu
나 우울해서 빵 샀어.

라는 문장이 얼마전 소셜미디어 피드를 뒤덮었다. “우울해서 빵을 샀다.”, 이 한 문장으로 파생되는 각각의 대화 장면을 엿보는 건 재밌는 일이었다. 처음엔 타인의 감정을 헤아릴 줄 모르는 T에 대한 성토가 주류를 이뤘던 걸로 기억한다. T인 남편에게 “나 우울해서 빵 샀어”라고 말했는데,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울한데 왜 빵을 샀냐며 되묻는 남편과 부부싸움을 했다는 고백까지 등장했다. 공감력이 넘치다 못해 지나치다는 핀잔을 자주 듣는 극 F인 나도 사이보그라 불리는 극 T인 남편에게 실험해보고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확실한 T인 남편이 보일 반응, “ㅇㅇ” 이라는 답문에 마음에 스크래치가 날 일을 자초하고 싶지 않아서라고나 할까.

시간이 흐르자 소셜미디어에 T들의 반론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갖가지 반응을 관찰하다가 문득 이런 가설이 떠올랐다.

“우울해서 빵을 샀다”라고 타인에게 말을 할 법한 사람들은, 아마도 높은 확률로 F일 것이다.

우선 객관적 사실에 주목하고 명확한 논리를 선호하는 T가 ‘우울하다’라는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빵을 샀다’라는 (결과)를 행동으로 실천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고 본다.
테스트잖아? 라는 핑계를 더해본다 해도 T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문장을, 게다가 본인의 기분을 ‘굳이’ 타인에게 전달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타인의 반응이 궁금해서? 글쎄, 아무리 봐도 이건 T를 색출, 고발하기 위해 쓰인 문장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럼 우리 F들은 대체 왜 “우울해서 빵을 샀다”라는 얘기를 타인에게 굳이 전하고 싶은 것일까. 실제로 담화분석이나 음성학적인 분석을 해 본 적은 없으나 아마도, 이 문장을 실제로 발화하게 된다면 “우울해서” 에 방점이 찍힐 것이다.

화법 문제에 “우울해서 빵을 샀어”가 포함된 대화 지문이 시험 문제로 출제되었다고 생각해보자. 발화자가 청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감정을 객관식으로 고르라면 답은 ‘우울해서’다. 문장에 담긴 뜻을 살펴보면, “내가 지금 많이 우울해, 내 우울한 기분을 알아주고 위로해줘”라는 메시지가 핵심이다. 그래서 ‘우울하다’라는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는 발화자인 F에게 중요하지 않다. 빵을 살 수도 있고, 화분을 살 수도 있고, 파마나 염색을 할 수도 있다. F에게 중요한 건 ‘나의 우울한 마음’에 대한 상대방의 이해와 공감이다. 듣는이가 T일 경우 F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정보인 원인-결과가 논리적으로 얼마나 말이 되는지, 어떤 행동을 감정 해결방법으로 사용할지의 문제가 T의 다음 반응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게 문제라고나 할까.

안 그래도 “너 T야?”라는 다소 공격적인 질문에 지쳐 있었을 T들은 “우울해서 빵을 샀다”라는 뜻 모를 말을 대뜸 던지는 F에게 뭐라고 답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기껏 꺼낸 “무슨 빵 샀어?”라는 후속 질문에 황당해하는, 나아가 화를 내기까지 하는 F의 반응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F라면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반응, “이런, 우울했구나, 무슨 일 있었어? 많이 힘들었지?”가 T에게는 고도의 사회적 훈련을 통해야만 겨우 출력될 수 있는 반응이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대체 왜 “무슨 빵 샀어?”라는 질문이 제일 먼저 T들의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는지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사진: Unsplash의Kelly Sikkema

“(원인) 우울해서 (결과) 빵을 샀다”라는 문장을 들은 T들의 의식의 흐름을 분석해보았다.

  1. ㅇㅇ(발화자)이가 우울한가 보다.
  2. 잠깐, 근데 우울한데 왜 빵을 사지?
  3. 우울하면 빵을 사면 해결이 되는 것인가?
  4. 음, 그럼 나도 우울할 때 빵을 사볼까?
  5. 근데 무슨 빵을 사야 되지? 아무 빵이나 산다고 우울함이 해결될 것 같지는 않은데.
  6. 우울함을 날려주는 빵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7. 다음에 OO이가 우울해지면 이 빵을 사다 주면 좋겠네,

1-7의 과정을 거쳐 T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은 “무슨 빵 샀는데?” 가 되는 것이다.

사진: Unsplash의Markus Winkler

T의 후속 질문 “무슨 빵 샀어?”라는 당신을 향한 T 나름의 공감의 표현이다. 달리 말하면, T의 폭풍 질문은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함께 찾아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시작점이다.  T의 애정은 질문, F의 애정은 리액션이라는 말이 있다. 친하지 않거나, 관심 없는 사람에게 T는 F처럼 영혼 없는 리액션을, F는 T처럼 궁금하지도 않은 디테일에 대한 후속 질문을 늘어놓는다는 한 커뮤니티 게시글의 분석은 흥미로웠다.

F들이여, 우울해서 빵을 샀다는 말에 무슨 빵을 샀냐고 묻는 T에게 “너 T야?”라고 몰아세우기 전에 우리의 공감력을 T의 마음을 읽는데 써보면 어떨까? T의 애정이 듬뿍담긴 폭풍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이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내 눈 앞에 있는 T를 아낀다면, "우울해서 빵 샀어" 같은 말로 시험에 들게 하지는 말자. 우리에게 중요한 건 내 친구 OO가 T인지 F인지를 가리는 것도, 얼마만큼 T인지, 혹은 F인지를 가려내는 것도 아니니까.


황진영
미국 수도에 있는 한 국제기구에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우리’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공저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신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에 세 편의 글을 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 - [사이에 서서]를 통해 '어쩌면 우리일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사진출처 @Unsplash

해당 글은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연재되고 있는 글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매일(주중)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뉴스레터로,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무료 레터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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