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아들의 유전병...
열두 시간.
한 인생이 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 겨우 그뿐이다.
식사 중 전화벨이 울린다.
"받지 마. 중요한 일이면 다시 전화가 올 거야."
전화벨이 세 번째 울리자 남편이 받는다. 남편의 목소리가 어쩐지 이상하다.
큰언니가 사고를 당했다. 나는 포슬포슬한 감자를 한입 가득 물고 있는데, 그것을 삼키지 못해 게울 것만 같다.
익사라는 말은 아무도 꺼내지 않는다.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언니는 괜찮을 거야."
"언니는 괜찮을 거야."
"언니는 괜찮을 거야."
전화벨이 다시 울리고 남편이 받는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언니는 괜찮지 않다.
비명이 방을 가로지른다. 나는 앞뒤로 몸을 흔들면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을 반복한다.
"안 돼."
나를 위로하려는 손들이 다가온다. 울지 말라는 말이 들려온다. 아기를 생각해야지, 나는 뱃속의 아기를 생각해야 한다.
그게 다다. 언니는 없어졌고, 다시는 집에 오지 않을 것이다.
밤은 속절없이 흐른다. 나는 쉬어야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언니가 죽은 뒤 서른여섯 시간 동안 나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선잠에 들었다 깼다 한다.
나는 도무지 울음을 멈출 수 없고, 애통함에 몸이 아플 때까지 흐느낀다. 움직일 수도 없다. 이미 약해진 몸이 충격으로 부서져 산산조각 나는 것 같다.
사흘째에 남편이 내게 일어나보라고 애원한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서보지만, 통증이 덮쳐서 도로 앉는다. 자궁이 짧고 강하게 수축하기 시작한다. 뭔가 잘못됐다. 임신 28주째에 이러면 안 된다.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에 도착한다. 소리내어 울고 싶지만 그러면 수축이 심해진다. 사람들이 내게 호흡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마시고, 둘 셋, 내쉬고, 둘 셋. 내가 몸 안의 작은 생명을 붙들려고 애쓰는 동안, 언니의 몸은 영안실에 누워 있다.
나는 아기를 붙들고 언니를 놔줘야 한다. 나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아기에게는 내가 전부다.
문득 내 갈비뼈를 차는 발길이 이 고통의 안개 속에서도 생명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나는 쉬고 먹고 품고 준비하고 강해지고 낳고 놓아줘야 한다.
어떻게 그걸 해낸다지?
말은 너무 작고, 상실은 너무 크다.
시인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삶이란 다 지나가는 것이고 한 생명이 끝나면 다른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린다고 말하지만, 지금 그 비유는 내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망가진 이 삶에서도
무언가 자랄 수 있을까?
몇 번의 유산 끝에 생긴 아이, 하지만 이 아이가 세상에 나오길 누구보다 기다렸던 큰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상실의 고통 속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내려진 불치병 판정.
<들풀의 구원>을 쓴 빅토리아 베넷의 이야기입니다.
상실과 고통으로 마치 폐허와도 같던 자신의 삶에서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을 놓지 않기 위해 베넷은 돌무더기뿐이던 정원에 야생초를 심기 시작합니다.
남들이 뽑아내는 잡초를 소중하게 받아 키웁니다. 홍수로 물이 고이면 연못을 만 들고, 비바람이 걱정되면 작은 관목을 심어서 산울타리를 만듭니다.
이 정원에는 쐐기풀, 질경이, 석잠풀, 미역취처럼 제각각 아름답고 쓸모도 있지만 사람들이 원하지 않기에 잡초라고 불리는 식물도 자랍니다.
콩, 호박, 케일, 아욱처럼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는 채소가, 타임, 로즈메리, 레몬밤처럼 향신료가 되어주는 허브가 자랍니다.
칼렌듈라, 장미, 인동, 라벤더, 수선화처럼 특별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야생화가 자라고 새와 곤충이 찾아옵니다.
망가진 이 삶에서도
무언가 자랄 수 있다는 믿음.
때로 삶은 부서진 덕분에 자란다는 사실.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상실과 실망이 찾아올 때,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용기.
이 책 속에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그것을 찾으실 수 있길 바랍니다.
저자가 들풀에서 ‘그것’을 찾아냈듯이, 나도 독자 여러분도 각자의 그것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의 그것들이 각자를 살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저자의 정원처럼 주변까지 아름답게 한다면 더욱 좋겠다.
_ <들풀의 구원> 옮긴이의 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