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한국을 구하는 글...나는 왜 가디언에 그렇게 말했나 [강인규 리포트]

강인규 2024. 10. 2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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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규리포트] 한강 작가가 보여준 놀라운 용기

[강인규 기자]

 한국의 문화를 조명한 <가디언>의 지난 3월 특집기사. 기사 후반부에 한국문학의 저력을 다룬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다.
ⓒ 가디언 홈페이지 캡처
올해 초 <가디언>지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습니다. 미국 대학에서 한국 대중문화를 강의하면서, 미국 매체와는 가끔씩 인터뷰를 했지만, 영국 언론사는 처음이었습니다. 저스틴 매커리 특파원은 예닐곱 개 질문을 던진 뒤, "그동안 한국의 영화, 드라마, 음식 등이 세계적 인기를 누려 왔다"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앞으로 세계는 한국의 어떤 문화에 주목해야 할까요?"

저는 "문학"이라고 답했습니다만, 이 답변은 예상보다 기대에 가까웠습니다. 그동안 한국 문학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에 희망을 실어 말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불과 몇 달 뒤, 제 바람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극적인 방식으로 보답 받았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한국 작가들이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영예로운 상도 받게 될 것이고요. 하지만 한강의 수상 소식이 제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까닭은, 수여된 상이 노벨상이라는 사실 못지 않게 이 상을 받은 작가가 '한강'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국 사회에 수상 소식이 전해진 시점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강은 제게 용기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 작가입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입에 올리기조차 버거워 할 두 개의 거대한 사건을 문학의 품으로 끌어안았습니다. 섬세한 것이 강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 것도 그의 글이었습니다. 이런 한강의 수상은, 길 잃은 한국사회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만큼 고통스럽지만, 읽을 수밖에 없는 글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책 표지
ⓒ 문학동네
한강의 글은 여리고 고운 만큼, 읽기에도 고통스럽습니다. 손가락에 앉았던 새가 날아간 뒤 "거품처럼 내 살갗에 남겨 놓은 감각"(<작별하지 않는다>)까지 놓치지 않는 작가의 감수성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아픔과 절망도 동일한 섬세함으로 포착해 냅니다.
"관 뚜껑 닫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네 얼굴이 얼마나 핼쑥했던지. 네 살이 그렇게 희었던 줄 그때 처음 알았다이.
나중에 느이 작은형이 그러드마는. 총을 맞고 피를 너무 흘려서 네 얼굴이 그리 희었다고. 그래서 관이 가벼웠다고. 네가 아무리 덜 컸다고 해도, 그렇게 관이 가벼울 수는 없었다고." (<소년이 온다>)

하지만 계속 읽어갈 수 밖에 없는 까닭은, 독자에 앞서 작가가 그 고통을 수없이 되새김질 해 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아픔이 어떤 것인지,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를 읽은 독자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작가는 자신이 10살에 엿듣게 된 한 중학생의 죽음과, 이후 아버지 서재에서 꺼내 본 광주 시민들의 참혹한 모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가 몰래 그 책을 펼친 것은, 어른들이 언제나처럼 부엌에 모여 앉아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던 밤이었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우리는 이 순간, 작가가 평생 안고 가야 할 상처를 입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때 두 가지 선택이 가능했겠지요. 하나는 기억을 애써 외면하며 깊은 무의식의 서랍 속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쉽지 않겠지만, 망각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들의 흔한 습관이 아니던가요. 또 다른 선택은 그 외상을 남긴 참혹한 현실을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것일 터입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 소중한
그리하여, 작가는 어릴 적 떠나온 도시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면서도 너무 늦게 온 건 아닌지 염려하던 작가는, 광주항쟁 당시 시신들이 놓여 있던 상무관을 찾고, 기억을 되살려 자신이 살던 집과 이웃을 둘러보는 한편, 전남대 5.18 연구소, 상무지구의 5.18 문화재단, 그리고 고문이 자행됐던 505 보안부대까지 찾아갑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교편을 잡았던 중학교에 들러, 어린 시절 죽음을 알게 된 그 중학생의 학적부를 확인하고, 거기에서 주인공이 될 동호의 사진을 확인합니다.

작가는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는다"는 원칙을 세우고는, 다른 어떤 것도 읽지 않고, 글도 쓰지 않고, 가능한 한 약속도 잡지 않은 채 자료를 읽어 갑니다. 그러다가 더 계속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지요.

"꿈 때문이었다.
한 무리의 군인들을 피해 나는 달아났다. 숨이 턱에 받쳐 뜀박질이 느려졌다. 그들 중 하나가 내 등을 밀어 넘어뜨렸다. 몸을 돌려 올려다보는 순간 군인이 총검으로 내 가슴을, 정확히 명치 가운데를 찔렀다. 새벽 두시였다. 벌떡 일어나 앉아 손으로 명치를 짚었다. 오분 가까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덜덜 턱이 떨렸다. 울고 있었던 줄도 몰랐는데, 얼굴을 문지르자 손바닥이 흠뻑 젖었다."

작가는 자신의 선택이 가져 온 악몽을 <작별하지 않는다>의 경하를 통해서도 증언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그는 끔찍한 꿈에 가위 눌리며 유서를 썼다 찢고 다시 쓰기를 반복합니다.
"… 그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읽으면서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직접적인 폭력이 담긴 꿈들이었다. 공수부대를 피해 달아나다 어깨를 곤봉으로 맞고 쓰러졌다. 엎어진 내 옆구리를 발로 차서 몸을 뒤집던 군인의 얼굴을 이제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착검한 총을 두 손으로 모아쥔 그가 힘껏 내 가슴을 내리 찔렀을 때의 전율만 남아 있다."

작가가 보여준 놀라운 용기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아이파크타워에서 열린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 참석하고있다. 포니정재단은 포니정 혁신상 수상자로 작가 한강 씨를 선정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저는 노벨문학상이 한강에게 주어졌기에 더 특별하다고 말했습니다. 일부는 노벨 위원회가 아시아 여성작가를 특별히 배려한 게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시아이든 비아시아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다수가 생각하기조차 꺼리는 진실을 낱낱이 캐내 그처럼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담아낸 작가는 드물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계가 전쟁과 죽음의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현재, 한강은 누구보다 주목할 목소리를 내는 작가입니다.

한강 작가의 수상이 발표된 후, 몇몇 사람과 단체가 볼멘 소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의견은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불만의 이유가 "역사 왜곡"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작가의 책을 안 읽었노라고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저는 언론학자로서 꽤 오래 저널리즘을 강의했습니다. 저널리즘은 글쓰기에 앞서 취재와 사실 확인을 먼저 하는 작업입니다. 그런 저조차, 한강 작가가 작품을 쓰기 위해 읽어낸 다양한 문헌과 사료, 발로 뛴 현장 조사와 관련자들을 수소문해 면담한 과정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문학의 언어로 쓴 역사이자 저널리즘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 엄청난 사건들을 직시할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강박에 가까울 만큼 철저한 조사와 확인의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었지요. 여기에 작가는 "제대로 써야 한다"는 유족들의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만일 작품의 진실성에 이견을 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작가가 쏟아 부은 노력과 고통의 절반 만이라도 시도하며 문제제기를 해야 최소한의 자격과 설득력을 갖추는 일이 될 것입니다. 물론, 먼저 작가의 책부터 읽어야겠지요.

한국인 대다수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주 4.3 사건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가해자 편에서 희생자들과 유족들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각기 76년과 44년의 시간 속에서 역사적으로 정리가 끝난 사건들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되풀이될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중요한 건 피가 멈추지 않게 하는 거야."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인선은 잘려 나갔다가 봉합된 손가락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는 접합수술이 잘 됐다 해도, 신경 부위를 계속 바늘로 찌르며 고통을 참아내야만 상처가 온전히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몇 분 간격으로 반복되는 아픔을 몇 주 동안이나 견뎌야 하지만, 고통스럽다고 이 과정을 생략하면 수술 위쪽 마디가 썩어서 일평생 고통받게 됩니다.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작가의 광주 방문이 늦지 않았듯, 우리가 제주와 광주의 상처를 보듬기에도 늦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혹스럽고 고통스럽겠지만, 사실은 영원히 고통받는 저주를 피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광주 시민들의 희생, 배려, 연대를 기억하며
 5.18민주화운동 기간동안 양동시장과 대인시장의 상인들이 주먹밥을 나눠준 일화는 유명하다.
ⓒ 5.18기념재단
<작별하지 않는다>의 경하는 자신의 뺨에서 녹는 눈과, 제주 4.3 사건 당시 시신들의 뺨에서 녹지 않던 눈이 같은 눈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이 순환하듯, 역사도 순환합니다. 제주공항의 활주로 아래 쌓인 유골들이 말해주듯, 한국 현대사는 야만적 학살로 얼룩져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도 무시한다면 우리 사회에 도사린 폭력의 유전자는 계속해서 비극을 잉태할 것입니다.

한국사회가 망가진 채 표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 스스로 한국을 "헬조선"이라는 별명으로 불러 왔으니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지옥의 많은 부분을 스스로 만들어 오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동료 노동자의 일자리가 정규직이 되는 것을 "공정"의 이름으로 반대했고, 한국의 성별임금격차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1996년 이래 계속 꼴찌인데도 "여성가족부 해체"를 공언한 정치인에 열광했으며, 고향, 거주지, 학교, 직업 따위로 이웃을 구분 짓고 경멸하는 일상을 살아 왔습니다.

<소년이 온다> 독자는 군부에 맞서다 잡혀 온 시민군들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들은 가혹한 고문뿐 아니라 일상적 배고픔에 시달렸는데, 한끼 식사가 2인 1조로 한 개의 식판에 담겨 나왔습니다. 식판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지요. 적은 밥과 반찬을 놓고 짐승처럼 서로 으르렁거리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시민들을 서로의 적으로 만드는 것은 근본적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효과적 수단일 뿐 아니라, 책임 당사자인 정부에 대한 투쟁을 무력화하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가전에서 희생되었는지 난 알지 못합니다. 기억하는 건 다음 날 아침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병원들의 입구, 피 묻은 흰 가운에 들것을 들고 폐허 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 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려주던 여자들, 함께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광주를 기억하는 것은 단지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아는 데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동료 시민들이 발휘했던 희생, 배려, 연대의 정신을 기억하는 것은, 길 잃은 난파선이 된 한국사회를 안내할 등대를 재건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 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광주를 위험하고 불온한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온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연대의 희열을 맛본 사람들은 결코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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