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안 될까, 정신과 치료 미루고 있나요?
기업들의 근거 없는 '편견' 사라져야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기록이 있으면 채용전형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단 말이 항간에 떠돈다. 기업이나 공공기관이 지원자의 병력을 확인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기록’이 있으면 직무 수행이나 조직 생활에 부적합하다고 간주한단 것이다. 그러나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기록은 그 자체로 채용 불합격 사유도, 감점 요인도 될 수 없다. 몇몇 특수 직종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기업이나 공공기관이 개인 의료기록에 접근하는 게 법적으로 불가능해서다.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일상을 공유하는 카페 ‘코리안매니아’에서 만난 ‘도도(가명)’씨의 경우도 그랬다. 그는 ‘조울증’을 진단받은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지역 공공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채용 단계에서 도도씨를 심사했던 인사담당자는 물론, 일터 동료도 그가 저녁마다 조울증약을 먹는 걸 모른다.
◇일반 기업·기관, 채용 목적으로 의료기록 열람 불가
의료법 제21조 2항에 의하면 의료인, 의료기관의 장 및 의료기관 종사자는 환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환자에 관한 기록을 열람하게 하거나 그 사본을 내주는 등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해선 안 된다.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경우가 3항에 나열돼있지만, 일반 사기업·공기업·공공기관이 채용에 활용할 목적으로 열람할 수 있단 내용은 없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는 대부분이 국민건강보험 급여대상이다. 그 탓에 정신건강의학과 병력이 ‘국민건강보험 급여내역’을 통해 지원한 기업·회사에 알려질 수 있단 우려가 있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급여내역서에 기재된 ▲상병코드 ▲상병명을 통해 과거에 앓은 병을 파악할 수 있는 건 맞다. 그러나 정신건강의학과·산부인과·비뇨기과 등 일부 상병건강에 관한 정보는 ‘개인정보 보호법’ 제23조 1항이 규정한 민감정보에 해당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진료받은 장본인 이외의 대상에 공개할 수 없다. 일반 사기업·공기업·공공기관이 지원자의 정신건강의학과 급여 내역을 공단을 통해 열람할 수 없단 뜻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내역이 불합격 사유가 될 수 있는 건 몇몇 특수 직종에 한해서다. 지원자 심사 단계에서 국민건강보험 급여내역을 요구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항공조종사’가 대표적이다. 공군사관학교는 1차 시험을 통과한 수험생이 2차 시험에 등록할 때, 정신질환을 비롯한 특수상병내역이 포함된 근 5년간의 요양급여내역서를 제출하도록 한다. 내역서를 검토한 결과 ▲조현병 및 기타 정신병적 장애 또는 이전의 병력 ▲기분장애(우울, 양극성 장애 등) 또는 이전의 병력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ADHD) ▲극단적 선택 시도나 행동의 과거력이 확인되면 신체검사에 불합격할 수 있다고 ‘2022학년도 공군사관생도 모집요강’에 명시돼 있다.
◇어쩌다 병력 알려졌다면, ‘직무 수행 이상 無’ 소견서 제출
물론 예외적인 상황이 아예 없진 않다. 일반 기업·기관이 지원자의 정신계통 병력을 알게 되는 사례가 간혹 있다.
하나는 채용 신체검사결과를 통해 병력이 노출되는 경우다. 공무원 채용신체검사 결과서엔 ‘정신질환’ 유무를 적는 칸이 있다. 대부분 건강검진기관에선 이 칸을 검진 마지막 단계에 의사와 면담해서 채운다. 도도씨가 공무원 채용신체검사를 받은 곳도 그랬다. 이때 지원자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고 있다’거나 '요즘 계속 우울하다’고 의사에게 밝히지 않는 이상 검사서에 이 사실이 기록되진 않는다. 기록을 회피하려 사실을 숨기는 상황이 기형적이긴 해도, 회사에 병력이 알려질 일은 없다.
구직자에게 더 큰 문제는 두 번째다. 지원자의 국민건강보험 급여내역을 '본인 확인용'으로 발급받아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곳이 드물게 있다.
병력이 확인된다 해도 원칙적으로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내역이 있단 이유만으로 지원자를 불합격 처리할 수 없다. 채용 부적격 사유로 정신계통 질환을 제시할 땐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의 정신상의 이상”이란 조건이 따라붙는다. 인사혁신처에서 공개한 ‘공무원 채용 신체검사 매뉴얼’ 최신판도 정신 계통 불합격 사유로 ‘업무수행에 큰 지장이 있는 정신계통의 질병’을 제시한다. 가벼운 우울증이나 조울증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의 정신상 이상'으로 분류되진 않는다. 연세광화문정신건강의학과 김상현 대표원장은 “업무 수행이 힘들 정도의 정신질환인지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환자의 상태와 ‘WHO 장애평가조사표(WHO Disability Assessment Schedule 2.0)’를 비롯한 심리평가 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판단한다”고 말했다.
지원한 회사에 정신계통 병력이 어떠한 경로로든 알려졌다면, ‘직무를 수행하는 데 이상이 없다’는 전문의 소견서를 제출해 자신을 변호할 수 있다. 실제로 김상현 원장에게 진료받은 환자가 전문의 소견서를 제출하고 채용 전형에 최종합격한 사례가 있다.
◇구직자 ”그래도 의심된다”… ‘소명 기회’ 강화해야
구직자의 병원 진료 내역이 채용에 불이익을 줄 수 없는 구조고, 대부분은 이 원칙이 지켜진다. 그러나 구직자로선 여전히 미심쩍을 수 있다. 지원한 곳에 본인의 정신건강의학과 병력이 알려져, 전문의 소견서를 제출한 후에 불합격한 경우 특히 그렇다.
대부분 회사·기관에선 불합격 사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구직자로선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경험이 감점 요인이었단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회사·기관에 항의해 봤자 결론은 뻔하다. 법률사무소 한종의 박철훈 변호사는 “지원자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기록 탓에 채용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며 회사를 고소하긴 힘들다”며 “설령 불이익이 있었더라도 기업에선 정신건강의학과 진료기록 외 다른 합리적 사유를 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진료 기록이 감점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은밀하게라도 회자되는 이상, 구직 중인 환자들은 동네 내과를 가듯 정신건강의학과를 쉽게 찾을 수 없다. 무작정 버티다가 상태가 악화되는 사람들은 이미 있다. 김상현 원장은 “연인과 헤어지거나 반려동물이 죽는 등 일상적인 사유로 가벼운 불안장애·주의집중력장애(ADHD)·알코올의존증·무기력감 같은 경증질환이 생기는 사례가 있다”며 “구직자로선 꼬투리를 잡힐 만한 여지를 조금이라도 남기기 싫으니, 치료가 필요한데도 병원에 오지 않고 버티다가 우울증을 얻거나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곤 한다”고 말했다.
의심의 여지는 기업의 판단을 구직자가 납득하기 어려울 때 생긴다. 정신계통 병력이 있는 지원자가, 자신의 직무 수행 능력을 입증할 ’공식적 기회’를 보강하는 게 해법인 이유다. 김상현 원장은 “전문의 한 명의 소견서만으로도 직무 수행에 이상이 없다는 건 충분히 증명된다”면서도 “기업이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느끼면, 반복적인 치료 및 심리평가 내역을 제출해 ‘완전 관해(寬解)’에 도달했음을 입증하거나, 다수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에서 직무 수행 가능성을 심사받게 하는 등, 지원자가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구직자도, 기업도 모두 결과를 신뢰할 수 있는 ‘검증 체계’를 만들어야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문턱이 낮아질 거란 전망이다.
한국인 10명 중 4명이 우울증을 경험한다는 통계가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받기를 꺼리지 않는 분위기가 하루빨리 조성돼야 한다. 도도씨는 조울증을 ‘마음의 당뇨’ 같다고 한다. 당뇨 환자가 혈당을 관리하듯, 조울증도 잘만 관리하면 직장이든 일상이든 한 사람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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