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택할 수 있어" 복수의 연 끊은 아이들 이야기
우수한 아동 문학을 소개합니다. 어른에게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아동 문학을 통해 우리 아동 문학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문학 속에 깃든 아이들의 마음과 어른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기자말>
[최혜정 기자]
'고드레 하숙'집.
볕이 잘 드는 마당에 평상이 있고, 대문 옆에는 지붕 위까지 솟은 향나무가 있는 곳, 향나무 그늘에는 돌로 쌓은 우물도 있다. 네모난 마당을 둘러 'ㄷ'가 모양의 기와집이 있는 이곳에는 루호와 구봉 삼촌, 달수와 희설이가 산다. 밤이면 몰래 나가서 깊은 숲 속 산책을 즐기는 이 가족은 아주 특별한 가족이다.
사실 루호와 구봉 삼촌은 호랑이다. 달수는 토끼, 희설은 까치, 모두 인간으로 변신한 동물인 것이다. 이쯤 되면 어른 독자는 '아, 동물이 변신하는 유치한 판타지구나.' 하며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을 떨어뜨린다.
하지만 이대로 책을 덮으면 오산이다. 이어지는 이야기에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곧 가슴을 쓸어 내리며 긴장 했다가 안도의 숨을 쉬기도 하며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된다.
<루호>는 채은하 작가가 세상에 내어 놓은 첫 작품이지만, 어설프지 않다. 탄탄한 서사가 독자를 사로잡는다. 맛깔나는 스토리를 자랑하는 창비 '좋은 어린이책' 공모 대상작답다.
더불어 오승민 작가의 그림도 한몫을 한다. 여러 아동 문학 작품에 그림을 그리고, 그림책 작가로도 활동하는 오승민 작가의 그림은 늘 현실감 있으면서도 정겹다. 책 내용에 어울리는 다양한 그림체로 독자들의 마음을 이야기로 끌어들인다.
▲ 루호 책표지 |
ⓒ 창비 |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여기는 인간들에 의해 숲은 점점 사라지고 동물들은 위기에 처한다. 인간의 민낯은 왜 이리도 자주 자연 앞에 드러나는지!
궁지에 몰리 동물들을 구하기 위해 '산(山)'은 궁여지책으로 살 곳을 마련한다. 잃어버린 이들만 찾을 수 있는 '숨겨둔 골짜기'로 동물들이 모인다. 고드레 하숙집의 식구들도 이곳에서 만났다. 서로를 구하고 서로를 살리며.
그러나 숨겨둔 골짜기 마저도 인간의 욕망 앞에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다시 산은 가련한 동물들을 살리기 위한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사람으로 변신하여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고. 변신의 방법을 알려주는 단 하나의 조건은, '변신을 이용해서 누군가를 해치지 마라'는 것이다.
인간들은 종종 복수를 꿈꾼다. 거친 자연 앞에 무너지면 자연의 속사정을 들어보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목숨을 호랑이에게 빼앗긴 유복이처럼 기어이 복수를 하고야 만다. 정복욕이다. 마천굴은 살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을 해친 호랑이였다. 유복이의 아버지는 이 마천굴에게 당하고 마천굴은 유복이에게 목숨을 잃는다.
마천굴을 따르던 무리들은 인간들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산은 인간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가르친다. 자연은 늘 인간에게 밀리고 당해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스스로 안간힘을 쓰며 인간과 더불어 살아갈 길을 찾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욕망하고 자연은 소망하는 것이다.
무엇을, 왜... 우리 자신을 만드는 '선택'들
위기를 만난 호랑이들의 길은 둘로 나뉜다. 호랑이로 남겠다는 자들과 사람으로 변신하여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겠다는 호랑이.
호랑이들에게 변신하는 법을 가르쳤던 무당 호랑이 모악 할미는 그날 호랑이들의 빛나던 얼굴들을 잊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했어. 용기를 내어 어떻게 살지 결정한 거야. 우리 자신을 만드는 건 바로 그런 선택들이야.
오랜 시간을 살아온 나도, 호랑이이자 사람인 너도 그렇지. 우리는 언제든 우리의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 그걸 잊지 마."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선택은 어리석어 보이고, 어떤 선택은 약삭빨라 보이고, 또 어떤 선택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기도 하지만, 누구도 타인의 선택에 왈가왈부할 수 없다.
선택이 자신의 것이듯 선택의 결과도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 안에 가득한 인간의 욕망 사이로 '선택'이라는 주제가 관통을 한다. 중심인물인 루호와 지아, 그리고 구봉 삼촌의 선택은 우리가 일상처럼 하는 욕망의 선택에 균열을 일으킨다.
루호가 사는 고드레 하숙 옆집에 어느 날 지아네가 이사를 온다. 지아 가족은 특별한 능력이 있다. 사람으로 변신한 호랑이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능력은 유복이 할아버지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능력이다.
호랑이에게 복수를 했던 유복이 할아버지가 어느 날 이 능력을 갖게 되고, 대대로 유복이의 자손은 이 능력으로 변신한 호랑이 사냥꾼이 된다. 지아의 아빠 강태씨는 이 능력 때문에 호랑이 사냥꾼으로 살아간다.
지아 역시 이 능력을 타고 났다. 사실 이사한 첫날부터 지아는 루호가 호랑이임을 알아보았다. 이미 아빠의 능력이 자아에게도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지아는 아빠에게 루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빠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선을 선택하고, 선의를 따르고 있기에 이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것이라 믿는다(자료사진). |
ⓒ outoforbit on Unsplash |
이제 지아의 선택이 남았다. 지아는 아빠 앞을 가로막고 루호를 구한다. 그리고 루호와 친구가 된다. 사람을 지키고 좋은 일을 하는 거라던 아빠의 말대로는 살겠지만, 그러나 아빠처럼 살지는 않겠노라고 선언한다.
강태는 루호와 지아의 선택 앞에서 외친다.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날 구해 준 저것도, 저것을 지키려는 너도."
알고 보면 루호와 지아는 만날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복수의 고리가 만든 질긴 인연이 얽혀있었다. 그러나 루호아 지아는 손을 맞잡고, 그 옛날 선조들이 만들었던 복수의 고리를 끊는다.
루호와 구봉삼촌 그리고 달수와 희설이 사는 집의 이름은 '고드레'였다. 고드레는 돗자리를 짤 때 쓰는 돌이다. 돌이 실을 엮어주는 것처럼 사이 좋게 지내자는 뜻에서 구봉 삼촌이 지은 이름이다.
이들은 결국 이곳에 모여서, 지아와 자아의 동생 승재까지 함께 살게 된다. 그러니까 집주인 구봉 삼촌의 마음이 들어있는 이 집에 제대로 된 돗자리가 완성된 셈이다.
지아와 승재를 고드레 하숙으로 부른 구봉 삼촌의 선택은 '산'이 바랐던 '인간과 더불어 사는 자연'을 실현한 결정이었다. 이런 멋진 결정이 단지 아동 문학의 판타지에서만 나온다면 세상은 너무 춥고 슬픈 것이 아닐까.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선을 선택하고, 선의를 따르고 있기에 이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느꼈던 말들을 다시금 입 안에 머금어 본다.
'더불어 살아가기, 그리고 누구도 해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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