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출을 만나기 가장 좋은 이 곳

“카운트다운하지(La cuenta regresiva)!”

한국에 온 멕시코인과 새해를 맞이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네 고향에선 새해 전날 친구나 친척집에 다 같이 모여서 자정 카운트다운을 세는 것이 보통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시간에 따라 일출을 새해의 기점으로 삼는 반면 그들은 인간의 시간을 따릅니다. 0시 0분 0초의 찰나를 축복하는 것이 보통인 그들과 비교하면 어스름을 뚫고 고개를 내미는 느리고 장엄한 모든 순간에 축복을 비는 우리의 해맞이도 말하자면 ‘K-새해’입니다.

신라 화랑이 걷던
한국의 산티아고길
바다 품고 750㎞
해파랑길 14구간

우리나라 걷기길 중에서 일출을 만나기 가장 좋은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해파랑길입니다. 해파랑길은 동해안을 한 번에 이어 걸을 수 있는 걷기길로 총 50개 코스, 750㎞에 달합니다. 이름은 동해의 상징인 떠오르는 해와, 바다 빛깔을 뜻하는 파랑, ‘~와 함께’라는 조사 ‘랑’을 조합해 만들었습니다.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

해파랑길은 동해 바다를 따라서 난 길이다. 그중 14구간은 일출 명소인 호미곶을 경유하고 있어 신년 겨울에 걷기 가장 좋은 걷기길로 꼽힌다. 사진 C영상미디어

역사적 유래도 깊습니다. 스페인 산티아고길이 1000년에 걸쳐 순례자들이 만든 것이라면 이곳은 1400년 전 수련자들이 만들었습니다. 바로 신라 화랑들입니다. 삼국을 통일한 후 화랑들은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장거리 걷기에 나섰습니다. 그중 가장 인기 있던 길이 경주에서 금강산까지 이어지는 동해안 길이었다고 합니다. 현대에 들어 국토대장정이 유행하면서 7번 국도를 따라 화랑의 뒤를 이었습니다.

해파랑길은 척박한 도로는 피하는 대신 최대한 호젓하면서 역사적 의미가 깊고 경관 좋은 길을 따라서 새로 냈습니다. 이 중에서 1월에 가장 걷기 좋은 길은 포항에 자리한 14구간입니다. 경북 포항 남구 구룡포읍에서 호미곶면을 잇는 14㎞, 약 4시간 30분 걸리는 길입니다.

해파랑길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것이 정방향이지만 14구간은 호미곶에서 일출을 보고 남쪽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호미곶은 한반도 최동단으로 내륙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입니다.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호미곶이 가장 동쪽 끝인지 확인하려고 일곱 번이나 답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한반도를 호랑이로 볼 때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상생의 손 위로 새해 새 희망이

2000년 새천년을 맞아 호미곶에 설치된 조형물 ‘상생의 손’. 사진 C영상미디어

특히 새해엔 호미곶의 조형물 ‘상생의 손’을 배경으로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상생의 손은 바다와 육지에 각각 오른손과 왼손의 모습을 본떠 2000년 새천년을 맞아 제작된 것으로 전 국민의 화합과 상생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손아귀 사이로 붉은 해가 떠오르면 나도 조형물처럼 따뜻한 희망을 손에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길의 90% 이상이 시종일관 아름다운 동해 바다를 바로 옆에 끼고 걷는 길입니다. 오르내림 없는 평지에다 이정표도 잘 돼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충분히 완주할 수 있습니다. 길은 해국(국화과로 주로 가을에 핀다) 자생지를 지나면서 다무포 고래마을로 이어집니다. 고래잡이가 국제협약으로 금지되기 전까지는 마을 앞바다에 자주 출몰하는 대형 고래를 낚으며 풍족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포경금지 이후 ‘고래마을’이란 명성도 사라지고 쇠락해갔지만 최근 새로운 풍경을 품은 마을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2019년부터 매년 마을주민, 지역 예술가, 포항 시민이 함께 노후화한 마을의 담벼락과 지붕을 그리스 산토리니처럼 하얗고 파랗게 칠하는 마을재생 프로젝트에 자발적으로 나섰기 때문입니다.

2024년부터는 해양수산부 어촌신활력증진사업 후원도 받아 2027년까지 프로젝트를 완성한다는 계획입니다. 2027년까지 기다리기 힘들다면 미리 가서 이 프로젝트에 일조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놀이체험처럼 누구나 수시로 열리는 페인팅 행사에 참석해 마을에 벽화를 그릴 수 있습니다.

겨울철 해풍에 과메기 맛이 깊어지고

구룡포의 흔한 겨울 풍경. 마을 주민들이 오징어를 겨울바람에 말리고 있다.
구룡포 덕장에서 꾸덕꾸덕 건조되고 있는 과메기.

이제 석병리로 내려섭니다. 국토지리정보원 기준, 대한민국 최동단의 정확한 좌표가 이곳에 찍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 곳곳에선 ‘땅끝’이란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선사시대 신앙의식 혹은 의사소통 등의 목적으로 돌의 표면을 파서 만든 구멍인 ‘성혈(性穴)’이 있는 바위도 인근에 있습니다.

삼정리로 넘어서면 하이라이트 구간이 나옵니다. 이맘때면 길 곳곳에서 과메기들이 해풍에 바짝 말라가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겨울철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과메기 건조에 최적이라 쫄깃하고 깊은 맛이 일품이라고 합니다.

과메기에 빼앗겼던 시선은 바람이 불고 달이 밝은 밤이면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관풍대(삼정섬)에 닿았다가, 식은 용암이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에 깎여 만들어진 주상절리로 이어집니다. 신라 때 세 명의 정승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이유가 이해됩니다.

드라마 세트장 같은 일본인 가옥거리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를 걸으면 마치 드라마 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 사진 C영상미디어

길 끝에는 구룡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름부터 상서롭습니다. 신라 진흥왕 때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며 앞바다에서 열 마리 용이 승천했는데 이 중 한 마리가 떨어져 결국 아홉 마리만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조선시대까지는 조용한 어촌마을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항구를 지으면서 마을 경관이 급속도로 바뀌었습니다. 항구가 생기자 일본인들이 건너와 살면서 일본인 거리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란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로 왔던 일본인 어부 중 한 명인 하시모토 젠키치가 지은 2층짜리 목조건물은 ‘구룡포 근대역사관’이 됐습니다. 한창 번창했을 땐 600여 척의 어선과 1만 명의 선원이 머물렀다고 합니다.

약 500여m를 따라 일본인 가옥 51채가 늘어서 있어 드라마 세트장을 연상케 합니다. 실제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동백꽃 필 무렵’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습니다. 밤이 되면 조명이 드리우면서 더욱 운치 있는 풍경을 선사합니다. 공식적인 길은 아라광장 옆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은 멈춰지지 않고 바로 옆 과메기물회거리로 이어집니다.

서현우
월간山 기자

교통편

- KTX로 포항역에 가서 구룡포항과 호미곶으로 한 번에 가는 9000번 버스를 타면 됩니다. 하루 26회 운행합니다.

- 일출을 보려면 전날 호미곶으로 이동해서 인근 펜션에 숙박하는 것이 좋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