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 단단히 딛고 선 인간들, 연말에 떠올린 조각
학교와 도서관, 박물관 등에서 미술 인문학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한 여행에서 모아 둔 내용을 바탕으로 유럽 7개국 미술관의 대표 작품을 소개합니다. <기자말>
[김상래 기자]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줄이 먼저 길어집니다. 공항 보안 검색대 앞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고, 백화점 포장 코너에는 선물 상자가 쌓입니다. 케이크 픽업 시간에 맞춰 서두르는 사람들도 보이지요.
반짝이는 장식보다 더 연말을 실감하게 하는 건, 이렇게 "기다림이 늘어나는 풍경"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틈에서 저는 도시를 버티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밤을 지키고 길을 열고 약속을 이어 주는 손들 말입니다. 로댕 정원에서 <지옥의 문>을 잠시 뒤로하고 <칼레의 시민들> 앞에 서 봅니다.
<지옥의 문>이 인간 내면의 욕망과 죄를 응시한다면, <칼레의 시민들>은 현실의 고통 앞에서 드러나는 용기와 존엄을 보여줍니다. 로댕은 이 장면을 영웅담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망설임과 공포를 느끼는 '인간의 얼굴'을 그대로 남깁니다. 여섯 사람의 표정은 하나도 같지 않습니다. <칼레의 시민들>은 고통 속에서도 존엄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의 모습을, 가장 현실적인 방식으로 기록한 조각입니다.
|
|
| ▲ 로댕 〈칼레의 시민들〉 오귀스트 로댕, 〈칼레의 시민들〉 리움미술관 전시 작품 촬영 |
| ⓒ 김상래 |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칼레에서 영향력이 있던 이들이 앞으로 나섰습니다. 상인과 법률가, 귀족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여섯 명은 목에 밧줄을 걸고 맨발로 자루옷을 입은 채 성의 열쇠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왕 앞에 섰습니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은 바로 그 장면을 조각으로 옮긴 작품입니다.
|
|
| ▲ 로댕 〈칼레의 시민들〉 인물 디테일(부분) 오귀스트 로댕, 〈칼레의 시민들〉 부분 디테일. 리움미술관 전시 작품 촬영 |
| ⓒ 김상래 |
기록에 따르면, 여섯 사람은 처형 직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임신 중이던 필리파 왕비가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청했고, 왕은 끝내 살려두기로 결정을 하지요. 이 사건은 프랑스에서 공동체를 위한 책임 있는 결단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회자되어 왔습니다.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로 정리되지만, 핵심은 하나입니다. 지위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위기 앞에서 무엇을 감수할 수 있는가.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사실일까요. 칼레의 '여섯 사람' 이야기는 14세기 연대기 기록을 바탕으로 오늘까지 전해집니다. 로댕도 그 전승에서 출발해 <칼레의 시민들>을 만들었습니다. 연대기는 사건을 적는 기록이면서, 사람들이 기억하고 싶어 하는 의미를 함께 담아내는 글이기도 합니다. 필리파 왕비의 중재처럼 널리 알려진 장면도 후대에 더 극적으로 정리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볼 때 중요한 건 '무슨 말이 오갔는지'보다, 위기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흔들리고 무엇을 선택했는지입니다.
|
|
| ▲ 로댕 〈칼레의 시민들〉 인물 디테일(부분) 오귀스트 로댕, 〈칼레의 시민들〉 부분 디테일. 리움미술관 전시 작품 촬영 |
| ⓒ 김상래 |
로댕은 인물을 높은 받침대 위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실제 사람 크기에 가깝게, 땅과 가까운 높이에 두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올려다보는 대신, 같은 눈높이에서 표정을 마주치게 하려는 선택이었습니다.
로댕이 바꾼 기념비의 의미
로댕은 전통적인 영웅상에서 기대하던 당당한 얼굴이나 승리의 포즈를 모두 거부했습니다. 대신 여섯 명의 시민을 각기 다른 감정과 자세로 만들었지요. 절망과 두려움, 체념과 비장함, 고독,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리는 인간적인 망설임까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이 작품을 보면, 군인들이 행진하듯 똑같이 늘어선 모습이 아니라, 여섯 명이 각자의 감정에 빠져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흩어져 서 있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 이유이지요. '영웅이라면 당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면으로 맞서는 조각이었으니까요.
|
|
| ▲ 로댕 〈칼레의 시민들〉 인물 디테일(부분) 오귀스트 로댕, 〈칼레의 시민들〉 부분 디테일. 따로 떼어 낸 작품도 만날 수 있다. |
| ⓒ 로댕 미술관(파리) |
<칼레의 시민들>은 여섯 개의 조각을 하나의 군상으로 설치할 수도 있고, 각각 따로 전시할 수도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이 작품은 청동으로 주조된 조각인데, 로댕의 사후 프랑스 정부가 관리하면서 최대 12점까지만 주조가 허용되었습니다. 전 세계에 있는 주조본들은 모두 '진품'으로 인정받습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이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서울의 삼성미술관 리움이 주조본을 소장하고 있어, 파리에 가지 않아도 로댕의 걸작을 직접 감상할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이 글은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을 통해 '도시를 버티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묻는 기록입니다. 작품 감상 경험이나 떠오른 장면이 있다면 댓글로 나눠주세요.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쿠팡 김범석의 12년 전 인터뷰, 지금 우리가 증명할 차례입니다
- '다리 절단해야 할 수도'... 암 수술 후유증, 나는 살아남았다
- 대통령이 너무 유능해 보이는 건, 그 누구에게도 좋지 않다
- 민주당의 '통일교 특검 할 결심' 배경엔 "대통령실 의중"?
- 영구집권 꿈꿨던 대통령, 지금 봐도 황당한 연설 내용
- 국가가 미룬 일 떠맡은 사람, 이들은 어떻게 '기적' 만들었나
- '해수부 부산시대' 열렸다... 청사 개청 환영 일색
- 학생부 시스템이 '일베' 용법 추천? 교육정보원 "교정 검토"
- "지방선거 코앞인데 '선거구 획정' 또 조용... 국회 책임"
- 민주 최고위원 후보들 "내가 이재명", 1인1표제엔 미묘한 이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