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과 내란 그리고 어느 오타쿠의 단상

이도영 2025. 2. 2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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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때문에 가려진 우리의 일상: 8주차]

정의당 서울시당 청년위원회는 앞으로 매주 1번 "계엄 때문에 가려진 우리의 일상"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계엄 이후로도 이어지고 있는, 또는 그 전부터 이어져온 수많은 일상들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고자 합니다. 가능한 다양한 필자를 모심으로써, 다채로운 목소리를 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혹시 글을 전하고 싶다면, 익명도 좋으니 언제든 연락 부탁드립니다.
더불어, 개별 필자의 의견이 본 위원회의 입장을 대변하지는 않음을 알려드립니다.

글쓴이는 로봇 애니메이션과 밴드 음악을 사랑하는 정의당 청년당원 이도영입니다. 혁명가와 거대로봇 파일럿이라는 꿈 중에 전자가 더 현실적인 것 같아서 진보정당에 입당했고, 지금은 사회운동·진보정치단체 ‘전환’에서 발행하는 웹진 <도모>의 편집장을 맡고 있습니다. <기자말>

[이도영]

 정의당 서울시당 청년위원회 계엄 때문에 가려진 우리의 일상 8주차. 계엄과 내란, 그리고 어느 오타쿠의 단상
ⓒ 정의당 서울시당 청년위원회
다소 피식할 법한 자기 고백이지만, 2024년 12월 3일 밤 국회로 건너가면서 가장 진지하게 들었던 생각은 민주주의나 사회에 대한 거창한 뭔가가 아니라 '오아시스가 한국에 안 오면 어떡하지'였다. 계엄이 있기 바로 전주에 오아시스 재결합 내한 공연 예매를 (심지어 꽤 괜찮은 순번의 스탠딩석으로) 광클과 새로고침을 거쳐 잡아내고 의기양양하던 차였기 때문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중년의 아저씨들이 탱크와 장갑차로 둘러싸인 이역만리 독재국가의 공연장에 와서 공연하기는 좀 그렇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랬다. 아무튼 내 티켓은 20만 원짜리 스탠딩 B석이었기 때문에.

개인의 자아 정체감을 형성하는 요소에는 아주 다양한 것들이 있을 테지만, 나의 경우에는 주로 '취향'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듯하다.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주로 로봇이 나오는 애니메이션('건담' '에반게리온' 같은)을 좋아한다. 프라모델과 피규어를 모으는 데에는 지금까지 몇백 정도를 태운 것 같다.

20만원짜리 오아시스 티켓을 PC방에 가서 잡고, 브로콜리너마저의 모든 앨범을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인디밴드와 모던록, 브릿팝을 좋아한다. 지금은 진보정당의 당원이고 모 사회운동단체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의 편집장 노릇을 하고 있지만, 가끔은 내가 사회운동이나 진보 정치에 대해 어떤 전망이 있어서 이 짓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일종의 '덕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레닌(소련의 혁명가), 아옌데(칠레의 사회주의 대통령), 뭐 이런 사람들은 좀 멋있으니까.

아무튼 이런 정체성들 - '메카 오타쿠' '락덕' '좌파 오타쿠', 뭐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런 정체성들을 총체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말은 '오타쿠'뿐인 것 같다. 그렇다. 아무래도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오타쿠다. 오타쿠라는 말에 얽힌 이미지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그리 좋게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것 같지만, 나는 좀 솔직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다들 좋아하는 취향 하나씩은 있잖아요).

계엄 이후 열린 광장에는 새로운 것들과 새롭지 않은 것들이 공존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고 또 놀라웠던 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했다는 점이었다.

8년 전의 박근혜 퇴진 운동을 다시 떠올렸을 때, 광장에 얹힌 신격화의 베일을 한 꺼풀 들추고 생각해 본다면 그 광장은 사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심지어 자신의 삶과 운동에 직결된 정체성 – 페미니스트로서, 성소수자로서, 비정규직으로서 – 을 이야기해도, "끌어내리고 나중에 합시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따위 반응이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것이 당시의 광장이었다.

물론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여의도에, 남태령과 한강진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성소수자이자 페미니스트로서의 혹은 노동자로서의 나를 무대로 불러왔다. 그곳에서 호명된 정체성 중에서는 '오타쿠'도 있었다.

무대에 선 수많은 발언자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열거하거나 혹은 발언에 녹여내면서 "저는 ~~ 오타쿠인 OO입니다"를 드러냈다. 그중에서는 아이돌 덕질을 하며 소중히 여기던 굿즈(심지어 꽤 비싸다)인 응원봉을 비바람 속에 가지고 나온 사람도 있었고,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등장인물의 명대사나 인디밴드 노래의 가사를 구호 삼아 외치며 호응을 이끌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나와 같이 굳이 내 덕질의 대상을 발언에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스피커로 울려 퍼질 때마다 혼자 웃으며 내적 친밀감을 다진 사람은 더욱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의 '서브 컬처', 혹은 조금 문법은 다르지만, 인디음악 문화 - 즉 주류 문화 콘텐츠와 구별되는 하위문화는 그 자체로 저항적 속성을 갖진 않지만, 주류 사회의 정서와 영합하지 않거나 때로는 그 정서에 반발할 수밖에 없는 하위문화의 특성 탓에 메인스트림 콘텐츠가 전면으로 다루지 못하는 사회적 문제의식들을 반영한다거나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에 반항하는 방식으로 저항성을 드러내 왔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 흔히 '안티페미 오타쿠 이대남'의 온상으로 손꼽히는 '루리웹'이나 오타쿠 정보 위키로 출발한 '나무위키' 역시 그 초창기였던 2000년대 중후반에는 진보 좌파적 담론들이 적잖이 받아들여지는 곳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진보정당이었던 사회당의 일부 당원들은 이 부분에 주목해 정당 사상 최초로 '덕후위원회'를 당내 조직으로 발족하기도 했다.

이들 커뮤니티가 우파 내지 안티페미니즘 성향으로 선회한 것은 2010년대 중반 페미니즘 리부트와 함께 이른바 'PC 비판'이 정치적으로 급부상한 이후였다. 대체로 남초에 가까웠던 이들 커뮤니티는 직관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혐오 정치에 영합하고 유사한 정서를 공유하는 '인벤' 등의 게임 커뮤니티 등과 결합해 오타쿠라는 단어의 대표성을 점유하면서도 안티페미니즘 혹은 우파적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유포하는 첨병으로 변화해 갔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좌파적 해석이나 진보정당에 대한 긍정적 서술이 용인되고 소수자에 대한 혐오성 서술이 최소한이나마 지양되던 '리그베다 위키'가 '나무위키'로 변하면서 '정치적 편향성 제거'라는 명목으로 해당 서술들이 제거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특정 손가락 모양을 온갖 곳에서 찾아내어 '좌파와 페미니즘이 게임업계를 지배했다'는 식의 음모론을 유포하고, 특정 사이트의 회원이거나 특정 성향을 갖는다는 이유로 성우나 일러스트레이터를 업계에서 매장하는 이들의 행태는 되레 편향과 반지성주의의 극단으로 진화했다고밖에 평할 수 없다.

평론가 김민하는 얼마 전 오타쿠들과 함께한 <좌파-오타쿠 정치는 가능한가?>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지금 2030 남성들이 커뮤니티에서 서브컬처를 즐기는 방식은 세상에 해롭고 의롭지 않다. (중략) 그러나 오타쿠가 다른 방식으로 서브컬처를 즐기고 그걸 공유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면서 오타쿠 문화에 대한 진보적·좌파적 담론을 더 많이 이야기하는 것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공동의 담론과 플랫폼을 통해 점진적으로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김민하의 말은 세상을 바꿔내고자 하는 모든 운동에 있어 해당되는 말이지만, 동시에 진보적인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삶과 취미 속에서 그 생각을 드러내지 못해 온 수많은 좌파-오타쿠들에게 던지는 뼈 있는 말이기도 하다.

오타쿠를 포함한 자기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이번의 광장이 더욱 반가웠던 이유는 그래서였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브컬처 담론의 주류를 이른바 '남초 안티페미 오타쿠'들이 차지하고 있다면 그렇지 않은 오타쿠들도 이곳에 있다는 것, 나는 계엄과 내란에 맞서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팔레스타인에 연대하지만 동시에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인디문화를 사랑하는 오타쿠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이 하나둘씩 늘어난다는 것.

그것은 서브컬처가 오랫동안 견지해 왔지만 어느 순간 우파적 이데올로기에 압도당해 버린 저항성과 진보성을 되찾는 기획의 첫 발자국이 될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정치 행위자로서 지금 진보정당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는, 이 광장에 나온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을 재조직하고 정치적 주체로 만들어내는 것만이 사회의 변혁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근본적 동력이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고 애니메이션을 보는 소중한 시간을 희생해 가며 광장에 나온 오타쿠들의, 서브컬처의 저항성과 역동성을 다시 이끌어내기 위해 지금 진보 정치와 사회운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지금보다 더욱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여전히 나는 <우주세기 건담 시리즈>가 운동권과 실패한 혁명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따뜻한 집에서 얼마 전에 사다 놓은 에반게리온 초호기 프라모델을 조립해야 하는데, 주말에 집회를 나오게 만드는 윤석열을 빨리 끌어내리고 싶은 애니메이션 오타쿠다. 올해 10월에 내한하는 오아시스의 공연이 다가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광장에 울려 퍼진 브로콜리너마저의 <졸업>("이 미친 세상에")을 들으면 가슴이 울리는 밴드 덕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는 계엄과 내란에 맞서 열린 지금의 광장에 나온 오타쿠들의 실천이 단지 이번 한 번의 실천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더 많은 오타쿠를 만나고, 이들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건담 이야기, 다른 누군가가 좋아하는 애니 이야기 그리고 정치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집에서 프라모델을 조립할 시간은 조금 더 줄어들겠지만, 원래 프라모델은 탑을 쌓아 놓고 가끔 하나씩 만드는 게 '국룰'이기 때문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의당 서울시당 청년위원회 블로그(https://justice21youthseoul.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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