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차고 넘친다, 당장 대학 입시를 폐지하자
[서부원 기자]
▲ 2023년 11월 16일 2024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한 고사장 |
ⓒ 대전교육청 |
'나쁜 사람이 나쁜 제도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나쁜 제도가 나쁜 사람을 만든다.'
수능을 한 달여 앞둔 지금 고3 교실은 더 이상 '교실'이라고 할 수 없다. 분명 시간표는 있는데, 교과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진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학사 일정에 맞춰 수업을 해도 집중해서 듣는 아이는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다. 고3이 더는 '균질한' 집단이 아니다.
"차라리 3학년 2학기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고3 교실엔 여러 종류의 수험생이 뒤섞여있다. 오로지 수능에 목매단, 이른바 '정시 파이터'와 논술과 면접을 준비하는 아이들 그리고 정원 채우기도 힘든 지방 사립대에 지원해 합격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하릴없이 소일하는 아이들이 따로 또 같이 지낸다. 대입 전형의 종류도 방식도 시기도 천차만별인 탓이다.
학교마다 교육과정을 편제할 때, 웬만해선 고3엔 상대평가로 등급을 산출하는 주요 과목을 개설하지 않는다. 내신과 수능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야 하는 고충을 덜어주려는 학교의 배려다. 공부하는 데 부담이 적은 절대평가 과목인 만큼 오로지 수능에만 매진하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고3 아이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 수업도 아니고, 자습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말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차라리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면 좋겠다는 아이도 있다. 마땅히 할 게 없는 아이들의 선택지는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뿐이다.
수업뿐 아니라 시험 때도 요지경이다. 고3 1학기 때까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결시생이 교실마다 넘쳐난다. 아파서 시험을 치를 수 없다고 이유를 대지만, 친구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2학기의 시험 기간에 맞춰 아픈 건, 고3의 '특권'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과목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50분의 시험 시간 중에 문제를 푸는 시간은 10분, 나머지 40분은 취침 시간이다. 코를 골며 자는 아이들 사이에서 시험 감독을 하는 게 데면데면할 지경이다. 힐끗 답안지를 보면, 문제를 푸는 아이보다 찍는 아이가 훨씬 많다는 걸 대번 알 수 있다.
"차라리 3학년 2학기가 아예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대입에 성적이 반영도 안 되는데, 굳이 시험을 치르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재수, 삼수를 불사한 '정시 파이터'들만 따로 모아 치르게 하면 안 되나요?"
아이들의 불만 가득한 반문에 "많이 힘들지?"라는 뻔한 위로로 답변을 대신한다. 물론,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쥐고 흔드는 현행 대입 제도가 수십만 아이들을 고통 속에 밀어 넣는 주범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어제오늘의 일이냐는 무력감에 모두 손을 놓고 있을 따름이다.
"대입 제도를 찔끔찔끔 손볼 게 아니라 아예 없애는 건 불가능할까요?"
한 아이의 도발적인 문제 제기에 뜨끔했다. 그는 할아버지 세대로부터 부모와 교사, 선배에 이르기까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만 되뇔 뿐, 대입 제도를 '고정 상수'로 여기는 게 의아했단다. '폭탄'을 제거할 생각은 하지 않고, 후대로 떠넘기는 모습이 무책임하다는 거다.
대입 제도를 없애자는 그의 말은 하소연에 가까웠지만, 시급하고도 유일하며 근본적인 해법이라는 생각에 무릎을 쳤다. 과거 모든 정부에서 대입 제도 개선을 비롯한 교육 개혁을 추진했지만, 용두사미에 그쳤거나 되레 개악되기 일쑤였다. 반복되는 교육 개혁의 실패와 좌절은 뭘 해도 안 될 거라는 집단적 무력감을 배태한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 점진적인 교육개혁은 여론의 완고한 '관성의 태클'을 이겨낼 수 없다. '혁명보다 개혁이 어렵다'는 건 이를 두고 하는 말일 테다. 역대 정부가 수십 년 동안 천착하고 시도해 온 대입 제도의 개혁이 실패했다면, 또다시 새로운 제도를 고안할 게 아니라 아예 없애는 게 옳다.
▲ 2018년 8월 수능 D-100일 '입시 거부' 퍼포먼스에 붙은 '대학 당연하지 X' 표어 |
ⓒ 투명가방끈 홈페이지 |
우선, 대학의 전공이 무의미해졌다. 대학에선 고등학교 진로 교육의 부실을 탓하지만, '제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행태다. 대학이 '지성인의 요람'으로 미래 사회를 선도하기는커녕 '취업 준비 기관'을 자임하는 참담한 현실을 자성해야 한다. 대학마다 경쟁적으로 도입하는 복수 전공제와 자유 전공제는 외려 전공이 무의미해졌다는 방증이다.
그렇다고 대학 졸업 후 취업이 보장된 시대도 아니다. 대학마다 취업률은 '도토리 키재기'이며, 최근엔 경기의 호황이나 불황과도 무관한 흐름을 보인다. 대학마다 '청년 창업 지원 센터'를 운영하는 건, 취업이 힘든 현실을 견뎌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죽하면, 대학의 문과 전공은 '로스쿨 계열'과 '비-로스쿨 계열'로 나뉘고, 이과 전공은 '메디컬 계열'과 '비-메디컬 계열'로 구분된다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일부 지방대학이 의대 유치에 목매단 것도, 대학 교육의 본령을 방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학은 '기업'이고, 학생은 '고객'이라는 말이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입학사정관제와 학생부종합전형의 총체적 실패에서 보듯, 아무리 선진적인 제도를 도입해도 '회수를 건너온 귤은 늘 탱자가 됐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다. 대입 제도는 수정과 보완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온 국민이 체득했다. 새로운 대입 제도가 도입될 때마다 쾌재를 부른 건 오직 사교육 시장뿐이었다. 매번 사교육을 위한 '빅 픽처'라는 말이 돌았다.
또, 대입 제도는 아이들의 차별적 사고를 강화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그들은 이른바 '입결'에 따라 줄 세우는 학벌 의식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다. 심지어 '민주주의란 합리적 차별 시스템'이라는 말까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서울과 지방, 명문대와 '지잡대'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달라야 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서울대, 연고대 이름이 적힌 '과잠'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게 꿈이라는 아이에게서 과연 공동체에 기여하는 학문적 성취를 기대할 수 있을까. 요즘 아이들의 학벌 의식은 간호사들을 향해 "그만 나대라"며 "그럴 거면 의대에 갔어야 한다"고 조롱하는 의사들의 그것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다.
무엇보다 현행 대입 제도는 공부에 대한 맹목적인 혐오를 부추긴다. 누구든 수능에 출제되는 과목만 공부하고, 나머지는 과감히 버린다. 생활기록부에 기재되지 않는 항목은 적성에 맞는 것이라도 대학 진학 이후로 유예된다. 대입에 필요한 교과 공부만 강제되다 보니 공부에 흥미가 생길 리 없다. 아이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공부하라"는 거다.
예컨대, 영어든 수학이든 공부를 하면 할수록 호기심이 생기고, 새로운 내용을 알아가는 재미에 빠져야 정상이다. 호기심은 질문을 낳고, 질문은 배움을 향한 기본적인 동력이다. 그런데, 수능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애지중지했던 교과서와 문제집을 분풀이하듯 찢고 버리기 일쑤다. 아이들은 책으로 '공부'한 게 아니라, 책과 '전쟁'을 벌여온 거다.
부작용? 지금보다 백 배 낫다
당장 대입을 폐지하자는 주장에 반론이 뒤따를 듯하다. 개중에는 귀담아들을 만한 합리적 주장도 적지 않을 테고, 심사숙고할 만한 대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대입이 폐지되면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 적잖은 혼선이 빚어질 테지만, 그 어떤 부작용도 지금의 대입 제도로 인한 온갖 반교육적 파행보다는 백배 나을 거라 장담한다.
요컨대, 지금껏 우리 교육은 '나쁜 제도가 나쁜 사람을 만든' 상황을 방치해 왔다. 나쁜 제도는 고쳐 쓰는 게 아니라 혁파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 몸에서 고름을 짜낸 자리에 새살이 돋듯, 나쁜 제도가 사라진 자리에 기필코 좋은 제도가 싹을 틔울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건, '더 늦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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