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리보다 과즙많고 단 '썸머킹', 나를 억대농으로 키운 여름 사과의 왕

여름사과 '썸머킹' 재배 과수원 햇빛농원의 정재화 농부
햇빛농원의 정재화 농부. /더비비드

매년 여름 장마가 끝날 때면 찾아오는 반가운 얼굴이 있다. 한여름의 녹색빛을 닮은 아오리 사과다. 한 입 베어 물면 나는 경쾌한 소리와 상큼한 과육의 조합은 무더위 속에서도 묵묵히 하루하루를 버텨온 것에 대한 작은 보상 같다. 특유의 풋풋한 맛 때문에 가을 사과보다 아오리 사과를 선호하는 이도 있다.

‘썸머킹’은 아오리 사과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 여름 사과다. 아오리 사과와 외양은 닮았지만 과즙이 더 풍부하고, 더 일찍 수확할 수 있어 성질급한 소비자에게 제격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에서 38년째 사과를 키우고 있는 햇빛농원의 정재화 농부(68)를 만나 여름의 왕 썸머킹에 관해서 들었다.

◇아오리 사과보다 한 달 일찍 찾아온 여름의 왕

햇빛농원에서 썸머킹이 탐스럽게 맺힌 모습. /더비비드

경북 영주시는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풍부해 당도 높은 사과가 자라기 좋은 환경이다. 공기가 깨끗하고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의 영향으로 이 지역에서 생산한 사과는 맛과 향이 뛰어나다. 그 중에서도 영주의 햇살을 잔뜩 머금은 여름 사과 아오리와 썸머킹이 인기다.

썸머킹은 농촌진흥청이 아오리라 불리는 쓰가루 품종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한 초록 사과다. 식감은 아삭아삭하고 과육은 달콤하다. 아오리보다 껍질이 얇아 껍질째 먹어도 부담이 없다. 7월 중순부터 수확을 시작해 8월 중순까지 출하된다.

◇사과 재배 경력만 38년

정재화 농부는 38년동안 사과를 재배한 베테랑이다. /더비비드

정재화 농부는 영주에서 나고 자랐다. 한때는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하지만 꿈꿔왔던 삶과 거리가 멀었다. 1980년대 중반 고향으로 내려와 부모님에게 농사를 배웠다. 그 후로는 사과 농사 외길만 걸었다. 현재 5000평(1만6528㎡) 규모의 땅에 1200~1300그루의 나무를 키우고 있다. 키우는 사과의 종류만 10가지다.

- 서울 생활을 하다가 왜 다시 돌아왔나요.

“그 당시 농사를 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이 있어서 객지로 떠났는데요. 도시 생활이 더 나은 건 아니더군요. 월급만으론 생활이 빠듯했거든요. 그러다 1980년대 중반부터 사과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부모님이 사과 농사를 짓고 계셨습니다. 1000평(3305㎡)정도의 땅과 영농후계자 자금을 지원받고 농민의 길을 걷게 됐죠. 벌써 40년 가까이 됐네요.”

- 여름 사과 재배과정이 궁금합니다.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전에 퇴비를 뿌려 둡니다. 땅이 얼면 나무가 활동을 중단하는데요. 2~3월부터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면 뿌리가 활동을 시작해요. 그때 뿌리가 미리 뿌려둔 퇴비의 영양분을 빨아들이죠. 그렇게 4월 20일쯤 되면 사과 꽃이 핍니다. 올해의 경우 꽃이 몇 주 일찍 펴서 긴장했습니다. 냉해를 입을 우려가 있거든요. 개화 후 30일 정도 후부터 열매가 맺힙니다. 이때부터는 적과를 해야 합니다. 적과란 열매 중에서도 튼실한 것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솎아내는 작업입니다. 그렇게 해야 남은 하나가 영양분을 충분히 흡수해 튼튼하게 자라거든요. 이후 여름 사과는 120일 정도, 가을 사과인 부사는 180일 정도 키운 후 수확합니다.”

그는 시기별로 사과의 품종을 달리해 에너지를 분배한다. /더비비드

- 아오리와 썸머킹은 어떻게 다른가요.

“생산자 입장에서 썸머킹이 더 키우기 좋습니다. 수확시기가 빠른 조생종이라 영농 기간이 짧고, 그만큼 병충해에 강하죠. 시중에 유통해도 될 정도로 과실이 익는 시기를 농부들끼리 ‘숙기’라 하는데요. 썸머킹은 아오리보다 숙기가 빨라 손이 덜 가요. 상품성은 더 좋은데 농부의 노고를 덜어주니 효자 품목이죠. 소비자분들은 썸머킹이 아오리보다 신맛이 적고 단맛이 풍부하다고 좋아합니다.”

- 출하 시기별로 품종을 달리해서 사과를 키우면 무엇이 좋은가요.

“가을 사과만 키우면 특정 시기에 일이 몰려서 너무 힘들어집니다.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분배하기 위해 출하 시기별로 품종을 분배해요. 아오리나 썸머킹 같은 여름 사과는 전체 생산량의 20% 정도 키웁니다. 저의 역량을 스스로 가늠해서 1년 생산 계획을 짜는 것도 노하우라면 노하우죠.”

맛있게 익은 수확 직전의 썸머킹. /더비비드

- 여름 사과 재배 시 무엇에 주안점을 두나요.

“충분한 물과, 적당한 온도입니다. 일정 주기에 따라 하루에 여러 번 물을 줍니다. 땅의 입자가 거친 사질토는 2시간 간격으로, 흙의 입자가 고운 점질토는 3~4시간 간격으로 물을 공급하죠. 온도도 중요합니다. 온도가 5도 이하로 떨어지면 땅이 얼어서 동해(凍害)를 입어요. 동해 발생시 좀이라는 병에 노출되기 쉽습니다. 기온이 갑자기 떨어질 것 같을 땐 선제적으로 약을 뿌려 큰 피해를 막아야 합니다. 너무 더워도 문제에요. 기온이 높을수록 당도가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기온이 30도 이상을 넘어가면 성장을 멈춥니다.”

- 보통 일이 아니네요. 농부 인생 중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셀 수 없이 많지만, 가장 두려운 건 역시 자연 재해인 것 같아요. 1987년 슈퍼태풍 셀마가 말 그대로 과수원을 초토화시켰습니다. 말 그대로 폐허가 됐어요. 귀농한 지 얼마 안됐을 시점이라 그때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정부의 대책과 재해보험으로 일부 보전 받았지만 택도 없었어요. 그 해 소득이 반토막 났죠.”

◇사과 전문 유통센터, GAP 인증 농가만 가입 가능

(왼쪽부터) 풍기농협APC의 전경, 공판장에서 경매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 /더비비드

열과 성을 다해 키운 사과는 풍기농협 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로 보낸다. 사과 꼭지만 손질해서 보내면 번거로운 선별과 유통 작업을 APC가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풍기농협 APC는 여름에는 썸머킹과 아오리, 가을에는 홍로, 겨울에는 만생종인 부사를 주로 취급한다. 사과 가격 관리차원에서 공판장도 운영한다.

사과, 인삼 재배 경력 35년의 풍기농협 이인찬 조합장. /더비비드

풍기농협 APC는 농산물우수관리(GAP) 인증 농가에만 공선회 자격을 부여한다. 약 400곳의 공선회원 모두가 GAP 인증 농가로, 전국 최대규모다. 깐깐한 품질 관리와 체계적인 시스템 덕에 2023년 474억원의 사과판매 매출을 냈다. 한 해 여름사과 취급 물량은 200t 정도로, 매출로 환산하면 9억원 수준이다. 7월 중순 썸머킹을 시작으로 8월 말까지 매일 하루 4~5t의 여름사과가 APC에 입고된다. 사과, 인삼 재배 경력 35년의 풍기농협 이인찬 조합장(62)과 질의응답을 했다.

- 사과 입고부터 출고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입고된 사과는 비파괴 당도선별기를 거칩니다. 보통 13브릭스(brix)이상을 고당도로 분류해요. 이후 육안 선별을 통해 상품성이 떨어지는 흠과를 걸러냅니다. 그 다음엔 크기별로 자동 선별해요. 사과의 크기 단위는 ‘과’인데요. 숫자가 작을수록 과실이 큽니다. 가장 보편적으로 유통되는 여름 사과는 6과(215g), 7과(190g)입니다. 크기별로 분류해 포장한 사과는 하나로마트, 홈플러스 등의 대형마트와 온라인 플랫폼에 유통합니다. 통상 입고 후 5일 안으로 판매하는 걸 원칙으로 해 신선합니다.”

풍기농협 APC에서 사과 선별 작업을 하고 있다. /더비비드

- 풍기농협 APC 센터만의 특장점이 있다면요.

“저희 센터는 2003년 전국 최초로 사과 GAP 인증 조직으로 선정됐습니다. 농산물 이력추적제를 통해 사과 생산부터 유통까지 전 단계를 추적할 수 있어요. 일종의 품질 보증 수표인 셈이죠. 2002년 전국 최초로 도입한 세척사과도 있습니다. 세척 후 껍질째 먹을 수 있는 사과를 최초로 도입해 호응을 얻었습니다. 칼슘 농법으로 키운 칼슘사과와 GAP 고당도 사과도 풍기농협의 자랑거리입니다.”

- 요즘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은요.

“영주시와 손을 잡고 ‘1등 프로젝트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크기가 큰 3, 4, 5과 중에서 A급 등급 사과를 생산한 농가에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입니다. 좀 더 좋은 사과를 APC에 출하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시작한 사업인데요. 이 사업을 통해 영주 사과의 경쟁력을 높이려 합니다.”

◇순익 1억원 넘는 ‘억대농’의 비결은

정 농부는 매년 1억2000만원의 순익을 거둔다. /더비비드

38년간 사과 외길만 걸어온 선택은 사과보다 달콤한 결실로 돌아왔다. 2008년 농촌진흥청에서 상을 받은 데 이어 같은 해 영주시 사과 품평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근면 성실함은 그를 억대농으로 만들었다. 매년 1억5000만원의 매출이 발생한다. 퇴비와 농약값, 인건비로 매출의 20%를 쓰면 1억2000만원의 순익이 남는다.

도시의 지인들은 모두 은퇴한 나이, 그는 여전히 한여름에도 과수원을 찾는다. 요즘처럼 무더위가 닥치는 시기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제초 작업을 하고 오전 10시까지 일한다. 열기가 기승을 부리는 낮 시간엔 잠깐 쉬다가 오후 5시 30분쯤 다시 사과 밭을 둘러보며 잡초를 뜯고, 3년 안팎의 어린 나무들이 수평 모양으로 자라도록 손질하는 유인 작업을 한다. 매일 오후 7시 30분에 그의 여름 일과가 끝난다.

그는 땅은 속이지 않는다고, 한 대로 거둔다고 강조했다. /더비비드

- 억대농이라니 대단하네요. 기나긴 농부 인생을 돌아본 소회는요.

“힘들죠. 직장을 다녔으면 더울 때 에어컨 아래에서 시원하게, 추울 땐 따뜻한 환경에서 일할텐데 농사는 정반대입니다. 태양과 싸워서 이겨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죠. 처음 귀농했을 땐 너무 힘들었어요. 좋아서 시작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얼굴이 늘 새카맣게 타 있어서 직장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면 괜히 주눅이 들었습니다. 몸무게가 10kg까지 빠졌죠. 인고의 시간을 버티고 나니 지난 시간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다. 저는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긴 시간 농사를 하며 깨달은 게 있어요. 땅은 속이지 않아요. 열심히 한 대로 거둡니다. 억대 소득은 최선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 농부님에게 사과란 어떤 의미인가요.

“사과란 자식 같은 존재입니다. 둘 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농사를 하다 마주한 자연 재해는 피할 수가 없잖아요. 자식 키우다 생기는 여러 상황도 비슷하고요. 하지만 저는 안되는 것에 목매지 않아요. 항상 기쁜 것도 아니고, 항상 예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보살피고 관심을 가져줘야 합니다. 사과 농사나 자식이나 제가 살아갈 이유니까요.”

/진은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