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첫날밤에 "예수는..." 설교 한 이 남자 [정진동 평전]

박만순 2024. 10. 1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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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동 평전] 결혼과 처가 식구 이야기

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 가족사진 신혼시절의 정진동 조정숙 부부. 아기는 첫째 딸 정광옥.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신부 입장"과 동시에 풍금 소리가 울렸다. 하얀 면사포를 쓴 천사 같은 조정숙이 예식장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만 열아홉 살 신부는 기쁜 마음보다는 쑥스러움이 앞서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청원군 강내면 다락교회에 꽉 들어찬 하객들이 전부 자신을 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락교회(1912년 10월 10일~)가 만들어진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락교회 교인들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다락리 딸부잣집 조춘흥 맏딸이 신식 결혼한다는 소문을 듣고서였다. 당시 대부분은 전통 혼례로 식을 올렸는데, 신식 결혼을 한다니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킬 만했다.

특히 꼬맹이들이 신났다. 친구 순형(당시 다섯 살)이 언니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예식 한 시간 전부터 교회에 입장했다. 맨 앞줄에 옹기종기 앉아 있던 꼬맹이들은 정작 식이 시작되기 직전 뒷줄로 밀렸다.

"여기는 신랑·신부 가족들이 앉는 곳이여"라며 뒷줄로 쫓겨났다. 꼬맹이들은 깨금발을 하고 천사 같은 신부와 멋진 신랑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담임목사의 주례사와 축하 노래 등이 이어졌고, "신랑·신부 행진" 소리에 꼬맹이들이 주먹에 움켜쥔 꽃가루를 날렸다.

첫날 밤의 설교

정진동과 조정숙이 다락리 주민들의 축하 세례를 받은 때는 전쟁의 참화가 가시기 전인 1954년 10월이었다. 신랑신부의 첫날 밤은 세인들의 관심거리였다. 볼거리, 오락거리가 없고, 라디오도 전무 했던 시절 신랑신부의 첫날 밤 구경은 최고의 흥밋거리였다.

'북' 하는 소리와 함께 신혼 방 문종이가 여기저기 뚫렸다. 잔뜩 기대를 했던 마을 여성들은 1시간째 동그란 눈을 뜨고 방안을 살펴봤지만 어떠한 진척(?)도 없었다. 개다리소반에 전과 떡, 과일, 약주가 있었지만 신랑신부 누구도 입에 대지 않았다. 둘 다 크리스찬이라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기름진 음식에도 젓가락질을 하지 않았다.

신랑 정진동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종이 잡히지 않았다. 결혼 전 연애 경험도 없었고, 당시 성교육이란 듣도 보도 못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결혼식 며칠 전 어머니한테 첫날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충 들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었다. 사실 말하는 어머니나 듣는 아들이나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때 어머니한테 자세히 들을 걸' 하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그렇게 또 몇 시간을 보냈다. 정진동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여보"라며 시작한 그의 말은 사랑의 속삭임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었다. 그의 말은 긴 설교였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집이(둥지) 있는데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성경을 읽고 설교를 했다. 구체적으로는 "당신은 나를 선택하여 결혼을 했는데, 나는 목사가 되어 예언자의 길을 가야 할 것이오. 그 길은 배고프고 박해받는 힘든 고생길인데 함께 가야 하오." 이렇게 일방적인 생각을 털어놨다.

"예수는 집도 월급도 없이 혼자 몸으로 평생을 민중과 함께 사시다가 민중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의로운 분이오, 나는 그 예수의 뒤를 따를 제자로서 이제 당신과 함께 그 힘든 고난의 길을 가야 할 운명에 처했소"라고 설교를 길게 했다. 그리고 나는 첫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 정진동, <저 평등의 땅에>, 1992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신랑의 모습이다. 첫날밤 아내를 상대로 긴 설교를 하는 사람(목사)이 또 있을까? 정진동이 언제부터 민중 선교의 사상이 형성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대한신학교 1학년 때인 1954년도에 결혼하면서 이미 자신의 가치관·신앙관이 명확히 형성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거창하게 민중신학이랄 것은 없지만 성경을 통해 민중의 삶을 산 예수를 만났고, 그의 제자로써 평생을 살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한 것이다.

강행군
▲ 다락교회 정진동이 결혼식을 올린 다락교회 현재 모습.
ⓒ 박만순
"너무나 훌륭한 신랑감이 있습니다"라며 다락리 조춘흥(1911년생) 집 사립문을 들어선 이는 같은 마을 이관옥이었다. 그는 다락교회 집사이면서 늦깎이로 청주 성경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누군데?"라고 묻는 조춘흥의 말에 이관옥은 눈을 반짝이며 입을 뗐다.

"제가 다니는 학교의 동기인데, 사람이 훤출하고 똑똑합니다"라며 입에 침이 마르게 정진동을 칭찬했다. 조춘흥의 옆에서 귀를 기울이던 그의 아내 박금순(1911년생)도 호기심이 동했다.

"우리야 뭘 아나? 이 집사가 추천하면 어련히 훌륭한 신랑감 이려구." 남편의 대꾸에 아내 박금순도 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신학교를 나오면 후에 목사가 되는 것인데, 그녀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윗감이었다.

중매인 이관옥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정진동은 마음이 급해졌다. 사실 자신이 이런저런 형편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이전에 몇 차례 선을 보았지만 소도둑처럼 생긴 자신의 외모와 별 볼 일 없는 자신의 경제적 처지를 보고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특히 6대 독자라는 것이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그런데 일차 관문을 통과했다니 신이 났다.

공식적인 선을 보기 위해 다락리로 가기로 했다. 예비 신부와 장인·장모를 보는 자리이기에 부담 백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바지와 구두를 빌리고 이발을 하느라 정신없을 텐데 자신은 그 정도의 여력도 되지 않았다. 헌 옷이지만 깨끗이 빨아 입었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선을 봤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2차 관문도 무난히 통과했다. 두 살 아래의 조정숙도 싫지 않은 눈빛이었다.

선을 본 것이 약혼 아닌 약혼식이 돼버렸다. 1954년 봄에 결혼 승낙을 받은 정진동은 여름 내내 다락리를 찾았다. 물론 당시에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기에 주말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한 달에 두 번꼴이었다.

금요일 야간수업을 마친 그는 경부선 하행선 심야 열차에 몸을 실었다. 전동역에서 내려 35리(14km)를 걸어 청원군 옥산면 호죽리로 갔다. 다음 날 다시 강내면 다락리를 향해 걸었다. 뚜벅뚜벅 걷는 정진동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40리 가까이 되는 거리(14.7km)였지만 멀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온데간데없는 씨암탉

다락리에 가면 예비 장모가 환히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예비 사위가 반가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박금순이 정진동을 반갑게 대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토요일에 와 하룻밤을 자고 다락교회서 주일 예배를 드릴 때 예비 사위가 설교를 했기 때문이다.

다락교회에는 상주하는 담임목사가 없었기에 신학교에 다니고 있던 정진동에게 일요예배 설교 기회를 준 것이다. 예비 사위가 설교를 하니 박금순 마음이 뿌듯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매불망 보고 싶은 정숙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상긋상긋 웃는 예비 처제들이 그를 반겼다. 당시 16세의 정순이부터 순옥(10세), 옥순(8세), 순형(5세)이었다. 사실 처제가 될 여성으로 보이기보다는 여동생 같았다. 특히 막내 순형은 자신과 16세나 차이가 났기에 조카뻘이나 다름없었다.
▲ 조정숙 생가 터 정진동의 아내 조정숙 생가 터. 사진은 조정숙의 막내여동생 조순형.
ⓒ 박만순
다락리에 도착한 정진동은 예비 처제가 될 아가씨 넷을 데리고 뒷산에 올랐다. 다락리 샛뜸(윗뜸)과 용독골 사이에 있는 동산 위에는 너른바위가 있다.

그곳에 올라서면 충북 음성군에서 발원해 충북 서부지역을 거쳐 금강으로 흐르는 미호천이 한눈에 보인다. 미호천을 바라보며 미래의 형부에게 배우는 노래는 신이 났다. 당시 조순형이 율동과 함께 배운 노래는 <금빛 같은 보리밭> <앵두가 익었어요> <송아지> 등이다. 다음은 <금빛 같은 보리밭>의 가사 일부다.

금빛 같은 보리밭 보리밭 보리밭 / 금빛 같은 보리밭 바람맞네 / 척척척 척척척 보리를 묶어서 / 하나님의 아이야 거두어라

정진동이 긴 팔로 보리를 묶는 시늉을 하며 부르는 노래에 순형과 언니들은 깔깔깔 웃으며 따라 했다. 정진동이 신학교에서 배운 노래와 율동을 다락리 너른바위 위에서 가르쳤다. 순형과 언니들은 친오빠 같기도 하고 삼촌 같기도 한 예비 형부와 함께 즐거운 여름 한 철을 보냈다.

너른바위에서 신나게 놀다가 집에 온 순옥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아빠가 부엌에서 씨암탉의 털을 벗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어보나 마나 정진동에게 줄 음식이었다. 침을 꿀꺽 삼킨 순옥은 '내일 아침엔 씨암탉 국물이라도 구경하겠구나' 하며 잔뜩 기대에 들떴다.

그런데 웬걸 다음날 씨암탉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국물도 없었다. 엄마가 밤에 예비 형부에게만 씨암탉을 준 것이다. 정진동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릇을 비웠다.

1954년 여름 정진동이 다락리에 열두 번 가는 동안 박금순의 정진동 사랑은 계속됐다. 당시에 구호물자인 밀가루로 빵을 만들었는데, 그 속에는 팥소가 없었다. 그런데 박금순은 정진동이 올 때마다 귀한 팥으로 소를 만들어 찐빵을 대접했다.

그러는 동안 정진동과 조정숙은 연애다운 연애 한번 해 보지 못했다. 둘만의 시간을 가져본 적도 없으니 손을 잡거나 산책을 해 보지 못함은 당연하다.

연극

1954년 10월 강내면 다락리에서 신식 결혼을 한 정진동은 아내를 가마에 태우고 호죽리로 향했다. 정진동의 장인 조춘홍도 후객(後客)으로 뒤를 따랐다. 당시에 신부 집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신부 측 가족이 신랑 집까지 동행한 것을 후객이라고 했다. 옥산면 호죽리 도람말 사위 집에 도착했을 때 조춘흥의 얼굴색이 변했다.

가난이 물씬 묻어나는 초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당시나 이후에나 사위 집의 첫인상에 대해 말하거나 서운함을 드러낸 적은 없다. 이는 그의 평소 심성이 누구에게 듣기 싫은 말을 하거나 해코지를 하지 않는 탓이다.

그의 평소 심성은 사위를 맞기 4년 전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조춘흥은 이OO집 근방에서 소리를 질렀다. "영섭(가명)이는 양동이 물을 문 입구에 붓고, 철민(가명)이는 지붕에 쏟아부어. 영자 엄마랑 순희 엄마는 물 좀 떠오고!" 마치 10여 명이 불 끄러 오고, 조춘흥이 일사불란하게 화재진압을 진두지휘하는 것 같았다.

정작 이OO 집에 불 지른 이들이 다급해졌다. 방화범은 같은 마을 사람들로 지방 좌익이었다. 이들은 마을 이장을 하고, 넉넉하게 사는 이OO을 반동으로 규정했다. 집에 불을 지르고 주인장인 이OO이 문밖으로 나오면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조춘흥과 이웃 사람들이 한꺼번에 화재를 진압하려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뺏다. 그런데 사실은 그 자리에는 조춘흥밖에 없었다.

그는 마치 여러 사람이 와서 불을 끄는 것처럼 연극을 벌인 것이다. 같은 마을 사람끼리 집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50년 7월 중순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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