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펍 크롤링' 성지로 떠오른 이곳의 매력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 기자]
"(서울에) 아파트를 많이 지었지만 사이에 그런 공간들이 많이 남아 있잖아요. 이 공간이 문화적으로 어떤 공간인지를 지금 정의하고 있는 것 같아요 ... (도시 정체성을) 문화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우리가 실험실 같은 느낌? ... 자기네들이 역사책에서 읽었던 도시 문화가 정의되는 그 시기? ... 서울에 오면 ... 재미있을 거 같아요." - 유튜브 '셜록현준' 중 조승연 작가
사이버펑크, 스태거를 나와 서울 성수동 풍광을 바라보며 이 단어가 맴돌았다. 시골 읍내에서나 볼 법한 낮은 건물들과 허름한 간판, 붉은 벽돌의 빌라를 비추는 희미한 전등 뒤로 화려한 불빛을 촘촘히 내뿜고 있는 마천루의 모습은 초현실적이지만 익숙한 조화였다.
어릴 적 성수동은 작은 공장이 즐비한 어두운 공간이었다. 저녁이 되면 골목 사이를 비추는 노란 전등과 도시 위를 관통해 덜컹덜컹 달리는 전철은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가끔 칠흑 같은 그곳을 걸으며 빨리 밝은 구의동 테크노마트가 나오길 바랐던 감정이 여전히 남아있다.
유튜브 '셜록현준'에 출연한 조승연 작가는 지금 서울에 오는 세계적인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20세기 초 뉴욕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을까 추측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 형성하는 불협화음은 이미 성숙을 마친 미국과 유럽의 도시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라 책에서만 접했던 그것을 현재 서울에서 볼 수 있을 거라는 의미였다.
내가 성수동 밤거리에서 사이버펑크 도시를 떠올렸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흔적이 남아있는 작은 빌딩과 상가 그리고 빌라 뒤로 우뚝 솟아있는 고층 빌딩들에서 받은 느낌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미래 도시와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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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은 사라진 이태원 크래프트 펍 사계 |
| ⓒ 윤한샘 |
펍 크롤링은 한정된 시간에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펍들이 공간적으로 밀집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맥주를 마시는 행위를 넘어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정체성과 문화도 존재해야 한다.
최근 성수동이 펍 크롤링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공간적 정서적으로 즐길 만한 맥주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는 뜻이다. 성수동 이전 펍 크롤링으로 유명했던 곳은 서울 신사동 가로수 길과 이태원 경리단 길이었다. 15년 전 신사동과 이태원은 작은 펍들이 각자의 개성을 내뿜는, 대한민국 맥주 문화의 두 축이었다.
가로수 브루잉, 밴드 오브 브루어스, 미켈러 바, 신사 퐁당, 펑키 탭 하우스, 크래프트 브로스는 강남 펍 크롤링을, 사계, 메이드인 퐁당, 사우어 퐁당, 파이루스, 더부스, 스킴 45, 맥파이는 이태원 펍 크롤링을 상징하는 펍들이었다.
이런 펍들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를 해석하고 전파하는 청년세대였다. 주위에는 작고 개성 있는 카페와 소호 숍들이 공존했다. 이들은 기존의 공간을 재해석하고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며 상권을 형성했다. 하지만 신사동과 경리단길 모두 젠트리피케이션 이슈를 겪으며 모든 것이 사라졌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사라졌던 펍 크롤링 바람이 성수동을 중심으로 다시 불고 있다는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주목해야 할 트렌드다. 성수동이 펍 크롤링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맥주 문화가 정착됐다는 뜻이기도 하고 더불어 과거 신사동과 이태원에서 경험했던 젠트리피케이션 경종이 울리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혹자는 이미 대기업 브랜드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성수동이 새로울 것 없는 관광지가 되었다고 이야기하지만 맥주 문화 관점에서는 아직 다채롭고 신선한 것들이 남아있다. 공간적으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문화적으로 관통하며 맥주로 공존하는 공간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성수동이라는 도시 정체성을 바탕으로 이른바 K 문화를 이해하는 단서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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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몽야몽 성수 내부 모습 |
| ⓒ 윤한샘 |
10여 년 전만 해도 뚝섬역 주위에는 작은 공장과 사무실 그리고 노포들이 있었다. 7번 출구에서 시작된 골목에는 오징어불고기, 불고기 백반, 전주식 콩나물국같이 지역 직장인을 위한 음식점들만 볼 수 있었다. 그나마 알려진 장소가 맥주 재료를 판매하는 서울 홈브루와 맥주 양조 공방 브루 5150이 있었던 8번 출구 건너편 성수 고깃집 골목이었다.
저녁이면 어두컴컴했던 뚝섬역 골목에 지금은 소소하지만 밝은 불빛을 내는 카페와 이자카야, 프랜차이즈 맥줏집들이 들어서고 있다. 낮은 임대료를 바탕으로 기존 공간을 재창조한 크래프트 펍들도 조금씩 눈에 띈다. 여기서부터 투어를 시작하려 한다. 뚝섬역부터 성수역까지 걸어가며 맥주 문화를 밝히고 있는 공간을 탐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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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이가 우주를 구한다 |
| ⓒ 윤한샘 |
이곳에서 고른 맥주는 서대문에 있는 브루어리 304의 '고양이가 우주를 구한다.' 밝은 황금색에 불투명한 뉴잉글랜드 인디아 페일 에일(IPA) 스타일의 이 맥주는 오렌지,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 향을 갖고 있다. 고양이가 우주를 구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창밖 지붕 위에 있는 고양이들은 성수동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것은 변해도 터줏대감 고양이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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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메이징 브루잉 컴패티 성수 전경 |
| ⓒ 윤한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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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털보직원이 양조한 그때 그IPA |
| ⓒ 윤한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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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브루어리 성수 |
| ⓒ 윤한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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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일블루닷IPA |
| ⓒ 윤한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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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태거 내부 |
| ⓒ 윤한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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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태거에서 마신 미스터리IPA |
| ⓒ 윤한샘 |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젊은이들이 혼자 또는 둘이 들어온다. 화려한 성수동보다 맥주 한 잔을 두고 소박한 성수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성지처럼 보였다.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세대에게 모던함은 오히려 재미없다는 듯 정돈되지 않은 분위기와 불편한 의자를 즐기고 있었다.
문화적 다양성 충만한 공간으로 지속되길
문밖을 나서며 낮은 건물들 뒤로 초고층 빌딩이 함께 있는 조합을 계속 볼 수 있기를 기원했다. 키치함과 화려함, 양극단을 모두 품고 있는 모습이 성수동의 매력이 아닐까. 우리는 이런 부조화의 매력을 즐기려고 골목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야생에 문화는 없다. 문화는 사람이 있어야 존재한다. 외형은 허름하지만 내면에 인간의 숨결이 아직 남아있는 성수동이 신사동과 이태원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작은 맥주 펍부터 고급스러운 펍이 공존하는 도시로 남아있기를. 다채로운 맥주로 문화적 다양성이 곳곳에 깃들어 있는 공간이 지속되길 바라며, 펍 크롤링을 떠나보자. 바로 지금!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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