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진보정치, 아래로부터 다시 시작하자 [소셜 코리아]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홍명교]
▲ 당헌 개정 및 재창당 결의안 채택 등의 안건을 논의하기 위해 17일 국회에서 열린 정의당 당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 정의당 |
그러나 90년대 후반 국민승리21부터 민주노동당, 그리고 최근 복수의 진보정당 시기로 이어진 진보정당 1기가 실패로 귀결된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매듭지어진 바 없다. 다수파의 횡포, 사상적 차이, 의원단에 대한 중앙당 통제의 상실, 당원 민주주의의 과소 등 많은 원인 분석이 쏟아졌지만, 견해의 차이를 넘나드는 소통은 부족했다. 한편, 진보정당 평당원이나 지지층과 활동가 집단 사이의 평가 거리 역시 크게 벌어졌다.
이처럼 활동가·정치인 집단 내 인식, 정치인과 대중 간 인식이 모두 이완되면서 논의 역시 공회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 실패를 충분히 진단하고 애도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통진당 때부터 실용주의 노골화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오늘날 세계가 "'시장경제'를 가진 시대에서 '시장사회'를 이룬 시대로 휩쓸려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대 정치의 위기 역시 '시장화'와 '세계화'라는 세계적 문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정의당은 태생부터 기성 정치의 장에 깊숙이 빠져들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성 정치가 맞닥뜨린 정당정치의 위기를 공히 마주하고 있다. 정의당 지지층의 불만은 이런 총체적 위기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구체적으로 따져보자. 유일한 원내 진보정당인 정의당은 문재인 정부 시기 조국 사태 국면에서 기회를 잃고 당내 이견들이 반복적으로 충돌하면서 회생과 혁신의 모멘텀을 잃어버렸다. 대중과 미디어의 이목이 쏠렸던 '조국 사태' 시기가 선거법 개정 논의와 맞물리면서 정의당 주류는 여지없이 정치적 실용주의에 입각해 판단했는데, 이 때문에 정의당의 성격에 대한 발본적인 의구심이 싹텄다.
당시 지도부는 선거법 개정과 조국 장관 임명 동조 입장을 거래한다는 정치적 계산이 왜 당 전체를 총체적 위기로 몰고 갔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제도 정치판에서 벌어질 수 있는 흔한 실수 중 하나로 여겼을 뿐이다.
▲ 2011년 12월 5일 당시 통합연대 심상정, 민주노동당 이정희, 국민참여당 유시민 대표가 국회에서 수임기관 합동회의를 갖고 3자 간 통합을 공식 결의한 뒤 손을 맞잡고 있다. |
ⓒ 남소연 |
진보진영의 정치적 실용주의가 노골화된 시점은 2007년 민주노동당 분열 이후 통합진보당으로 재편이 이뤄지던 때다. 2011년 말 심상정·노회찬 등 간판 정치인과 진보신당 이탈그룹(새진보통합연대), 민노당 내 자민통 계열 그룹들은 유시민 등 친노성향 국민참여당과의 합당을 통해 교섭단체 진보정당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갖고 창당한다.
통진당 강령은 민노당·진보신당이 갖고 있던 좌파적·사회운동적 성격을 제거했고, 현재 민주당 강령이 담고 있는 내용과 다르지 않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불과 2개월 후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부정경선' 사태를 겪으면서 파국을 맞는다.
그해 가을 자민통 계열 중 인천연합 다수와 심상정·노회찬계, 참여계가 함께 창당한 정의당은 혼종적인 정치 경향을 아우른 정당으로 출발했다. 이후 정의당 핵심인사들은 공공연하게 "운동권 정당이 아닌" 혹은 "헌법 내 진보"라는 논법을 구사했다. 민중운동이 특별히 '운동권만의 정치'나 '초헌법적 진보'를 구상하거나 실천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논법은 정의당을 사회운동으로부터 벌려놓는 효과를 낳았다.
문제는 실용주의 자체가 아니라, '이념'에 대항하는 '실용주의'의 강조다.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념에 대비하는 실용을 누차 강조한 바 있는데, 이러한 논리 구조는 정의당 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 지난 6월 12일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등 논의를 위한 정의당 전국위원회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심상정, 배진교, 강은미 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있다. |
ⓒ 연합뉴스 |
위의 진단에 대해 다수파는 크게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당내 최대 정파인 '비상'(소위 NL인천연합 내 주류그룹)은 이례적으로 발표한 평가 문건에서 촛불 이후의 안이한 현실 인식(더불어민주당을 오른편, 정의당을 왼편으로 하는 정치구도로 국민의힘을 고사시킨다는 전략), 당 시스템의 붕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통한 교섭단체 구성에 심취한 과도한 비례후보 전술 등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
그러면서 조국 사태 당시 검찰개혁에 방점을 찍고 연동형비례대표제 도입에 사활을 걸었던 것을 "연합정치를 진보정치의 활로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옹호한다.
이러한 입장은 조국 사태 당시 정의당이 안이하게 조국을 옹호했기 때문이라는 활동가 집단의 평가를 부정하고, 진보정치의 변수를 기득권 세력과의 연합정치 여부로 국한한다. "모든 당 활동은 우리가 대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에서 다른 정치세력과 협력·연대를 추구하는 전술을 택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비상이 (자기모순적으로) 설명하듯 "공정이라는 가치에 반하는 선택을 했다는 비판"을 간과한다. 어디까지나 정치적 실용주의는 단기적 이해관계와 양(+)의 관계를 가질 때 유의미한데 비상의 논리는 정세에 부합하지도, 충분히 실리적이지도 않다.
정의당의 지속된 위기는 공정성과 능력주의 담론이 대두된 정세와 조화하지 못한 자의적인 판단을 지도부가 밀어붙인 것에서 기인한다. 이 판단은 사후적이든 아니든 당 내외에서 충분히 토론되지 못했다. 최대 정파가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정치적 실용주의는 또 다른 당내 의견그룹 새로운진보(이하 새진보)의 입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새진보는 지난 몇 달간 정의당 실패의 원인을 "과도한 페미니즘"에 돌리면서, 온라인 당원 민주주의 형태의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페미니즘 운동의 혁신이 아니라, 넷페미(인터넷에 기반을 둔 페미니스트)를 특정적이고 실체적인 적으로 정의한다는 점에서 우파 포퓰리즘의 논법을 따랐고, 이따금 불평등이나 불안정 노동 등 좌파적 의제에 진심인 것처럼 발화하기도 했다.
문제는 정세에 부합하는 좌파 포퓰리즘 실천은 보다 심원한 경험을 갖춘 활동가들에 의해, 운동 내의 차이를 좁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인터넷 남초 커뮤니티의 논법을 활용해 운동 내의 견해차를 갈등으로 호도하거나, 온라인 민주주의를 넘어선 정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영원히 호소력을 가질 수 없다.
이념 없는 실용의 중시는 2020년 총선 시기 녹색당에서도 다르지 않게 나타난 바 있다. 당시 녹색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활용한 원내 진출 전략에 몰두했다. 민주당과의 협상을 대리했던 하승수 전 대표가 당원들과 충분히 합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합의를 밀어붙였다가 한편으로는 민주당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다른 한편으론 당내 갈등이 폭발했다.
이는 조직 민주주의와 실용주의라는 갈림길에서 '원칙이냐 실리냐'식 이분법이 사태를 얼마나 파국으로 몰고 가는지 보여준다. 조직 내 합의를 견고하게 만드는 과정을 간과하면 어떠한 조직도 건강하게 만들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는 조직 내 정치적 효능감을 후퇴시켜 단기적으로든 장기적으로든 나은 효과를 낳지 못한다.
▲ 정의당 조성주 전 정책위 부의장이 26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 대표 후보 출마 선언을 하고 있다. |
ⓒ 공동취재사진 |
전략조직화 사업 결과 민주노총은 비정규직과 여성 조합원수가 크게 늘었다. 민주노총 비정규직 비율은 30%를 초과해 우리나라 비정규직의 노조 조직률 10%의 3배 이상이다. 2010년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9.8%였지만 2020년 말 기준으로는 14.2%로 크게 상승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조 조직률이 상승한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서 네 나라밖에 되지 않는다. 이 상승을 주도한 것은 민주노총이고, 여성과 비정규직의 가입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조성주는 노동시장 불평등 해결을 위해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로 해결될 수 없다고 전제하고, 노조 바깥의 노동을 주목하거나 직무급제 실시를 전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우에 따라 직무급제가 필요한 현장도 있지만, 일사불란하게 관철시키면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노동통제의 기제로 작동할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현실에서 직무급제 만능론은 노동조합을 공격하고, 노동자들의 자기 노동에 대한 통제력을 빼앗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직무급제가 노동에 더 보편적이고 유리하다면 노동조합이 주도해 실시해야 한다.
앞서 살펴봤듯 정의당 내의 여러 의견그룹들은 상황에 따라 견해는 달리할지라도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적 관계망에 따라 입장이 갈리는 측면이 강하다.
상대적으로 당내 좌파로 분류되는 '전환'은 "간판 정치인들이 당을 좌지우지하는 조직문화를 해체"하고, 지역을 중심에 둔 "사회운동 정당으로서 새로운 리더십을 구축"해야 지금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문제의식은 타당해 보이지만 당내 노력만으로 '혁신 재창당'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더구나 전환은 의견그룹 내의 이질성을 해소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것이 노동운동의 혁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당권 경쟁에 빠져있기보다는 여러 현장에서 정치연합을 위한 대안을 도출하고 사회운동 정당의 모범을 실천하는 것을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
불평등과 노동 문제에 대한 정의당 비상대책위의 반성은 일리 있다. 문제는 정의당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반성의 내용이 얼마나 타당한 것이냐에 있다. 노동 문제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정의당이 너무 친민주노총이라고 비판한다. 반면 민주노총 등 노동운동 전반에서는 정의당이 민주노조 운동과 많이 멀어졌거나 지나치게 의회중심적이라고 비판한다. 노동시장 불평등 문제에 대해 각기 다른 대안을 내놓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정의당 내 좌파는 비정규직 노조 조직화와 더 긴밀한 연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우파는 직무급제 실시나 노조와 거리두기를 주장한다. 이처럼 차이를 보이는 상황에서 당장 어떤 합의를 만들기는 어려워 보인다. 합의를 만든다고 해도, 그 결론이 확실한 우편향이라면 노동운동과 거리는 더 멀어질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직무급제 주장이나 노조와 거리두기 노선이 더 나은 결과를 낳을 리도 없다. 직무급제를 주장하는 <조선일보>나 경총 등 보수 조직들로부터 활용만 당할 공산이 크다.
다가오는 당직선거는 비상 그룹과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이정미 전 의원, 고 박원순 시장과 함께 일했던 조성주 전 노동특보, 전환 그룹의 김윤기, 새진보 그룹과 함께 비례대표 의원 사퇴를 요구했던 정호진, 이동영 전 수석대변인 등의 5파전이 예상된다. 하지만 이번 당직선거가 정의당에 새로운 계기가 되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변화를 촉진할 사건은 정의당 바깥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
존재 의의부터 재확인해야
20세기 중반 국가관리체제가 금융자본주의로 대체됐듯이, 오늘날 세계 경제·정치 위기의 어떤 측면들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체제로의 교체를 통해 잠정적으로는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생태적 차원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획기적 위기다. 기후재난은 매년 더 심화될 것이고, 가난하거나 남반구에 살수록 재난의 강도는 훨씬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면서도 여러 모순을 교차하는 요구가 늘어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좌파'는 기존의 정치 문법에서 벗어나 사회운동 전반을 포괄하는 전선을 새롭게 제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진보정당은 존재 의의부터 재확인해야 한다.
▲ 아래로부터의 정치세력화 구상 |
ⓒ 홍명교 |
이를 위해선 위로부터의 정치세력화와 결별하고, 아래로부터의 정치세력화를 체화해야 한다. 정치 비전을 바탕으로 대중과의 잃어버린 마주침을 보다 많이 기획해야 한다. 현재의 정당-노조 간 '정치-경제 분업화' 구조를 넘어서기 위해 지역과 현장에서 정치사업을 강화해야 한다. 혁명과 개혁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고, 비개혁주의적인 개혁들의 축적을 통해 체제 전환 주체가 형성되고 성장할 조건을 조성함으로써 진보정치의 실력과 토대를 키울 수 있다(순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선적으로 골목과 일터에서 정치 활동이 누적되면 이를 밑거름 삼아 아래로부터의 정치연합 구축을 위한 협의체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동네에서 기후위기 의제에 맞서 행동하고, 일터에서 노동자들이 정치에 대해 토론하고 캠페인도 하는 분위기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정당들이 제각각 혁신의 계기를 만들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기성 정치와 독립적인 사회운동이 함께 정치연합을 이루면 구심력을 발휘할 수 있다. 진보정당 운동의 새로운 계기는 이런 지난한 노력을 통해서만 가시화될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정치연합이 진보정당들의 협의체이어선 안 되며, 반드시 당 형태일 필요도 없다(불가능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기득권 세력에 수렴되지 않고 독자성을 견지하는 사회운동이 가치와 이념을 중심으로 조직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대중운동 과정이다. 복수의 정당 구조를 유지하더라도 연합과 교류, 협력의 경험이 선행되어야 새로운 좌파정치의 토대도 단단하게 다질 수 있다.
최근 일각에서 선거연합 비례정당이 거론되고 있다. 법 개정이나 정치적 합의를 통해 모종의 연합정당 혹은 통합 위성정당을 구성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상층 논의를 전제로 한 이런 정치 형식 논의는 또 다른 갈등을 낳을 공산이 크고, 그 실패는 더 큰 좌절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 홍명교 / 활동가·작가 |
ⓒ 홍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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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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