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혼하면 안 돼?" 묻는 소녀, 배우 서기의 빛나는 데뷔작
[조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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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소녀> 스틸컷 |
| ⓒ 부산국제영화제 |
01.
"난 이 집 가장이야. 다 내 마음대로 해도 돼."
배우 서기(Shu Qi) 를 생각하면 역시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 함께한 영화 <밀레니엄 맘보>(2001)를 떠올리게 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어두운 터널을 천천히 걸어가며 담배 연기를 내뿜는 비키의 초상은 공허한 도시를 방황하는 청춘을 상징하는 얼굴 같았다. 왕가위, 주성치 등 뛰어난 감독들과 함께하며 아시아 영화계의 한 시대를 장식해 온 그는 이제 카메라 앞이 아닌, 뒤로 이동해 연출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동안 배우로 쌓아온 경험과 감각이 응축된 영화 <소녀>를 통해서다. 폭력과 침묵, 성장과 기억을 아우르는 이 작품은 자신의 오래된 기억과 마주한 기록이자, 배우에서 감독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새로운 표정처럼 다가온다.
샤오리(Xiao-Ying BAI 분)는 술만 취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 창(Roy CHIU 분)과 유독 자신에게만 가혹한 엄마 쥐안(9m88 분), 그리고 그런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동생(Yu-Fei Lai 분)과 함께 살고 있다. 밤마다 술에 취한 아빠가 비틀거리며 골목 어귀의 오래된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리면 옷장으로 들어가 숨죽인 채 밤이 지나가기를 마냥 기다릴 뿐이다. 어느 날, 미국에서 살던 리리(Pin-Tung Lin)라는 소녀가 같은 반으로 전학 오면서 그 어두운 삶에 한 줄기 빛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모든 게 단번에 변하는 마법 같은 날은 아니지만, 갇혀 있던 삶이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
02.
아빠의 폭력과 벗어나지 못하는 가족. 이 짧은 설명만 봐도 작품이 갖고 있는 톤 앤 매너가 어떨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중심인물인 샤오리가 부직포 옷장으로 들어가 지퍼 사이의 작은 틈으로 분위기를 살피는 몇 번의 장면은 영화 속에서 가장 어두운 지점으로 전체 환기의 중심축이 된다. 중요한 사실은,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감독 본인의 어린 시절 가족사와 가깝다는 점이다. 영화를 연출한 서기 감독은 실제로 자신 역시 알코올 중독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감정적으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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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소녀> 스틸컷 |
| ⓒ 부산국제영화제 |
그런 샤오리의 곁에 리리가 등장하고 나면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다. 그의 환경 속에 존재하는 폭력은 여전히 존재하고 전체적인 환기조차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적어도 두 사람이 함께인 신과 쇼트 안에서만큼은 원래 그가 보여야 했을 자연스러운 진짜 소녀의 모습이 담긴다. 여기에는 마치 어른이 되기라도 한듯 꾸미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마음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 리리의 존재는 항상 맴돌기만 하던 쳇바퀴 같은 공간으로부터 (집과 옷장) 벗어나게 해주는, 나아가지 못하고 훔쳐보기만 하던 경계 너머로 건너갈 수 있게 해주는 대상인 셈이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모두 그렇다.
전학 온 친구와의 갑작스러운 교류와 가까워지는 속도는 표면적으로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이를 의식하기라도 한 듯이, 감독은 리리의 서브 텍스트 아래에 그 역시 아버지의 불륜을 목격한 경험이 있으며, 그로 인해 대만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는 설정을 배치해 놓는다. 종류는 다르지만, 지금 당장 자신들의 힘이나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점에서, 어른의 사정이기는 하나 일반적이지 못한 가정 환경에 놓이게 된다는 점에서 유사한 경험을 정서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04.
"그렇게 한가하면 집이나 나가. 입 하나 줄면 나도 좋아."
이 작품은 한 소녀의 불행한 어린 시절과 가정환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기저에 놓인 뼈대를 살펴보면, 일종의 '악의 순환과 대물림'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알코올 중독자인 가장과 가장 대신 가정의 모든 고단함을 짊어져야 하는 엄마. 제대로 챙겨지지 못하는 자녀와 살아남기 위해 도덕적이지 못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으로 이어지는 먹이사슬과도 같은 연결고리가 있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소녀의 공허한 눈에는 이 고리 속에서도 최하위에 놓인 피식자의 무력함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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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th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소녀> 스틸컷 |
| ⓒ 부산국제영화제 |
"엄마, 이혼하면 안 돼?"
영화의 결정적인 스포일러에 해당하기에 이 글에서 정확히 언급하기는 어려우나,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지금까지 영화가 보여왔던 여러 문제적 지점과 불합리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밝혀진다. 내내 동생에게만 상냥했던 엄마의 태도와 아빠가 취해 집으로 돌아올 때 왜 샤오리만 장롱 속으로 숨어야 했는지, 또 아빠로부터 내쳐질 때 왜 부끄럽다는 말을 들어야만 했는지 등의 모든 이유가 하나의 사실로 귀결된다. 지난한 과정을 보고 있으면, 희망이라는 것이 어디에나 있다지만, 이런 서사를 가진, 이런 대물림을 경험하는, 이런 환경에 노출된 이들에게도 정말 그런 것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어느 유명 배우의 감독 데뷔작으로 보기에, 영화 <소녀>는 꽤 인상적이다. 차례대로 쌓아 올리는 서사의 밀도는 꽤 단단한 편이고, 불우한 어린 시절에 대한 소재는 그간 자주 다뤄져 온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주요 배역에 캐스팅한 배우들이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연기를 전달할 수 있는 이유에도 분명 오랜 시간 강렬한 이미지로 스크린을 장악해 왔던 서기 배우의 도움, 디렉션이 도움을 주었을 거다. 서기라는 이름은 아직 배우에 조금 더 자연스럽게 붙을지 모르겠으나, 이 영화는 분명 그에게 감독이라는 자리를 정확히 마련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경쟁 부문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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