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으로 들어가” 명절에 더 외로운 사람들 [요.맘.때]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니까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강박증 등을 이겨내고 ‘동료상담가’로 활동하는 A씨는 명절 연휴를 보내고 온 내담자로부터 이런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해당 내담자는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환자였다. 어린 자녀를 둔 친척은 내담자에게 앞으로 가족이 모일 때는 오지 말거나 방에 들어가 있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내담자는 큰 충격에 빠져 좌절감을 호소했다고 A씨는 전했다.
A씨는 2022년 7월부터 지난 5월까지 보건복지부 산하 국립정신건강센터(센터)에서 운영하는 동료지원상담실에서 활동했다. 동료지원상담실은 국내 병원 최초로 자신이 정신질환자이거나 정신질환자의 가족인 사람들이 전문 교육을 받고 동료상담가로 배치된 곳이다.
A씨는 “센터에 있는 동안 비슷한 사례가 2~3건 정도 있었다”며 “다행히 저는 가족들이 수용적인 편이라 이런 일은 겪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센터와 계약이 종료된 뒤 현재 서울 마포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다.
일부 정신질환자들에게는 온 가족이 모여 정을 나누는 명절 연휴가 오히려 고립감을 느끼는 기간이 되기도 한다. 며칠씩 이어지는 연휴 동안 지지기반인 가족들에게 외면당하는 경험을 하며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것이다.
A씨는 “자신이 가족 내에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존감이 떨어지고, 그런 감정이 일정 기간 생활 전반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정신질환자가 회복하는 과정에서 수용적인 환경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의미를 가진 가족에게 배척당하는 경험은 일상생활에서 타인으로부터 받는 차별보다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고 지적했다.
이유나 상담사는 지난 13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가족은 (여러 지지기반 중에서도) 굉장히 의미 있는 존재”라며 “그런 존재에게 소외당하는 경험은 가족이 가진 의미의 크기만큼 마음에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이라고 말했다.
특히 정신질환자에게 명절은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상황 자체만으로도 자극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상담사는 “대체로 소수의 인원과 함께 있는 것을 선호하는 정신질환자에게 다수의 사람으로 둘러싸인 상황은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며 “이로 인해 민감도가 올라가고, (가족의 무심한 말 등) 가벼운 자극에도 예민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가족 모임을 무조건 피하는 것은 치료적인 관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이 상담사는 설명했다. 당사자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상황이라면 가족들의 수용적인 태도 속에서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 게 회복에 더욱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이 상담사는 “당사자의 자아 강도에 맞춰 시도하는 게 중요하다”며 “명절 내내 가족과 함께 있는 게 아니라 잠깐 시간을 같이 보내거나 심적으로 큰 의지가 되는 사람이 곁에 있어 주는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국립정신건강센터가 지난 7월 발표한 ‘2024 국민 정신건강 및 태도조사’에 따르면 지난 2~5월 국민 3000명(15~69세)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64.6%는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은 더 위험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2022년 조사보다 0.6%포인트 높아진 수치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이 더욱 심화한 것이다.
이런 편견은 정신질환자뿐만 아니라 정신질환자의 가족까지 위축되게 만든다. 실제로 아들이 20여 년간 정신질환을 겪고 있다는 B씨는 “편견이 두려워서 처음에는 친척들에게 말하지 못했다”며 “지인들에게 부모 양육이 문제라는 질타를 받고 상처를 받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명절 등 가족 모임을 피하던 B씨는 결국 친척들이 알게 된 뒤 오히려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친척들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알았으면 도와줬을 텐데”라며 B씨를 격려해 준 것이다. B씨는 “그 말 한마디가 참 힘이 됐다”고 전했다.
B씨의 아들도 상태가 호전되며 조금씩 가족 모임에 참여하게 됐다. 친척들은 그런 B씨의 아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해 준다고 한다. B씨는 “(사람들이 많으면) 아들이 긴장되니까 말없이 있는 편인데 가족들이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과하게 관심을 두지 않고 편안하게 내버려둔다”고 말했다.
이 상담사도 “정신질환자들이 가장 긴장하는 상황 중 하나가 자신의 증상이 발현되는 것”이라며 “병이나 증상에 초점을 맞춰 대화가 반복되면 더욱 긴장하고 힘들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A씨도 “‘취업은 했냐’ ‘아이는 언제 낳느냐’ 등 질문을 계속 듣는 게 힘든 것처럼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어떤 한 측면에만 집중하면 누구나 상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질환에 대해 계속 언급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이 가진 취약성을 부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냥 ‘잘 지냈냐’는 안부 인사 정도면 충분하다”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면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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