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행 승객 다 뺏길라”…李 ‘증편’ 언급에 항공사 술렁인 이유 [현장에서]

지난 14일 열린 국무회의가 끝난 뒤 국내 항공업계는 술렁였다. 회의 도중 이재명 대통령이 “항공기의 정기노선을 늘려달라는 민원을 내가 외국 정상들한테서 자주 받는다”며 언급한 내용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은 “일면적인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관광 산업을 진흥하자 아니면 어떤 이유로든 외국인들이 국내에 많이 오는 게 경제학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종합적으로 보면 관광산업 진흥이라는 측면에서도, 다른 측면에서 우리 국적 항공사들이 취항을 못 하더라도 외국 국적사들이 정기노선 늘려달라는 거를 좀 적극적으로 늘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좀 든다”라고도 했다.
이 대통령은 회의에 참석한 홍지선 국토교통부 2차관과 몇 차례 의견을 나눈 뒤 “(증편 민원을 한 나라가) 어디인지는 나중에 따로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아마도 이 대통령은 국내로 들어오는 외국 항공사의 비행편이 늘면 자연스레 외국인의 입국도 증가하고, 관광산업 활성화 등 경제적 효과도 커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는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증편 민원을 한 곳이 만약 UAE(아랍에미리트), 카타르, 튀르키예 등 중동 또는 인접 국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국토부와 항공업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와의 항공회담 때마다 줄기차게 증편을 요구해 온 나라는 UAE와 카타르 등 중동 국가들이다.
튀르키예도 상황은 비슷하다. 그래서 대통령이 언급한 나라가 이들 국가일 거란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럽과 미주 등 장거리 노선을 뛰는 대형항공사를 중심으로 국내 항공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 국가의 증편 요구가 유독 민감할까. 익명을 요구한 항공업계 관계자는 “이들 나라의 항공사가 보조금 등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저가 공세로 우리 항공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이들 항공사는 유럽 등지로 가는 우리 국민의 수요를 상당부분 가져가고 있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UAE의 경우 양국 간을 오가는 직접 수요는 30%가 안 되고 나머지 70% 이상이 유럽행 등 환승 승객이라는 것이다.
한국 등 여러 나라에서 아부다비나 두바이로 환승객을 데려온 뒤 다시 유럽 등지로 운항하는 형식이다. 카타르 역시 양국 간 수요는 10%를 조금 넘고 나머지 80% 이상이 유럽과 아프리카 등으로 가는 환승객이다. 튀르키예 노선 역시 터키항공의 환승 점유율이 85%에 달한다는 자료도 있다.
이렇게 이들 국가와의 직접 수요는 적은 데다 우리 국민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환승객 비율이 높은 탓에 직항편만 운영하는 우리 국적사들은 경쟁에서 불리하다.
한-UAE 노선의 경우 UAE 측의 에미레이트항공과 에티하드항공은 전량(주 21회)을 모두 운항하는 반면 우리는 대한항공만 주 7회를 뜨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카타르 노선도 카타르항공이 전량(주8회)을 뜨지만, 우리 국적사는 운항편이 없다. 이처럼 중동권 항공사들이 환승 수요를 대거 가져가는 건 저가 공세 덕분이라는 게 항공업계 설명이다.

실제로 항공권 비교·예약 사이트인 스카이스캐너를 보면 인천~파리 구간의 경우 국내 항공사나 유럽 항공사들은 요금이 210만~230만원(왕복 기준)이지만 에미레이트항공이나 카타르항공은 150만~160만원으로 30% 이상 저렴하다. 유럽의 다른 경쟁 구간도 유사하다.
또 다른 항공업계 관계자는 “UAE와 카타르 측 항공사는 소득세와 유류세 등을 내지 않는 등 정부로부터 막대한 보조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이들 항공사가 공격적으로 저가 공세를 펼 수 있는 이유”라고 전했다. 터키항공은 튀르키예 국부펀드가 지분의 49%를 보유 중으로 정부 차원의 여러 지원을 받는다고 한다.
유럽으로 가는 우리 국민의 직항 수요를 이들 항공사가 저가를 앞세운 환승 수요로 잠식하면 우리 국적기의 유럽 직항 노선은 유지가 어려워진다. 앞서 중동 항공사와 경쟁한 외국 사례도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호주의 콴타스항공은 유럽 노선을 여럿 운항하던 유명항공사였지만 지금은 중동 항공사와의 경쟁에 밀려 상당수 유럽 노선을 폐지했다. 유럽연합(EU)에선 경쟁에 밀려 항공 관련 일자리 8만개가 사라졌다고 한다.

항공 자유화의 첨병인 미국에서조차 대형 항공사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며 “중동 항공사가 막대한 정부 보조금을 앞세워 불공정 경쟁을 하고 있다”고 반발할 지경이었다.
물론 국제화 시대에 국적사냐 외항사냐를 구분할 필요 없이 가성비(가격 대비 만족도)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일견 일리 있는 얘기이지만 경쟁이 사라진 뒤에도 저렴한 요금이 유지될 것인가는 따져봐야 한다.
중동항공사들이 경쟁 노선에서 저가 공세를 펼쳐 경쟁사가 물러나면 요금을 다시 올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게다가 국적사가 어려워지면 양질의 일자리도 그만큼 줄어든다. 노선 1개가 사라지면 직간접 고용이 1900명가량 줄어든다는 통계도 있다. 또 형평성때문에 다른 중동국가에도 문을 더 열어줘야 한다.
그렇다고 경쟁력 떨어지고, 한때 구설수 많았던 우리 항공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중동항공사에 계속 빗장을 걸어 잠그자고만 할 수는 없다. 다만 경쟁의 공정성과 국내 항공산업의 피해 정도, 이해득실을 꼼꼼하게 따져보고 증편 여부를 결정하자는 얘기다. 그게 다른 나라는 이미 겪은, 예상되는 충격을 그나마 줄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kks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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