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진돗개 길러온 우리 집... 이젠 정말 가족입니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혁진 기자]
▲ 태어난지 1년 4개월 진돗개 성견 복순이 |
ⓒ 이혁진 |
때마침 아버지가 지인으로부터 두 달 된 진돗개 새끼를 얻어오셨다. 그 개는 누렁이로, 어미개는 해병대원과 함께 백령도를 지켰다고 했다. 그러나 개를 가져오신 부모님은 그 뒤론 강아지가 집에 있다는 정도만 알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내 두 동생들도 다르지 않았다.
'순돌이들'의 추억
당시 나는 '호위무사'를 자처하고 누렁이를 애지중지했었다. 당시엔 개를 키우는 집이 많지 않았던 기억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생을 함께 보내는 반려견보다는, 당시엔 식용 대용으로 생각하며 키우는 집이 제법 많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이때부터 진돗개는 우리 집 역사와 함께 했다. 평균 10년 내외를 살다가는 자연사하는 개들. 그렇게 한 마리가 가슴 아프게 떠나고 나면, 가족들은 애도의 시간이 지난 얼마 뒤 어린 진돗개를 입양해 키웠었다. 지금은 진돗개를 집 안에서 기르기도 하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개집을 지어주고 마당이 있는 밖에서 기르곤 했다.
이런 식으로 근 50년 모두 여섯 마리가 우리 집을 거쳐갔다. 우리 집에 데리고 오는 강아지는 모두 수컷으로 이름은 하나같이 '순돌이'라 불렀다.
이 중에서도 40년 전 지금 사는 독산동으로 이사 올 무렵 함께 살던 순돌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5개월 된 순돌이를 데리고 집 뒷산에 산책 갔다가 그만 강아지를 잃어버렸다. 찾다 찾다 어두워져 포기하고 귀가했는데, 놀랍게도 몇 시간 후에 순돌이가 스스로 집을 찾아온 것이다.
순돌이가 갑자기 사라져 집안 식구들이 모두 넋을 잃고 있는데 그 아이가 나타나니 가족들은 놀라서 혼비백산했다. 어린 진돗개지만 생전 처음 가봤을 먼 산길을 헤매다 집을 찾아서 잘 귀환하다니, 그 신통함은 지금도 우리 집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영웅담이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집에 오면 나는 개 표정과 개밥그릇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 밥그릇이 비어있으면 강아지를 왜 굶기느냐고 집에 있던 가족들을 타박하기 일쑤였다. 하긴 그 때는 마땅한 개사료도 없어 사람이 먹는 밥을 나눠주던 때였다.
강아지들은 나만 보면 반가운지 날뛰었다. 개 사랑이 너무 지나치다고 어머니에게 타박을 듣기도 자주 들었다. 여기엔 개를 아끼듯 형제들도 사랑하라는 바람이 담겨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렇듯 우리 집 개들은, '순돌이'들은 정말 거의 내 보살핌으로 컸다. 전염병으로 거의 죽어가는 아이도 내 방에 들여서 애지중지 하며 우유를 먹이고 살려내기도 여러 번이었다. 이때 동물도 정성을 다하면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외롭고 병드니 어릴 적 강아지들이 그리웠다
성인이 되면서 개를 가까이하는 시간은 예전보다 줄었지만 '개를 이뻐하는 DNA'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도, 아무리 사나운 개도 나를 보면, 몇 시간만 지나면 꼬리를 내리고 호의를 표하곤 한다. 내게 강아지와 교감하는 건 메마른 정서를 깨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몇 년 전 기르던 개가 난 지 10년 만에 병으로 죽은 뒤, 90세에 가까웠던 아버지는 부쩍 외로움을 타시고 얼마 후 나 또한 병마와 씨름하게 됐다. 그 때 나는 병원을 오가며 어릴 적 키웠던 강아지들이 떠오르고 그립기도 했다.
이전엔 개를 선천적으로 싫어하는 아내건만, 그땐 아내도 어떤 연유에서인지 요즘 새끼 강아지들이 유독 귀엽고 예쁘다며 강아지 입양을 재촉했다.
그러던 차에 지난해 5월 김포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대학 후배에게 진돗개 분양을 타진했다. 후배는 내 뜻을 이해한 듯 나중에 선물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잠시 그 일조차 잊고 있었다.
▲ 생후 한 달 된 복순이를 입양하기 전 무게를 재고 있다. |
ⓒ 이혁진 |
▲ 지난해 8월 마당에 복순이 개집을 만들었다. 마당이 있고 주택인 우리 집은 개를 밖에서 기르고 있다. |
ⓒ 이혁진 |
우리 집에 백구 진도 믹스견이 함께 하게 된 사연이다. 우리는 강아지 이름을 '복순이'라고 지었다. 우리 집이 키우는 첫 번째 암컷 진돗개로 등극한 것이다.
복순이는 집에 오자마자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사료를 전담하는 내가 복순이와 사이가 친밀해지자 아내가 웃으며 질투를 할 정도였다. 시간이 갈수록 복순이의 존재감은 커져만 갔다.
'중성화 수술'을 마친 복순이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지난해 연말쯤 복순이에게 중성화 수술을 한다는 후배 말을 지키지 못하고 그만 해를 넘기고 마는 일이 있었다. 암과 투병 중인 내가 암 치료차 병원을 다니다 그만 복순이 수술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복순이는 연초 봄 생리를 시작하면서 예민해졌다. 털갈이도 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복순이가 출혈이 있을 때마다 치워주고 털을 빗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복순이도 힘들었겠지만, 지켜보는 식구들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 복순이가 중성화 수술을 마친 후 마취에서 깨어나기 전 모습이다. |
ⓒ 이혁진 |
수술 시간은 마취와 수술, 마취가 깨어나는 시간을 합해 두 시간이 채 안 걸렸다. 수술을 마치고 집에 올 때는 갈 때와 달리 의젓하게 앉아 있는 복순이 모습에 우리 부부는 놀랐다. 아직 나이가 어린 편이어서인지, 복순이의 회복력과 적응력이 무서우리만큼 빠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복순이 덕에 생긴 '서로서로' 의지하는 삶
중성화 수술 이후 복순이는 짖는 소리가 달라졌다. 날카로운 소리가 둔탁해졌다고 해야 할까. 예전보다 컹컹대며 짖는 횟수도 줄었고, 예전보다 다소 점잖아졌다.
복순이를 입양한 이후 우리 집 일상은 180도 달라졌다. 우선 집 안에 전에 없던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제는 장성한 아이들이 모두 떠나 다소 적적하고 조용해진 집이었는데 말이다.
▲ 집수리 공사를 할때 마당에 있는 복순이 집을 임시 통제했다. |
ⓒ 이혁진 |
복순이와 함께 이사가 생활하면 좋겠지만, 그럴만한 장소를 구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런데도 복순이는 혼자서 마당의 자기 집에 남아 용케 잘 버텨주었다. 대견하기도 하고 내심 자랑스럽기도 했다.
가족들이 약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임시로 옮겨가 살고 있었기에, 아침마다 마당에 밥을 주러 가면 복순이는 밥을 먹기 보다도 우리에게 반갑게 꼬리치기 바쁜 모습이었다.
사람이라면 자기만 남겨두었다고 투덜댔을 것이 분명하다. 어찌 보면 외로움을 견디는 힘이 우리보다 센 것도 같다.
나이 들면서 '댕댕이'를 보는 시각이 사뭇 달라졌다. 과거엔 돌봄 대상으로만 치부했다면 지금 복순이는 반려견 이상으로 대접 받고 있다. 복순이와 우리 식구 모두 오래도록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오늘도 복순이가 밥은 잘 먹었는지,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 있는 복순이 개집과 사료 그릇을 확인하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싹싹 비운 그릇에 다시금 사료를 담아주면서 복순이의 두 까만 눈을 쳐다봤다. 복순이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윤석열 정부, 1차 독재 징후가 보인다
-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 "윤 대통령 병정놀음"... 시위·부상 속 국군의날 시가행진
- 낯선 사람 차로 200km 동행... 프랑스에선 일상입니다
- [손병관의 뉴스프레소] "한동훈 치면 여사가 좋아할 것", 전직 행정관 녹취 파문
- 김광동씨, 이제 그만 떠나세요
- 국힘, '한동훈 공격' 보도 사주에 강경 대응 "심각한 해당행위"
- 곳곳에 퍼진 경찰, 한 데 모아 운영? 주민들 '치안공백' 걱정
- 자기 부인 조사하는 법에... 윤 대통령 또 다시 거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