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시 '홍원저조'
[김삼웅 기자]
▲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주도하다가 1942년 발발한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곤욕을 치른 생존자들이 1946년 6월에 자리를 함께했다. 앞줄 왼쪽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이중화, 장지영, 김양수, 신윤국, 가운데 왼쪽부터 김선기, 백낙준, 장현식, 이병기, 정열모, 방종현, 김법린, 권승욱, 이강래, 뒷줄 왼쪽부터 민영욱, 박혁규, 정인승, 정태진, 이석린. |
ⓒ 연합뉴스 |
홍원저조
묵직한 철책문이 덜그럭 닫치는고나
도몰아 이는 시름 가슴이 메어지고
하룻밤 지내는 동안 적이 수(壽)를 덜었다
버버리 그저 있고 처녀는 어제 죽다
발도 거지 않고 자리를 옮겨 앉아
우러러 철창 너머로 달을 처음 보았다
등은 깜박하고 까마귀 소리 난다
창을 열뜨리고 허공을 바라보며
누긋한 호흡을 하여 새기운을 흐루다
어뜩 새벽부터 반히 트이는 하늘
가로 두른 선은 담록과 연분홍빛
내 매양 자고 일어나 거울삼아 보노라
세상 모든 일이 저절로 잊어지고
죽지 못하여 하찮이 남은 목숨
다만 그 아침 저녁으로 도야지를 기린다
이쑤시개 바늘삼아 해진 옷을 얽어매고
밥풀을 손에 이겨 단추를 만들어 달고
따뜻한 볕을 향하여 이 사냥을 하도다
파란 하늘가에 빨간 노을이 돋고
까마귀 두어 마리 소리없이 지나가고
앞지붕 지붕머리로 저녁 볕은 잦았다
졸다 깨어보니 산뜻한 볕이 난다
한나절 오든 눈이 지붕마다 소복하고
흐리던 구름 걷히며 파란 하늘 돋는다
뜰에 나던 볕이 창으로 다시 든다
하루를 보내기 한해도곤 더디더니
어느덧 제돌을 이어 또 가을이 되었다
몹시 곤한 그 잠 숨소리 높아지고
빨간 숯불 곁에 간수도 녹으라지고
호올로 나는 그 밤을 등과 함께 밝히다
바다를 앞에 두고 보랴 보든 못하여도
전율(前溧)과 송도(松島)의 그 모양 그 이름과
아울러 파도 소리는 귀에 이미 젖었다
고토의 모든 풍물 몹시도 그리워라
글월 한쪽이 금쪽같이 귀엽고
무심한 기적 소리도 때로 나를 놀랜다
몹시 기다리다 아이들 편지 보니
팔순된 아버지 주야로 염려하시며
차디찬 방에 겨오셔 이 겨울을 나신다고
눈언덕 다 꺼지고 볼은 움푹 들어가고
뼈다귀 비어져 나무나 돌 같으되
맑고도 찰찰한 마음 전생 일도 다 헬레
눈이 쌔고 쌔고 바람은 뼈를 에우는데
손마다 꾸러미 들고 찾아드는 아들 딸
머나먼 험한 이 길을 문턱처럼 여긴다
그 밤을 자고 나면 도로 그날 그날이다
짜고 누르고 뼈마저 다 녹인다
전전에 없던 마음도 새로 지어 이르다
이불을 반투어 덮고 숨도 죽이고 누워
조이는 마음 이와 함께 웅실이다
이 밤도 겨우 든 잠을 비가 도로 깨운다
행여 돌아올까 나날이 기다리고
낡고 비인 집을 외로이 지키오며
차디찬 구둘 위에서 밤도 낮을 삼으시다
법을 도가니 삼고 형으로 망치질하여
불로 녹이고 물로 식히고 하여
이 몸을 저의 맘대로 쇠와 같이 다루네
샅샅이 이 인간을 그물로 후려낸다
한 번 걸리면 도마 위에 고기로다
붉어진 백정의 눈에야 온전한 소 있으리
비단 같은 뫼이 겹겹이 둘러 있고
검은 구름 틈에 달은 반쯤 비껴 나고
어디서 음악 소리는 은은하게 들린다
보내는 그날 그날이 괴롭고 어렵더니
참고 견디어 도리어 버릇이 되어
참혹한 지옥살이도 천당(天堂)으로 아노라
손을 꼽작거려 사주팔자도 보고
종이를 접어 개구리도 만들고
콩고물 찹쌀가루로 큰 잔치를 베푼다
종일 꿇고 앉아 철창만 바라본다
몹시 소란하던 바람이 잠잠하고
얄포시 비끼는 볕도 들락말락 하여라
아직도 여각에는 고흥이 남았건만
팥죽도 없이 동지도 지나가고
창살에 비끼던 볕이 한치 남아 자랐다. (주석 1)
주석
1> 앞의 책, 54~5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