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이해찬의 또 다른 이력, '사회학적 상상력' 공동번역
[신향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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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다. 이 전 총리는 베트남 출장 중 지난 23일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긴급 이송된 지 이틀만에 숨을 거뒀다. |
| ⓒ 사진공동취재단 |
그가 공동번역한 책은 미국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즈의 대표작 <사회학적 상상력>이다. 이해찬 수석부의장은 서울대 사회학과 동기인 강희경 전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중앙일보> 해직기자)와 함께 1978년 이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정치인이 되기 이전, 그는 세계의 사유를 한국어로 들여오는 작업에 참여했다. 법과 제도를 다루기 전, 그는 먼저 '보는 눈'을 바꾸는 일에 손을 보탰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한마디로 '시선의 전환'을 요구하는 책이다. 개인의 불행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사고에서 벗어나, 그것을 낳은 사회 구조와 역사적 조건까지 함께 바라보자고 말한다. 밀즈가 말한 사회학적 상상력이란 개인-사회-역사를 동시에 읽어내는 능력이다.
개인경험, 사회구조, 역사적 맥락 함께 봐야
이 책은 사회 문제를 볼 때 반드시 세 가지 층위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제시한다. 첫째는 개인의 경험이다. 사람은 각자의 삶에서 고통을 겪고, 실패하고, 좌절한다. 둘째는 사회 구조다. 그 개인이 속한 경제 체계, 계층 구조, 제도와 환경이 어떤 선택을 가능하게 하고 어떤 길을 막았는지를 살펴야 한다. 셋째는 역사적 맥락이다. 지금의 구조가 어떤 시대적 조건과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보지 않으면 문제의 본질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이 밀즈의 주장이다.
예컨대, 일본군 '정신대' 피해자의 삶은 개인의 비극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시 농촌 사회의 가난, 가족을 돕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던 현실, 그리고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조건이 함께 존재했다. 이 세 층위를 동시에 보아야만, 그 고통이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구조와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사회적 비극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관점은 오늘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실업, 빈곤, 좌절, 실패를 "노력이 부족해서"라는 말로만 설명하는 순간, 사회는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긴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그런 단순한 해석을 멈추게 한다. 개인의 고통을 사회 구조 속에 놓고, 그 구조가 형성된 역사까지 함께 보게 만든다. 그때 비로소 문제는 '내 탓'에서 '우리의 문제'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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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찬 수석부의장이 해직기자 출신 강희경 교수와 1978년에 공동번역한 <사회학적 상상력> |
| ⓒ 돌베개 |
이 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삶을 다르게 해석하게 하고, 타인의 고통을 다르게 이해하게 만든다. 개인의 불행을 구조와 역사 속에 연결해 보게 만드는 인식의 전환, 그것이 <사회학적 상상력>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
이해찬 수석부의장과 강희경 교수의 번역은 단순한 언어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외국에서 만들어진 '생각의 씨앗'을 한국 사회에 옮겨 심는 일이었다. 이 책이 널리 읽히던 시기는 한국 사회가 군사정권을 벗어나 민주화를 향해 나아가던 때였다. 많은 젊은이들이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왜 말할 수 없는가"를 묻던 시절이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그들에게 하나의 창을 열어주었다. "문제는 너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사는 방식일 수도 있다."
그 메시지는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열쇠였다. "내 탓"이라고만 여겼던 고통이 "함께 바꿔야 할 사회의 문제"로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이 바뀌면,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사회 변혁은 바로 이 인식의 전환에서 출발한다. 제도는 법으로 바꿀 수 있지만,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나온다.
"개인의 고통은 '함께 바꿔야 할 사회문제'"
정치인이 된 이해찬 수석부의장은 이후 법과 제도를 다루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그는 한 권의 책을 통해 사람들의 시선을 바꾸는 작업에 참여했다. 개인의 삶을 비추던 손전등을, 사회 전체를 밝히는 등불로 바꾸는 일에 손을 보탠 셈이다.
한국어판 <사회학적 상상력>은 1978년에 처음 출간되었고, 이후 2004년 개정판이 다시 나왔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세상을 읽는 다른 방법'을 제시해 왔다. 한때 이 책을 품에 안고 대학 도서관을 오가던 청년들은 이제 50대, 60대, 70대가 되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여전히,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 책이 건네준 질문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고통은 정말 나만의 문제인가."
이해찬 수석부의장의 별세는 한 정치인의 퇴장을 넘어, 그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는 생의 후반을 권력과 제도의 세계에서 보냈지만, 젊은 시절에는 "세상을 다르게 보자"는 한 권의 책을 세상에 건네는 일에 참여했다.
"너만 잘못된 것이 아니다. 너의 고통에는 구조와 시대가 함께 얽혀 있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지금도 조용히 이렇게 속삭인다. 그 메시지는, 그가 떠난 지금 더욱 잔잔하게 가슴을 울린다. 개인의 불안을 사회의 언어로 번역하는 힘. 그것이 이해찬 수석부의장이 남긴 가장 오래가는 유산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뷰365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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