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땅 1만 5천 평에 코스모스를 심었더니
[김재근 기자]
탐진강은 영산강, 섬진강 다음으로 큰 전라남도 젖줄이다. 장흥과 영암 사이 국사봉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흘러 장흥군 들녘 지나 강진만으로 흘러든다. 탐진은 제주도 옛 이름인 탐라도 사람이 육지에 처음으로 배를 대어 올라온 데서 유래했다.
탐진강이 시작하는 유치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해방공간에서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이 둥지를 틀었다. 한국전쟁 때 장흥읍이 두 달여 북한군에 점령되었던 반면 유치는 일 년 반 동안 공방이 이어졌다. 주요 전투 지역이 보림사 인근 골짜기였다. 빨치산 해방구였다는 이유로 오지로 방치돼 오다가 장흥댐에 잠겼다.
▲ 보림사 대적광전 앞 국보 44호인 남북 삼층 석탑과 석등 |
ⓒ 김재근 |
중창과 중수를 거쳐 20여 동 전각을 갖춘 대찰이 되었다. 빨치산 토벌 작전 때 대부분 소실되어, 돌로 된 것과 나무로 된 것 중 천왕문과 사천왕과 외호문만 남았다. 대적광전과 대웅보전이 새로 지어 절집다운 풍모를 되찾았다.
국보 둘과 보물 여섯이 있다. 대적광전 주불인 국보 117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858년(헌안왕 2)에 만들어진 신라말 철조불상의 대표작이다. 대적광전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남·북 삼 층 석탑과 석등'은 국보 44호로 870년(경문왕 10)에 세워졌다.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경주 외 지역에서 이처럼 우아한 기품이 넘치는 것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 정남진토요시장 댐으로 수량이 적어 개천으로 변했다. 우안은 구도심, 좌안은 신도심이다. |
ⓒ 김재근 |
너른 부산면 들판을 지나 장흥읍에 들어섰다. 조선시대에 도호부가 설치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때 안핵사가 되어 고부군으로 갔던 이용태가 이곳 부사였다. 보를 막아 얼마 되지 않은 물을 가두어 물의 고장으로 만들었다. 우안은 구도심, 좌안은 신도심이다.
▲ 석대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지붕에서 본 모습. 사진 앞쪽이 장대 모형이다. |
ⓒ 김재근 |
장터에서 강진 쪽으로 5분쯤, 석대들이다. 강진현과 전라병영성이 가까운 이곳에서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격전이 벌어졌다. 정읍 황토현, 공주 우금치, 장성 황룡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4대 전적지다. 1894년 12월 14일부터 이틀에 걸쳐 3만여 명의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 회진항 갈대와 코스모스와 바다가 어울렸다. 사진 좌측이 노력도, 우측이 선학동이다. |
ⓒ 김재근 |
▲ 천관산 회령진성 성벽에서 본 모습. |
ⓒ 김재근 |
<소리의 빛>은 이렇게 시작한다. "주막집은 장흥읍을 아직 10여 리쯤 남겨놓고 탐진강 물굽이의 한 자락을 끼고 돌아앉아 있었다." 석대 들녘이 끝나는 즈음이다. 영화에서는 영광 어디쯤이지만. 강물은 동으로 나는 남으로 향했다. 오른쪽으로 천관산이 지난다.
회진항, 득량만 입구다.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해임되고,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침몰당할 때, 경상우수사 배설이 판옥선 12척을 이끌고 전선을 이탈하였다. 서쪽으로 도망하여 장흥 회룡포, 지금의 회진항에 숨었다. 수군진 회령진성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복직한 후 머물며 수군을 정비했다. 명량해전 기반을 여기서 갖췄다.
항구 앞, 섬이 노력도다. 제주를 제일 빨리 가는 뱃길이었다. 항구마다 경쟁이 치열해지며 다투어 빠른 배를 출항시키면서 손님이 급감하여 폐항이 되었다. 회진 보건소 앞에서 코스모스가 울긋불긋 파도처럼 출렁였다. 갈대와 어우러져 바다까지 이어졌다. 끝에는 빨간 등대가 있다. 뒤로는 회령진성 너머 천관산이 가을 분위기를 보탰다.
원래 버려진 땅이었다고 한다. 1만 5천 평, 갈대밭에 쓰레기만 쌓여갔다. 회진면에서 코스모스를 심었다. 항구가 밝아지고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스치듯 만난 면장이 말했다. 봄 회진은 유채꽃이 가을 회진은 메밀꽃이 가득하다고도 했다.
한승원 생가와 이청준 생가
회진항 좌측 재 넘어 한승원 생가가, 오른쪽 재 넘어 이청준 생가가 있다. 1939년, 같은 해 에 태어났다. 둘 다 십 리 길이었다.
노벨문학상 받은 한강 아버지라서 그랬을까. 1990년 청룡영화상을 휩쓴, 강수연이 주연한, <아제아제바라아제>를 쓴 한승원 생가를 먼저 찾았다. 들어갈 때는 노력도 가는 큰길로 돌아서, 나올 때는 그가 걸어 넘었다는 한재를 넘어 덕산리로 나왔다.
▲ 선학동 메밀밭이 언덕을 따라 펼쳐졌다. 좌측 중간 바닷가에 <천년학> 세트장이 있다. |
ⓒ 김재근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화순매일신문에도 실립니다.네이버 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태원 2주기, 세은 아빠의 다짐 "이름 없는 조의금, 사회에 돌려드릴 것"
- "차 안에서 들려온 '내 다리 잘라 줘'... 눈물이 벌컥 솟았다"
- 따뜻한 '엄마' 김수미에게 바치는 한마디... "감사합니다"
- 서영교 "더 가관은 대통령 관저 '3번 방', 거기에 뭐가 있나"
- [사진으로 보는 일주일] 민망한 그것, 대통령실 앞마당에서 주웠다
- 윤 대통령 긍정 20%...TK도 30% 벽 무너졌다
- 보일러 틀기 망설여질 때 이걸 먼저 사용하세요
- 북한, 러시아 파병 사실상 시인… "국제규범 부합하는 행동"
- 이스라엘, 이란 군사 시설 보복 공격...중동 갈등 중대 기로
- '노동자가 곧 예수'라는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