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은 왜 싱가포르를 현대차 혁신 전초기지로 택했나
혁신 대응력, 빠른 피드백, 풍부한 우수인재 등 '테스트베드' 입지 '최적'
현대자동차그룹의 글로벌 제조혁신 전초기지 ‘현대차그룹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HMGICS)’가 21일 준공됐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3년 전부터 준비한 야심찬 프로젝트가 드디어 베일을 벗은 것이다.
HMGICS 기공식은 지난 2020년 10월 13일 열렸다. 이전까지 그룹의 2인자였던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하기 바로 전날이다. 사실상 현대차그룹이 ‘정의선 체제’로 접어든 이후 이뤄진 첫 전략적 행보가 HMGICS인 셈이다.
정 회장은 당시 온라인으로 진행된 기공식에서 “현대차그룹은 HMGICS의 비전인 ‘모빌리티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인간 중심의 밸류체인 혁신’을 바탕으로 고객 삶의 질을 높여 나갈 것이다. HMGICS를 통해 구현될 혁신이 우리의 미래를 변화시키고 인류발전에 기여할 것이라 확신한다”며 야심찬 비전을 제시했다.
이 역사적 현장을 현대차그룹은 지난 16일 국내 기자들에게 사전 공개했다. 하지만 HMGICS를 방문하기 위해 창이공항에 내려 싱가포르 도심지를 지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대체 왜 이곳을 택했을까.”
‘자동차 생산기지’로서의 입지조건을 따지자면 싱가포르는 최악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인구가 600만에 불과한 데다, 자동차 보급률도 10% 언저리에 머문다.
번화한 도시 풍경에 비하면 의외로 교통 체증은 심하지 않다. 기자단을 안내한 현지 가이드는 “싱가포르 전체에 등록된 자동차 대수가 72만대고, 그 중 13만대는 오토바이”라고 했다. 네 바퀴가 달린 자동차는 60만대도 채 안 된다는 의미다.
높은 국민소득에도 불구, 자동차 보급률이 낮은 것은 싱가포르 정부의 자동차 보급 억제 정책 때문이다. 싱가포르에서 자동차를 보유하려면 유효기간 10년짜리 자동차 소유 자격증명서(COE)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이 비용이 배기량별로 수천만원에 달한다. 돈이 있다고 무조건 발급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존 COE 보유자가 기간 연장을 하지 않고 반납하면 그걸 경매를 통해 구매하는 식이다. 여기에 각종 세금을 포함하면 자동차 구매비용 외에 1억원 가량 돈을 더 써야 한다.
심지어 싱가포르 정부는 교통체증과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해 자국 내 차량 운행 대수를 더 줄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가뜩이나 좁은 시장이 더 좁아지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경쟁은 치열하다. 전 세계 다양한 차종들이 모두 싱가포르에 들어온다. 몇 시간 동안 시내 도로를 돌아다녀도 같은 차종이 두 번 이상 눈에 띄는 일이 드물다. 그야말로 무한경쟁 체제다.
싱가포르의 연간 자동차 판매량은 2021년 기준 2만7801대였다. 가동 초기 아이오닉 5와 아이오닉 5 로보택시를 생산하게 되는 HMGICS의 연간 생산능력은 3만대 이상이다. 싱가포르 시장을 100% 아이오닉 5로 채워도 공장을 풀가동할 일은 없다.
정의선 회장은 왜 이런 곳을 현대차그룹의 글로벌 제조혁신 전초기지로 택했을까.
사실 제품을 많이 만들고 많이 팔아 많은 수익을 남기는, 전통적인 생산기지로서의 가치는 HMGICS에게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현대차그룹은 HMGICS를 제조혁신의 방향성을 연구하고 검증하는 ‘테스트베드’로 일컫는다. 현대차그룹 미래 공장들에 적용될 제조방식과 시스템을 설계하고 실제 생산에 적용해 신뢰성 있는 데이터를 얻는 임무가 부여된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HMGICS가 테스트베드 역할을 수행하기에 싱가포르가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생산기지’를 구축하기에 불리한 각종 조건들이 ‘테스트베드’로서는 이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정홍범 HMGICS 법인장(전무)은 16일 현장을 방문한 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어떤 차종이 적합하고 어떻게 커스터마이징(주문제작)돼야 하는지는 고객 피드백이 굉장히 중요하다”면서 “싱가포르는 굉장히 작은 시장이고 조그마한 나라지만, 많은 브랜드들이 진출했고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은 규모의 시장에서 벌어지는 무한 경쟁 상황이 오히려 테스트베드의 입지로는 적합하다는 것이다.
물리적, 제도적 변화가 민첩하게 이뤄질 수 있다는 점도 ‘작은 몸집’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다. 우리나라에서 도시계획이나 모빌리티 관련 인프라를 구축하거나 정책을 바꿀 때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작업을 벌이는 것보다 서울시에 한정해서 진행하면 더 빠르게 마무리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싱가포르 특유의 권위주의적인 정치 체제도 방향성만 올바르다면 혁신적 변화에 가속도를 붙이는 배경이 될 수 있다. 싱가포르 국민들은 대체적으로 정부 정책에 순종적이며, 법적으로도 대규모 시위와 집회가 규제된다. 정부가 급진적인 환경 정책을 단행해도 큰 동요가 없을 만한 국가다. 일례로, 싱가포르는 2030년 내연기관차 퇴출이라는 세계적으로 빠른 전동화 전환 스케줄을 공표한 상태다.
시장의 변화를 빠르게 감지하고, 신속하게 대응하며, 대응 방식에 대한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얻는 HMGICS의 목적에 싱가포르가 가장 부합하는 시장인 것이다.
정 법인장은 “미래모빌리티는 도시 발전과 아울러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며 “HMGICS는 미래 모빌리티에 대해 싱가포르 현지 사회와 연구를 하고 모빌리티를 어떻게 제공할지 고민하며 전체 밸류체인을 혁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HMGICS는 생산, 고객 경험(CX) 등 여러 기능을 갖추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기능은 연구개발(R&D)이다. 연구개발 시설에 있어 최적의 입지는 우수 인재 확보에 유리한 곳이다.
싱가포르는 인재의 산실로 유명한 곳이다. 영국 대학평가기관 타임즈고등교육(Times Higher Education) 평가에서 세계 톱20에 포함된 싱가포르국립대(NUS)와 신흥대학 세계 1위에 오른 난양이공대(NTU)에서 정기적으로 우수 인재들이 배출될 뿐 아니라, 인재 우대정책으로 인도와 동남아 등 외부 인재들도 흡수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21일 HMGICS 준공과 함께 난양이공대 및 싱가포르 통상산업부 산하 기술개발연구소인 과학기술청(A*star)과 기술 개발 생태계 구축 MOU를 체결하고 합작 연구소 설립을 발표했다.
합작 연구소에서는 싱가포르의 우수 인재를 활용해 인공지능, 로보틱스, 메타버스 등 차세대 자율 생산 운영 체제에 대해 연구할 예정이다. 이렇게 연구된 운영체제는 실제 HMGICS 현장에서 검증을 거쳐 전 세계 공장으로 확장된다.
세부적으로는 우수한 AI, 로보틱스, 3D프린팅 등과 같이 인더스트리 4.0 핵심기술을 활발히 연구하고 산업‧학계‧정부의 협업을 통한 기초기술부터 상업화까지 포괄적으로 접근할 예정이다. 이번 현대차그룹의 합작 연구소 설립도 이런 하이테크 기술 분야의 우수한 리소스를 적극 활용해 미래 스마트 제조혁신을 가속화하려는 목적에 기반한다.
HMGICS가 싱가포르 최초의 자동차 공장이자 혁신 모빌리티 연구시설이라는 점에서 현지 인재들의 관심도 뜨겁다.
현지에서 만난 숀 림(Shaun Lim) HMGICS 전략 파트너십 매니저는 “HMGICS는 현대차그룹의 첫 번째 글로벌 혁신 센터이자 테스트베드로서 기대가 크다”면서 “싱가포르는 현재 자동차 관련 생태계가 없는 상황인데 직접 전기차를 생산하며 진행하기에 자부심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HMGICS에 대한 현지 대학생들의 평가에 대해서도 “싱가포르 정부가 AI 등 신기술에 관심이 많고 투자를 많이 하고 있는 가운데, HMGICS를 통해 새로운 기술을 같이 개발하는 것에 (학생들도) 많은 관심을 갖고 기대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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