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척장신 관우의 의리, 중국 신화가 된 이유
[이준목 기자]
관우(關羽)는 중국 후한말-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으로,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하여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소설과 민담을 통하여 정립된 관우의 캐릭터는, 초인적인 무예는 물론 주군과 형제를 위하여 목숨까지 거는 '충의의 화신'으로 알려지며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관우에 대한 평가는 사후 갈수록 높아지며 제후와 왕을 거쳐, 심지어는 신(神)으로 추종될만큼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숭배의 대상이다. 관우 열풍은 우리나라에도 전파되는데, 현재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 동묘(정식 명칭 東關王廟, 대한민국 보물 142호)는 관우의 제사를 기리기 위하여 지은 사당이다.
역사 속에 등장한 수많은 무장 중 한 명에 불과했던 관우는 어떻게 인간을 넘어선 신화가 될 수 있었을까. 29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동묘의 주인 관우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편을 조명했다.이성원 전남대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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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거벗은 세계사> 중 한 장면 |
| ⓒ tvN |
관우는 키가 9척(약 207cm)에 이르는 거구로 외모는 길고 아름다운 수염에 대추를 연상시키는 붉은 얼굴, 누에 같은 눈썹, 봉황 같은 눈매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젊을 때부터 용력이 출중하고 의협심이 강했던 관우는, 고향에서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리던 악덕 지주를 처단하고 몇 년간 도망자로 방랑의 세월을 보냈다.
당시 한나라는 중앙 조정의 부패와 황건적의 난 등이 겹치며 사회적으로 극도로 혼란한 난세에 접어들고 있었다. 방랑하던 관우는 중국 북부에 위치한 유주 탁현에서, 마침내 평생의 동반자가 되는 유비와 장비를 처음 만나게 되어 의기투합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세 사람이 복숭아 밭에서 의형제를 맺었다는 '도원결의' 라는 이벤트로 묘사하면서 장대한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다.
이후 관우는 장비와 함께 유비를 주군으로 모시고 중국 각지를 떠돌며 각종 전공을 세운다. 관우는 탁월한 용맹과 무예로 명성을 떨쳤는데, 연의에서는 이러한 관우의 초인적인 활약상을 더욱 부각하는 에피소드가 상당하다.
연의 초반부, 유비 삼형제가 반동탁 연합군에 참전했을 때 동탁의 맹장으로 명성을 떨치던 화웅을 관우가 일대일 대결로 제압한 일화가 대표적이다. 당시 관우는 출전을 앞두고 조조가 권한 술을 사양하며 '술이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베어오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실제로 관우가 단칼에 화웅의 목을 베고 돌아왔을 때 술은 아직 식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관우가 화웅과 대결하여 승리했다는 일화는 실제가 아닌 연의의 창작이지만, 극 중 관우의 무용이 처음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되는 순간을 극적으로 연출하며 독자들에게 강렬한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장면이다.
관우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충의'다. 관우는 일생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유비에게 변함없는 충성과 의리를 지켰다. 다만 일시적으로 조조의 수하에 들어갔던 시절도 있었다. 연의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관우가 숙적인 유비-조조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도 양쪽 모두에게 신의를 지키려는 '삼각관계 브로맨스' 구도를 형성하며 관우의 행적을 더욱 극적으로 묘사한다.
군웅할거 시대에 서주 일대에 자리 잡은 유비 세력은 조조의 공격을 받아 패퇴한다. 유비와 장비는 뿔뿔이 흩어지고 홀로 남은 관우는 포위되자 유비의 남은 아내들을 지키기 위하여 부득이하게 조조에게 항복한다. 하지만 관우는 투항하면서도 '언제든 유비의 행방을 알게 되면 형수들과 함께 떠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유비에 대한 신의를 지켰고, 조조도 이를 기꺼이 수락한다.
의리 택한 관우
관우를 탐냈던 조조는 갖은 정성을 다해 자신의 부하로 회유하려 했으나 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중원의 패권을 놓고 당대 최대의 군벌이던 조조와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격돌하게 되자 관우는 조조군에 참전하여 원소군의 맹장 안량을 참살하는 등 각종 전공을 세운다.
그런데 관우는 유비가 원소 진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시 관우는 조조군의 장수로 이미 출세가 보장되었음에도, 망설임 없이 아무 가진 것 없는 옛 주군 유비에게 되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조조도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가면 후환이 될 것을 예상했지만 결국 관우와의 신의를 지키는 길을 선택한다. 연의에서 이 장면은 배신과 모략이 난무하는 난세에서 드물게 '남자들의 순수한 우정과 의리'를 가장 낭만적으로 그려낸 명장면으로 꼽힌다.
관우의 성격과 의리를 보여주는 연의의 또 다른 일화로 '화용도' 에피소드가 있다.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퇴각하다가 화용도라는 지역을 통과하게 된다. 유비군으로 돌아간 관우는 화용도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조조와 적으로 다시 조우한다.
하지만 관우는 절호의 기회에도 과거 조조에게서 받은 은혜 때문에 망설이다가, 끝내 그를 놓아준다. 당시 관우는 군령장에서 조조를 놓칠 경우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다짐했음에도 끝내 신의를 택하는 상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화용도 일화 역시 연의가 만들어낸 창작이지만, 의리를 중시하는 관우의 캐릭터를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깊이 각인시킨다.
유비의 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관우는 주요 거점인 형주(현재의 후베이성) 일대를 담당하는 사령관이 된다. 유비가 서천(쓰촨)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는 사이에, 관우는 단독으로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여 조조의 영역인 번성을 공략하고 조조군을 대파하여 천하에 명성을 떨친다.
당시 관우의 위세가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 조조는 두려움을 느껴서 수도 천도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연의에서는 관우가 전투 중 독화살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지만 '명의' 화타를 만나 뼈와 살을 긁어내는 큰 수술을 받으면서 아픈 기색 없이 태연하게 술과 바둑을 즐겼다는 괄골요독(刮骨療毒)의 창작 일화가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대를 풍미한 관우에게도 서서히 몰락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비와 손권 세력은 처음엔 조조에 맞서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형주 영유권 문제로 오랫동안 갈등을 빚고 있었다. 조조는 이 틈을 노려 손권을 회유하여 배후에서 관우를 습격하고 형주를 양분할 것을 제안한다.
관우는 조조군을 상대하다가 생각지 못한 손권의 기습으로 협공을 당하게 된 데다, 내부에서는 부하 장수 였던 미방과 부사인의 배신까지 겹친다. 멀리 떨어져있던 유비는 미처 관우를 구원할 틈도 없이 상황이 급변했다. 관우는 결국 형주를 상실하고 퇴각을 거듭하다가 추격해 온 손권군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연의에서 손권은 관우를 회유하려 하지만, 관우는 '몸은 비록 죽더라도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며 투항을 거부하고 끝내 처형당한다. 2019년 12월, 그렇게 삼국지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던 관우는 쓸쓸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최대의 수혜자
그렇다면 실제의 관우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관우는 정식 역사기록에서도 만인지적(萬人之敵, 홀로 1만 명을 대적할 만한 용맹한 장수)이라 불릴만큼 당대의 손꼽히는 무장이었음은 사실이나, 한편으로는 '고지식했고 교만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정사 삼국지에서도 관우전의 기록은 고작 965자에 불과할 만큼, 동시대에서도 역사적으로 높은 비중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찌 보면 관우야말로 <삼국지연의>가 만들어낸 최대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관우 사후 오랜 시간이 흘러 송나라와 명나라 등 한족 통일 왕조들이 들어서면서 정통성을 강조하는 성리학과 도교의 융성,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 인한 난세라는 환경이 겹쳐지며 관우가 재조명받기 시작한다. 중국인들은 '촉한정통론'을 통하여 관우가 몸담았던 유비 세력을 한족의 정통성을 잇는 왕조로 재평가됐고, 끝까지 유비에게 충성을 바친 관우를 '의협과 충의의 상징', '난세속 한족의 영웅'으로 숭상한다.
관우를 향한 신격화는 민간에서 시작되어 후대로 갈수록 높아지며, 제후에서 황제, 심지어는 전쟁의 신인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추존되기에 이른다. 지금도 중국 각지에서는 관우의 사당이 존재하며 중국의 대표적인 위인인 공자의 묘(약 3천 개)보다 백배나 더 많은 약 30만 개 이상으로 추정된다. <삼국지>의 수많은 영웅호걸 중에서도 신으로까지 추앙받은 것은 오직 관우뿐이며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이례적이다. 명나라 만력제, 청나라 강희제 등 역대 중국 군주들도 열렬한 관우 숭배자였다고 한다.
관우의 역사적 행적은 소설로 인하여 미화된 부분도 많지만, 최소한 그가 후한-삼국시대라는 대혼란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유혹과 시련에도 끝까지 자신만의 의협과 신의를 지켜낸 인물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우의 강직한 이미지는 일개 장수였던 그가 인간을 뛰어넘어 신화의 반열에까지 오를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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