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은 개, 이름은 새끼요"…조선판 계급전쟁 그린 '기생충' 그 남자
불에 탄 경복궁…왜란 중 민란 그려
‘기생충’ 눈가린 포스터 디자인한
김상만 10년만의 감독 복귀작
“요즘 흙수저·금수저 계급의식…
차이 만드는 시스템 돌아볼 때죠"
“신분은 개, 이름은 새끼요.”
천민 출신의 의병 천영(강동원)은 조선을 침략한 왜장 겐신(정성일)이 이름을 묻자, 이렇게 소개한다. 1592년 조선, 왜란이 발발하자 선조(차승원)는 북으로 달아나고, 왕이 버린 경복궁은 굶주린 채 개‧돼지 취급받던 성난 민심에 불타오른다.
지난 2일 개막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작품 최초 개막작으로 공개됐던 영화 ‘전, 란’(감독 김상만)이 11일 넷플릭스를 통해 출시됐다. 글로벌 영화 순위 3위(13일 플릭스패트롤 집계)에 올랐다.
"요즘 흙수저·금수저…400년 전 조선과 닮아"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새롭게 계급이 형성되고 있는 21세기 현재와 400여 년 전 모습은 결코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김상만(54) 감독을 14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전, 란’은 미술감독 출신으로, 현대 사회 계급 갈등을 그린 영화 ‘기생충’(2019)의 눈 가린 영화 포스터를 디자인해 주목받았던 그가 영화 ‘더 테너-리리코 스핀토’(2014) 이후 10년 만에 연출로 복귀한 작품. 박 감독이 자신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 미술을 맡았던 그에게 직접 연출을 제안하면서다.
“연출로서 스승 같은 박찬욱 감독의 손을 거친 작품에 누가 될까 부담도 있었다”는 그는 “기존에 사극에서 봤던 풍경을 배제하기 위해 로케이션과 복식 고증‧연구를 철저히 했다. 순천 의병 주둔지로 나온 신라시대 지어진 1000년 넘는 온달산성은 높고 험해서 엄두를 못 내는 로케이션인데, 영화에 담을 수 있어 감사했다”고 말했다.
Q : -극 중 계급 갈등을 현대사회 ‘흙수저‧금수저’에 빗댔는데.
“지금도 모든 사람이 계급의식을 떠날 수 없다. 각자 위치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이를 당연시하느냐, 뛰어넘어 연대하느냐의 선택이다.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에 대해 우리가 다시 한번 의문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Q : -경복궁이 불탄 폐허는 어떻게 고증했나.
“당시 경복궁은 도망친 선조에 대한 분노로 백성이 불 질렀다는 설과 한양에 침입한 의병이 불 질렀다는 2가지 설 모두 기록이 있다. 전자가 영화의 ‘톤앤매너’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궁이 무너지자 선조가 (민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국부로 이를 재건하려는 과정이 핵심이었다.”
강동원 21년만에 첫 노비 "봉두난발 자처"
Q : -무너진 경복궁에 돌아온 선조의 얼굴과 왜구에 잘린 백성의 코가 겹쳐지는 장면이 강렬하다.
“일본 병사들이 포상을 받으려고 어린애고 여자고, 전투 안 한 일반 백성 코까지 자르다 보니 수염이 붙은 입술까지 잘라오라 했다더라. 역사 고증 때문에 왕에게 직접 복수하는 내용을 그릴 수는 없지만, 흉측하게 훼손된 시체를 왕에게 겹쳐 보임으로써 분노한 민심이 용안을 훼손하는 효과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려 했다.”
흔히 사극 속 잘생긴 양반, 투박한 몸종 이미지를 뒤집었다. “순수 청년부터 광기로 흑화한 모습까지 연기 차력 쇼”(김상만)가 필요했던 종려 역은 박정민이 맡았다. 강동원 캐스팅은 잘생긴 노비가 나오는 이말년 작가의 웹툰 ‘조선쌍놈’에 “알게 모르게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김 감독은 “강동원이 첫 등장부터 봉두난발 이미지를 자처했다. 마치 프로듀서처럼, 작품을 객관적으로 보고 큰 틀에서 연기에 임하는 데 놀랐다”고 말했다.
Q : -한국‧일본을 비롯해 9개국에서 넷플릭스 영화 1위다. 해외 시청자가 어떤 점을 봐줬으면 하나.
A : “침입자(왜적)에게 저항하는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니까, 해외에서 그런 관점으로 봐주시면 좋겠다. 서양에서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사무라이 문화에 대한 개인적 반감도 일부 담았다. 왜장이 죽으면 부하들도 다 자결하거나 하는 것들. 당장 살기 바쁜 상황에서 그런 걸 따지는 게 의병 범동(김신록) 같은 현실적인 인물에겐 불필요해 보일 수 있다. 그런 시각을 전달하기 위해 왜장은 오히려 더 전형적으로 절도 있게 그렸다.”
'지옥' 그 배우에 꽂혀 의병 성별 바꿔
Q : -범동 역은 원래 남자 의병을 바꾼 것이라고.
A : “‘지옥’(넷플릭스 드라마)의 김신록씨를 보고 무조건 캐스팅하고 싶어서 있던 역할에 성별만 바꿨다. 전형적 캐릭터였는데 의미가 확 바뀌더라. 환란의 시대 좀 더 약자 위치가 부각되기 쉬운 여성의 계급적 부분까지 보여줬다. 봉건제 시스템에 갇힌 인물들을 한 발짝 떨어져 한심하게 바라보는, 가장 통찰력 있는 캐릭터로 발전했다.”
박찬욱 감독에 대해 그는 “쉼표 하나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는다. 특히 중언부언하거나 신파적인 요소에 거부감이 있다”고 설명했다. ‘전, 란’ 공개 후 가장 호응이 컸던 발이 잘리고도 일본어 통역을 멈추지 않는 왜장의 조선인 통역사(고한민) 역도 “언어 차이에서 오는 ‘커뮤니케이션 실수’를 박 감독님이 흥미로워”하며 탄생한 캐릭터다. 김 감독은 “더 재밌게 하려고 언어유희도 넣었는데, 이 정도의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며 반겼다. 오프닝장면의 판소리풍 ‘노비가’도 판소리 명창에 감수받아 없던 노래를 새로 만들어 넣었다.
‘전, 란’은 큰 스크린으로 봐야 할 작품인데 극장 개봉하지 않는 게 아쉽다는 반응도 나온다. 김 감독은 앞서 준비하던 다른 영화들이 번번이 중단된 끝에 넷플릭스를 통해 ‘전, 란’이 성사됐다며 운을 뗐다. “좋은 기회였다. 넷플릭스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 같은 느낌도 있고 동시에 전 세계에 작품이 알려지는 이점도 부정할 수 없다. 촬영하며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는 그는 OTT 업계가 제작사에 흥행 배분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해선 “섣불리 얘기하기 어렵지만 불합리함이 정말 있다면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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