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이라면 꼭 답사해야 할 순례길
[윤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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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하도 해안데크길에 서 있는 개선장군 이순신 동상 . |
| ⓒ 윤현정 |
열세 척! 수백 척의 함대를 거느린 왜군 앞에 조선 수군의 형세는 너무도 빈약했다. 전라도 육지 전역은 종횡무진 왜군의 약탈로 신음하고 있었다.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시 전라도가 똘똘 뭉쳐 왜군을 막아내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실패하자, 정유년 재침시 부하들에게 "전라도 사람은 아기, 부녀자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 씨를 말리고 산천초목을 초토화 시켜라!"라고 분노에 찬 엄명을 내려 왜군의 잔악성은 극에 달했다. 실로 친일파의 전라도 공격은 이때에서 비롯되었다.
공은 법성포, 고참도를 전전한 끝에 1597년 9월 21일 고군산도로 옮겨 12일을 머무른 후 다시 남하하여, 10월 9일 우수영으로 돌아와 보니, 왜군이 우수영을 불태우고 파괴해 버려 폐허가 된 상태였다. 공은 목포 근처를 염두에 두고, 우선 10월 11일 안편도(팔금도)로 이진하여 18일 간 머물렀다. 그런데 안편도는 서쪽과 북쪽의 조망은 좋았으나 동쪽과 남쪽의 시야가 좋지 못했으며, 육지와도 상당히 떨어져 있어 왜군의 형세를 살피기에 부족한 면이 있었다.
난중일기(1597.10.29.) 맑음. 사경(새벽 2시경)에 첫 나팔을 불고 배를 출발해 목포로 향하는데, 이미 비와 우박이 섞여 내리고 동풍이 약간 불었다. 목포에 도착했다. 보화도寶花島로 옮겨 정박했다. 된하늬바람(북서풍)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적합했다. 그래서 육지에 올라 섬 안을 돌아보니, 형세가 장점이 많았다. 머물러 진을 치고, 집을 지으려 계획했다.
그래서 공은 정박이 가능한 다른 지역을 물색하다가 1597년 10월 29일 보화도(고하도)에 닻을 내리고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게 된 것이다. 공은 고하도가 영산강 입구에 위치하여 병력 보충과 군량 조달이 편리하고, 지리적으로 북서풍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여 전선을 건조할 목재가 풍부하다는 점에 마음이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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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달산에서 바라본 고하도 풍경 . |
| ⓒ 윤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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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달산에서 바라본 목포 시내 전경 . |
| ⓒ 윤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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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하도 전망대 . |
| ⓒ 윤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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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의 비상. 고하도는 ‘용섬’이라고도 한다 |
| ⓒ 윤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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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고하도 해안데크길 . |
| ⓒ 윤현정 |
<난중일기>(박종평 옮김, 글항아리, 2021)에 나오는 내용을 잠시 정리하면, 공은 고하도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월동 준비를 하였다. 1597년 11월 6일 새집 지붕을 이었고 군량 창고도 같이 지었다. 7일에는 새집의 마루를 놓았고, 8일에는 사방 벽에 흙을 발랐고 수루도 만들었다.
11 일에는 새집도 지어졌다. 남서쪽으로 길이 1km, 높이 2m, 폭 1m의 석성을 쌓았다. 성벽을 쌓고, 일부는 지형과 바위를 이용한 산성이었다. 지금도 모충각 부근 등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왜군이 해남에 남긴 군량 300여 석을 접수했고, 각 고을 수령이나 유력자들도 양곡을 가져왔다.
공은 아들 면의 죽음에 비통하면서도, 군무에 충실했다. 적의 배를 구별하고 군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 제도를 운용하였다. 피란민들은 재물과 곡식을 다 싣고 바다에 들어왔기에 쌀을 내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고, 통행을 금지하지 않아 기뻐했다.
이로써 열흘 만에 일만 석의 군량미를 비축하였다. 또 백성을 모아 구리와 쇠를 날라 대포를 만들고, 나무를 잘라 전선 40여 척을 건조해 함대 수가 기존의 13척을 더하여 모두 53척으로 늘었다. 병력을 늘이고 포상도 받아 오랜만에 행복감을 맛보다
하는 일마다 정성을 다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전쟁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민심이 더욱 튼튼해져 섬 안이 시장처럼 붐볐다. 초가집을 짓고, 막사를 지어 판매해 살게 하니 섬 안에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한산도 여러 장수가 붕괴하여 흩어질 때 각자 도망쳐 흩어졌는데, 공이 날마다 비장을 파견해 여러 섬에 알려 장사壯士가 구름처럼 모여 군대의 함성이 크게 진동했다.
1천 명에 불과하던 병력이 2천 명으로 불어났다. 함대 수와 병력에서 원균이 지휘하던 칠천량해전으로 수군이 풍비박산이 된 이후, 그나마 비로소 조선 수군다운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한편 고하도에서 머문 수군에게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데 대한 포상이 내려왔다. 공은 고하도에서 실로 오랜만에 안정감과 자신감을 되찾아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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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충무공 기념비 . |
| ⓒ 윤현정 |
이 기념비는 1722년(경종 2) 세워졌으며 몸돌 높이는 227cm, 너비 112cm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당시에 공이 고하도를 전략 기지로 삼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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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하도 숲속 정자 . |
| ⓒ 윤현정 |
공은 고하도에서 조선 수군 재건에 성공함으로써 원균의 모함으로 파직된 이후 처음으로 자신감과 안정감을 찾고 노량해전 승리의 발판을 만들게 된다. 고하도에서 전선과 군량, 군사의 증원으로 수군 재건이 끝난 공은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왜군을 몰아내고,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전라우도의 백성들과 함께 이러한 힘을 기르고 재기한 고하도삼도수군통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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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충무공유적지 초입에 피어있는 코스모스 . |
| ⓒ 윤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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