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자리잡은 박정희
박정희 이데올로기
황병주 지음
돌베개, 624쪽, 3만원

어떤 이들에게 그는 보릿고개를 끊어낸 ‘위대한 지도자’이지만, 다른 이들에게 그는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은 ‘무자비한 독재자’일 뿐이다. 박정희(1917~1979)라는 이름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뜨거운 숭배와 가장 깊은 증오가 교차하는 기이한 좌표에 놓여 있다. 박정희 시대를 파고들고 있는 역사학자인 저자는 박정희를 단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지 않고 박정희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들여다본다. 저자는 “그의 육신은 이미 죽어 자연으로 돌아간 지 오래지만 이데올로기 박정희는 맹렬하게 여전히 살아 있다”면서 “어쩌면 한국 사회는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저자는 박정희 이데올로기를 ‘군사적 자유주의’라고 명명한다. 저자의 설명을 빌리면 박정희 체제는 위로부터는 “민족주의와 군사주의를 버무려 파시즘을 방불하는 반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고자 했다면, 아래로는 “시장경제의 자유경쟁을 토대로 하는 자유주의”를 번성시키게 된다. 박정희 체제는 “파시즘의 억압과 시장의 경쟁이 초래하는 극심한 불평등 사이의 균형은 늘 위태로운 상태”였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누구도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천부 인권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사상에서 출발했다. 그렇게 보면 정치적인 면에서 박정희 체제는 반자유주의적이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의 반자유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저항 세력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에 자유주의를 확산시키는 토대가 됐다. 반면 경제적인 면에서 박정희 체제는 능력주의와 경쟁에 입각한 자유주의를 철저하게 관철시켰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책의 중심은 박정희 체제의 이데올로기지만 개인의 삶과 무관할 수는 없다. 책의 전반부는 박정희의 생애와 그의 이데올로기적 토양을 살펴본다. 저자는 ‘사람은 아버지보다 시대를 닮는다’는 아랍 속담을 인용하며 박정희가 살았던 60년 넘는 개인의 시간을 우리의 근현대사와 접목시키기도 한다.
박정희는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비교적 평범한 소농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다. 구미보통학교 시절 박정희는 우수한 성적을 바탕으로 교사의 신임을 얻고 급장이라는 ‘권력 관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저자는 “보통학교에서의 초보적 ‘출세’가 그를 근대적 지식-권력, 힘의 논리에 눈뜨게 했다”고 말한다. 박정희는 구미보통학교 개교 이래 처음으로 대구사범학교에 합격한다. 대구사범 입학은 일제의 식민 지배 질서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에서는 능력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첫 관문이었다. 당시 사범학교는 일제가 ‘충량(忠良)한 황국신민’을 양성할 목적으로 만든 교육기관으로 학칙과 규율이 엄했다.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했고 24시간 교육과 훈련, 감시가 이뤄졌다. 저자는 “사범학교 생활을 통해 박정희가 일차적으로 배운 것은 군사적 규율과 일사불란한 명령체계, 즉 ‘군사적 근대성’이었다”며 “그 영향은 사관학교와 군대 경험을 통해 평생을 갔다”고 말한다.

사범학교 시절의 박정희를 정리할 수 있는 말은 ‘우울’이었다. 성적도 내내 낙제를 면할 정도였다. 학업 성적으로 거의 모든 것이 결정됐던 보통학교와 달리 사범학교에서 박정희는 식민지적 차별 속에서 성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힘의 논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사범학교 시절 박정희가 주로 읽었던 책은 ‘나폴레옹 전기’와 히틀러의 ‘나의 투쟁’, ‘플루타르크 영웅전’ 등 영웅들의 이야기였고, 특히 ‘나폴레옹 전기’는 집요하리만치 탐독했다고 한다. 좌절된 욕망 속에서도 영웅을 동경하면서 계층 상승과 권력 욕망은 더더욱 커졌다. 식민지적 차별을 뛰어넘어 권력을 향한 열망과 식민지적 우울의 간극을 일시에 돌파할 수 있는 길은 제국 일본과 일체가 될 수 있는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군인이 되기 위한 집념 속에서 박정희는 마침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그 뒤 일본 육사를 거치면서 능력 있는 사람만이 출세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와 상명하복의 군사주의를 체화한다.
박정희가 자주 인용한 서양 속담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였고, 새마을운동의 핵심 표어도 여기서 나온 ‘자조(自助)’였다. 저자는 “자유주의와 능력주의가 대세를 이룬다는 것은 곧 경쟁 원리가 사회 상식으로 확고하게 정착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박정희 시대가 끝난 지는 오래됐다. 하지만 경제적 능력주의와 서열화된 권력 관계는 여전히 ‘박정희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박정희의 신념은 이제 ‘패배는 오로지 네 능력의 부족 때문’이라는 가혹한 능력주의의 그늘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책이 묻는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과연 박정희 체제의 군사적 자유주의의 틀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벗어났는가.” 저자 역시 “21세기 한국은 박정희가 경험한 것 이상의 치열하고 가혹한 경쟁의 무대이며 숱한 포스트 박정희들이 양산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박정희라는 거대한 유령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를 찬양하거나 저주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 내면에 깊숙이 박힌, 박정희 이데올로기를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지며 책을 마무리한다. “박정희 체제가 파시즘과 자유주의를 뒤섞은 통치성을 통해 20세기 한국을 주조해냈다면 21세기 포스트 박정희 체제의 그것은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가.”
·박정희 없는 박정희 시대
·박정희의 삶과 시대를 깊이 볼 수 있다
·현학적인 문장들이 거슬린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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