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사관 기밀문건도 분석한 한국군 내 이들의 파워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간도특설대'는 일제강점기 만주국이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및 팔로군 등 항일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한 부대다. 이들은 독립군은 물론 만주에 이주한 선량한 조선인을 주로 탄압한 악명 높은 부대였다. 백선엽, 김백일 등이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
ⓒ 서해문집 |
2016년에 <한국사학보> 제65호에 수록된 허은 고려대 교수의 논문 '냉전분시대 대(對) 유격대 국가의 등장'에 "1972년까지 국가체제의 재편을 주도한 이들이 만군 출신"이었다는 대목이 있다. 유신체제에도 개입했을 정도로 간도특설대를 비롯한 만주군 출신들의 생명력은 질겼다.
이들은 8·15 해방 뒤에 쇠락이 아니라 꽃길을 걸었다. 그러면서 곳곳에 영향력을 심어 마치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만들어놨다. 이들의 대표주자인 백선엽이 두 다리 쭉 뻗고 누울 수 있는 것은 그런 영향력이 보호막이 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타래가 얽히고설키게 되도록 만든 또 다른 간도특설대 출신은 친일파 임충식이다. 1967년 4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합동참모의장을 지내고, 1968년 8월부터 1970년 3월까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고, 1971년에 이어 1973년까지 국회의원 재선을 했다. 위 논문의 언급처럼 1972년 유신체제 선포를 전후해 경력상의 절정기를 이룬 인물이다.
임충식은 3·1운동 3년 뒤인 192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했다. 그는 일찍부터 만주와 인연을 맺었다. 1936년에 졸업한 학교는 옌지(연길)중학교다. 만주는 그가 친일파의 길을 걷는 토대가 됐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임충식 편은 "1941년 만주국군 간도특설대 제3기로 자원입대해 중사를 거쳐 준위까지 올랐다"고 설명한다.
사전은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라며, 임충식의 복무 기간에 일어난 일을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모두 108차례 공격했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 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임충식보다 두 살 많은 백선엽은 1993년 일본에서 펴낸 회고록 <대(對)게릴라전, 아메리카는 왜 졌는가>에서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는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하다며 자기 부대를 높이 평가했다. 이 부대에서 중사가 되고 준위가 된 임충식은 1945년 일제 패망으로 경력 단절을 겪게 된다. 그러나 잠시였다.
그를 포함한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얼마 안 가 남한의 주류 집단으로 떠올랐다. 일제 패망 뒤에 만주 현지에 남았거나 이북까지만 남하한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 좀 더 남하해 이남까지 내려온 사람들이 그런 기적을 경험했다. '사우스 코리안 드림'이 만주 친일파들에게 펼쳐진 셈이다.
전직 준위가 사병으로 재입대해 승승장구
2008년에 <한일관계사 연구> 제31집에 실린 김주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의 논문 '만주지역 간도특설대의 설립과 활동'은 "북으로 간 경우 생사 확인이 어렵기 때문에 활동상을 파악하기 곤란하지만, 한국의 경우 상당수는 국군 창립에 참여하여 한국군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말한다.
2010년 3월호 <신동아> '1962년 미 대사관 기밀문건'에 소개된 1962년 8월 17일 자 주한미국대사관 보고서는 한국군 파벌을 분석하는 대목에서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세력이 바로 소위 만주파"라고 지적한다. 간도특설대가 포함된 만주군 출신들의 파워를 높이 평가했다.
이 보고서에는 임충식도 거명돼 있다. 해방 당시에 준위였던 그가 만주파의 일원으로 이 보고서에 언급될 수 있었던 것은 8·15로 인한 경력 단절이 더 큰 도약의 계기가 돼 해방 7년 뒤인 1952년에 육군 준장이 됐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 그는 23세였다. 이때 처지가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문구가 <친일인명사전>에 있다. "해방 후인 1946년 2월 전라남도 광주의 국방경비대 제4연대에 사병으로 입대"했다는 문구다. 전직 준위가 사병으로 재입대했다. 그 심경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입대 3개월 만에 연대장 추천으로 국방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가 육사 1기가 된다. 한 달 뒤 육군 참위(소위)가 되고 소대장·대대장·연대장·사단장·군단장으로 승진한다. 그러다가 육군참모차장과 합참의장을 거쳐 국방부 장관이 되고 재선 의원이 된다. 패전국 군대의 준위 계급장을 달고 실직했다가 한국군 사병으로 입대한 군인이 기적적인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근본 배경은 위 김주용 논문에 언급된, 간도특설대 출신들이 국군의 중추가 되는 시대 상황이다. 만주파가 득세하고 간도특설대 출신들이 맹활약하는 분위기 속에서 임충식이 극적인 주인공이 됐다.
해방 이후의 남한 반공정권들은 북한과 언제라도 한판 대결을 벌일 것처럼 선전하곤 했지만, 실제로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고 다른 데서 상대를 골랐다. 제주 4·3이나 광주 5·18과 역대 공안정국에 나타나듯이, 반공정권들은 독립운동가 출신들이나 진보진영을 북한과 연관시키면서 마치 게릴라 다루듯 소탕하고 진압했다. 남한 정권들은 '빨갱이'에 대한 적대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냉전을 확대·재생산했다.
이런 구도는 간도특설대 출신들에게 유리했다. 이들이 남한에서 꽃길을 걸은 것은 이 나라에서 친일파가 득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대 세력을 게릴라 다루듯 소탕하는 남한 정권들의 권력 유지 방식이 이들에게 익숙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 임충식 |
ⓒ 위키미디어 공용 |
익숙한 임무를 받은 점은 이들이 여타의 군부 파벌보다 유리한 조건에 서게 만들었다. 임충식 같은 이들이 남한 사회를 주름잡은 이유는 이로써 설명된다.
백선엽(대전현충원 안장)과 임충식(서울현충원) 외에, 신현준 초대 해병대사령관(대전현충원), 김석범 제2대 해병대사령관(대전현충원), 김백일 육군 제1군단장(서울현충원), 송석하 육군본부 기획통제실장(대전현충원) 등도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이들이 국립묘지에 편히 누워 있을 수 있는 것은 이들이 활동한 대한민국 정치환경이 만주국의 정치환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만주국에서는 해방 이후의 남한처럼 안보를 중심으로 사회적 가치들이 결합했다. 안보 분야와 경제·사회 개발 분야 등이 뒤엉키면서 국민들을 억누르는 구조가 나타났다.
위의 허은 논문은 유격대나 게릴라에 대한 소탕과 탄압이 핵심 가치가 되는 나라를 '대유격대 국가'로 지칭하면서 "간도특설대를 포함한 만군 출신자들은 이러한 개발 영역과 안보 영역을 결합시킨 일제의 숙정공작 방침을 누구보다 많이 접하는 위치에 있었다"라며 "전후 한반도가 냉전의 최전선으로 전화되어갈 때 일제 방공전사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전파하며 냉전 방공전사로 부활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준위 계급장을 떼고 사병 계급장을 달았을 때의 임충식은 자신이 이곳에서 국방부 장관까지 되리라고는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됐고 태극무공훈장, 베트남 최고훈장, 미국 은성훈장 등도 달게 됐다.
만주 현지에 남거나 이북까지만 남하한 동료들과 달리, 그는 이전의 근무 환경과 흡사한 곳을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1949년 9월에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 참모장으로 발탁돼 이른바 좌파 소탕전에 나선 것은 그의 특기를 살리는 일이었다. 잘할 수 있는 일을 해방 이후에도 계속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임충식은 일제강점기 만주국에 가장 근접한 정치체제가 1972년 남한에서 출현하는 것을 보고 나서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나이 52세 때의 일이다.
그가 엄밀한 의미의 친일재산을 축적한 기간은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7년이다. 하지만 그는 그때와 유사한 근무 환경을 해방 이후에도 만났다. 만주국에서 받은 월급과 이승만·박정희로부터 받은 월급은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에게 봉급을 주는 자들은 해방 이전(일본 괴뢰)이나 이후(친일세력)나 별 차이가 없었고, 그가 추격하는 세력 역시 그 이전(항일투사)이나 이후(항일투사 출신과 진보진영)나 별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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