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벌한 ‘후판 가격 전쟁’… 日 상생 모델에 ‘답’ 있다
후판은 두께 6㎜ 이상의 두꺼운 철판이다. 배를 만들 때 다양한 철강 재료가 필요 한데 후판은 배의 외형을 만들 때 필요하다. 그만큼 선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조선사가 경쟁력을 가진 초대형유조선(VLCC)을 한 척 만드는 데는 후판 약 3만6000t이 필요하다. 2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급 초대형컨테이너선에는 5만t에 가까운 후판이 사용된다.
후판은 선박 제조 비용의 약 2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후판 가격 변화에 두 업계가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후판 가격이 t당 1만원만 올라도 초대형유조선은 3억6000만원, 초대형컨테이너선은 5억원의 원가가 바로 상승하게 되는 셈이다. 조선사는 원가절감을 이유로 후판 가격 인상을 꺼린다. 반면 철강사는 영업이익을 높여야 한다는 이유로 후판을 제 값 받고 팔려고 한다.
지난 20년간 업황에 따라 후판 가격 협상의 주도권은 조선사와 철강사가 번갈아가면서 잡았다. 2000년대 중후반 조선사가 황금기를 맞았을 때는 조선사가 을의 입장에 처했다. 당시 조선사의 최대 과제는 후판을 얼마만큼 확보하느냐 였다. 2008년 한 해 조선업 후판 수요는 930만t이었지만 당시 국내 철강업체들이 생산 가능한 조선용 후판은 약 640만t에 불과했다. 부족한 후판 약 300만t은 일본 등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수급 불균형에 후판 가격은 고공행진했다. 가격의 주도권 역시 철강사가 쥐었다.
하지만 2010년 전후로는 전세가 역전됐다. 국내 철강사들이 후판 공장을 세우며 공급량을 늘리면서다. 그러나 후판을 주로 사가던 조선사에 불황이 깃들며 수요가 줄었다. 설상가상으로 중국이 철강 산업 육성에 들어가면서 경쟁에 뛰어들었다. 결국 조선업이 호황이던 시절 t당 110만원까지 기록했던 후판 가격은 2015년 이후 t당 50만원 선으로 추락했다.
당시 철강사들은 업황 악화로 구조조정까지 나서야 했던 조선업을 배려해 가격 인상을 최소화하기도 했다. 이는 2017년 품질이 떨어지는 중국산 후판 가격이 국내산 후판보다 비싸지는 역효과를 낳았다. 결국 철강사는 후판 가격 인상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조선업 또한 협상에 응하면서 2020년 70만원대에서 후판 거래 협상이 이뤄졌다.
순조로운 협상 분위기는 2021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깨지기 시작했다. 2021년 국내 조선사들이 전 세계 액화천연가스(LNG)선 89% 수주하는 등 조선업 업황이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반면 수년간 성장 둔화기를 겪었던 철강사들은 코로나19 팬데믹 후폭풍에다 철광석 가격 급등까지 겪으며 위기에 직면했다. 후판 가격을 동결하거나 인하하기 어려워진 상황에 처한 것이다.
후판의 원재료인 철광석 가격은 2021년 2월 t당 154.9달러에서 5월 226.5달러로 3개월 만에 46.2% 급등했었다. 이 여파로 2021년 상반기 70만원대로 협상이 끝났던 후판 가격은 하반기 협상에서 110만원대로 급상승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당시 협상을 두고 조선사와 철강사 모두에 상처를 남긴 순간이라고 평가한다. 조선사들은 후판 가격 인상 필요성에는 공감하나 급격한 인상은 무리라는 입장이었다. 반면 철강사들은 과거 조선사들이 어려울 때 손해를 보면서까지 후판 가격 인상을 미뤄줬는데 반대로 가격 인상에는 난색을 보여 서운함을 느꼈다고 한다.
두 업계가 화합을 위한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2012년 철강·조선·해운업계가 한 데 모여 세미나를 진행했다. 당시 각 업계 관계자와 관계부처 직원까지 모여 상생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그러나 가격 협상에서만큼은 화합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지난해 12월에도 철강협회와 조선협회 공동주관으로 공동 세미나가 개최됐었지만 여전히 올 하반기 가격 협상에 있어서만큼은 평행선을 달리는 중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중재에 나서기도 어렵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사기업 간 가격 협상에 선뜻 규정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후판 가격에 따라 조선사와 철강사의 이득이 엇갈리는 구조인 만큼 두 산업이 스스로 협력의 장을 마련하고 전략적인 협력을 구축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은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2일 “조선업과 철강업이 스스로 협력의 장을 마련한다면 정부 차원에서는 연구개발비 지원을 해준다거나, 협력 사업에 대해 제도 개선을 도와주는 방식의 인센티브를 도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상생 모델이 대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일본의 조선과 철강업계는 역사적으로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다. 일본 철강 업계는 조선업계에 안정적인 공급을 제공하고, 조선업체는 필요한 물품을 수입하지 않고 자국(일본)에서 들여오는 식으로 상생했다. 이재윤 산업연구원 소재·산업환경실장은 “일본은 자율적으로 수입품을 규제하는 매커니즘이 형성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며 “한국 또한 수입산 후판과 국내산 후판의 가격 차이가 큰 상황에서 조선업계가 국내산을 이용하면 철강업 쪽에서 가격을 어느 정도 감안해주는 식의 자율적인 조정이 가능한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백재연 기자 energ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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