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념무상의 세계... 한번 걸어보면 느끼겠지

김대오 2024. 10. 1. 10:2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생각 정원 군위 사유원(思惟園)에서 만난 자연과 인문

[김대오 기자]

[기사 수정 : 9일 오전 10시 46분]

폭우가 내리는 날, 대구 옆 군위 부계면에 자리한 사유원을 찾았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고 한다. 사유원(思惟園)처럼 <도덕경>, <장자>, <논어> 등 동양 고전의 인문학적 베이스에 기반을 두고 곳곳에 치밀하게 전고(典故)를 녹여 조성한 정원이라면 더더욱 여행 자체가 하나의 독서 경험이 된다.

여기에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루 시자의 3개 건축 작품과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 승효상의 9개 건축물, 중국 서예가 웨이량(魏良)의 서예 작품까지 둘러볼 수 있으니 사유원은 인문, 건축, 예술이 자연과 한데 어우러져 더없이 그윽한, 내용과 외관이 함께 잘 갖추어진, 너무 소박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문질빈빈(文質彬彬)의 고품격 정원이라 칭할 만하다.

치허문(致虛門)과 좌망심재(坐忘心齋)
▲ 사유원 입구 치허문 코르텐강으로 작고 단순하게 제작하여 정갈한 느낌을 주는 승효상 건축가의 작품이다.
ⓒ 김대오
사유원의 치허문으로 들어선다. 코르텐강으로 작고 단순하게 제작하여 정갈한 느낌을 주는 승효상 건축가의 작품이다. 노자 <도덕경> 제 16장 "치허극, 수정독(致虛極, 守靜篤)"에서 따온 말이다.

마음을 비우길 지극히 하고, 몸을 고요하게 지켜가길 도탑게 하라는 뜻이다. 머지않아 등장하는 장자의 좌망(坐忘)과 궤를 같이 하는 말이다. 사유원은 처음부터 노자, 장자의 핵심적인 인문 코드를 툭 던지며 관객을 맞이한다.

표를 구매하고 입구를 들어서자, 왼편에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 사진이 걸려 있다. 사유원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했음을 알린다. 이곳은 수목원이고 정원이기도 하지만 누가 뭐래도 사색의 공간이라고 자신을 규명한다.
▲ 좌망심재(坐忘心齋) 좌망심재는 장자가 제시한 도와 합일하는 수양법이다.
ⓒ 김대오
폭우에 불어난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보랏빛으로 익은 좀작살나무 열매와 붉게 익은 가막살나무 열매를 벗하며 비나리길을 따라 오르자, 몽뜰에 '좌망심재' 글귀가 보인다.

좌망심재는 장자가 제시한 도와 합일하는 수양법이다. 좌(坐)는 몸을 고요히 앉게 함이니 정(靜)이고, 망(忘)은 인위적인 것을 다 비우고 잊는 것이니 허(虛)와 같다. 심재는 마음을 가지런하고 깨끗하게 함이다. 들끓는 욕망을 내려놓고 마음을 굶기는 것이다. 몸은 고요히, 마음은 삿된 욕망을 비우고 생각의 정원을 거닐라고 일러주는 듯하다.

소요헌(逍遙軒)과 소대(巢臺)

좌망심재를 지나 더 오르니 붕소(鵬所)가 나오고, 이어서 소요헌 이정표가 등장한다. 북명(北冥)의 곤이라는 물고기가 거대한 붕새로 변하는 <장자>의 서막을 여는 '소요유(逍遙遊)'에서 따온 모티브들이다. 능선을 따라 산수유, 목련나무가 늘어선 초하루길 끝에 콘크리트 동굴 같은 소요헌 아트홀이 자리 잡고 있다.

소요헌과 그 아래 있는 소대는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루 시자가 스페인 마드리드 오에스테공원에 피카소의 명작 '게르니카'와 '임신한 여인' 전시를 위한 가상 프로젝트로 구상한 설계도를 사유원 설립자인 태창철강 유재성 회장이 게르니카 폭격과 한국전쟁 격전지였던 군위를 비교하며 오랜 설득 끝에 이곳에 구현한 것이라고 한다.
▲ 소요헌(逍遙軒) 창문도 따로 없이 중간 중간의 빈틈으로 빛과 비와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구조다.
ⓒ 김대오
▲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루 시자의 건축 작품 지그재그로 내려오는 철조 조형물은 지상을 향하는 게르니카의 폭격을 연상하게 한다.
ⓒ 김대오
소요헌은 자유롭게 거닐며 소요하기 쉽게 출입문도 없고, 창문도 따로 없이 중간 중간의 빈틈으로 빛과 비와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구조다. 소요헌의 안쪽 천장에서 지그재그로 내려오는 철조 조형물은 지상을 향하는 게르니카의 폭격을 연상하게 한다. 비를 피할 수 있는 통로를 따라 걸으면 생명의 알을 만나게 되는데 임신한 여인이 잉태한 새 생명을 상징하는 듯하다.

소요헌이 사유원 설립자의 간청으로 건축되었다면, 소대는 건축가의 부탁으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새집 형상의 높이 20.5m 전망대는 팔공산 방향으로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져 있다. 소대 곳곳에는 설립자와 건축가에게 허락을 받았는지 모를 제비들이 집을 짓고 입주해 있다.

소대 창문 역할을 하는 중간 중간 비어 있는 공간으로 빛과 바람이 소통하고 풍경이 차경의 이름으로 걸어 들어온다. 꼭대기 전망 테라스에서 멀리 비와 운무가 내려앉은 첩첩의 산자락을 바라보니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마주하는 듯하다.

소대에서 다시 소요헌을 거쳐 나가는 길에 요요빈빈(姚姚彬彬) 아트홀에 들렀다. 요요빈빈은 공자의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바탕과 겉꾸밈이 잘 어우러진 문질빈빈(文質彬彬)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곳에는 알바루 시자가 디자인한 가구와 드로잉이 전시되어 있는데 누드 크로키 작품들이 시선을 끈다. 좌망심재의 전통적인 수련과 모던한 건축 설계에 깃든 아방가르드 실험정신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사유의 스펙트럼을 풍부하게 한다.

풍설기천년(風雪幾千年)과 현암(玄庵)

왔던 길을 되짚어 오르니 소백세심대와 풍설기천년이다. 일본으로 반출되는 모과나무를 매입한 것이 계기가 되어 수령이 300년 이상인 모과나무 108그루를 수집해 조성한 언덕이다.

가장 오래된 모과나무는 수령이 651년으로 고려 공민왕 재위 기간에 해당한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고목의 두툼한 두께와 힘차게 드리운 뿌리를 마주하니 눈, 비 맞으며 어언 천년이라는 풍설기천년 정원 이름이 새삼 마음에 애틋하게 다가온다.

모과나무 위로는 배롱나무가 빗물에 근육질의 굵은 줄기를 뽐내며 분홍빛을 피워놓고 있다. 이 정원의 이름은 별유동천이다. 이백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에 나오는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에서 따왔다. 여름의 끝, 쏟아지는 빗줄기에 사위어가는 배롱나무꽃은 아직 뜨거웠던 지난여름의 열기와 절박함을 간직하고 있다.
▲ 풍설기천년(風雪幾千年) 300년 이상인 모과나무 108그루를 수집해 조성한 언덕이다.
ⓒ 김대오
▲ 현암(玄庵) 현암에서 바라본 소대의 모습이다.
ⓒ 김대오
모과나무, 배롱나무 곁으로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마음 전망대 현암이 자리한다. 설립자가 심은 나무들을 관찰하고 돌보기 위해 지은 사유원의 첫 번째 건축물이라고 한다. 생활공간이다 보니 화장실이 필요했을 텐데 근처 화장실 이름이 다불유시(多不有時, WC)이다. 화장실도 건축가의 손길을 거치면 예술 작품이 된다.

흘러내린 산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한 현암 앞으로 첩첩의 산들이 운해에 잠겨 출렁인다. 현암은 개방이 되지 않아 유리창으로 펼쳐지는 수평 파노라마 같다는 내부 풍경을 보지 못해 아쉽다. 현암 바로 아래로 와사(瓦寺)가 있는데 연못가에 누워있는 수도원에 착안해 만든 공간이라고 한다.

명정(暝庭)과 첨단(瞻壇)

현암에서 팔공청향대, 한유시경에 들어서는데 내리던 빗줄기가 더 굵어진다. 한 관리인이 곧 가야금, 아쟁 미니 콘서트가 있다고 알려준다. 빗소리와 어우러질 가야금 연주를 상상하며 급히 생각하는 연못이란 뜻의 사담(思潭)으로 내려갔지만 가야금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대나무로 만든 조사(鳥舍)를 거쳐 다시 명정으로 올라갔는데 역시 연주는 없다. 대신 가장 높은 곳에 땅을 파고 자리한 명정의 분위기가 사뭇 마음속 거문고인 심금(心琴)을 울린다.
▲ 명정(暝庭) 내면을 관조하는 마음 전망대는 높은 곳이 아닌 낮은 땅속에 있다.
ⓒ 김대오
내면을 관조하는 마음 전망대는 높은 곳이 아닌 낮은 땅속에,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구불구불한 곳에 내밀하게 자리하고 있다.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메타포가 좁은 계단과 골목, 자갈밭에 고인 물, 지붕 없이 열린 하늘로 펼쳐져 있다.

명정에서 나와 옆에 있는 최욱 건축가의 작품인 가가빈빈(嘉嘉彬彬) 카페로 가는데 호숫가에 남명(南冥)이란 글귀가 보인다. 장자의 붕새가 가는 남쪽의 바다가 바로 남명이다. 조선 전기 영남학파의 거두 조식 선생의 호이기도 하다. 사유원 초입에 붕소가 있었으니 관광객은 생각의 정원을 거닐며 물고기에서 붕새가 되어 이제 남쪽 바다인 남명에 도달한 셈이다.

2023년 대구 우수건축상을 받은 운치 있는 카페에서 연꽃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감상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걸음을 옮겨 사유원에서 가장 높은 첨단에 오른다. 첨단은 물탱크에 콘크리트를 입혀 별을 올려다보는 제단으로 만든 곳이다. 꼭대기에 12지신이 새겨져 있고 방위별로 산의 이름과 거리가 적혀 있다.
▲ 첨단에서 내려다 본 풍경 첨단 아래로 ‘현빈지문(玄牝之門)’이 적힌 석문과 탱자나무가 서 있다.
ⓒ 김대오
첨단에서 내려와 앞의 뜰을 거니는데 '현빈지문(玄牝之門)'이 적힌 석문이 서 있다. 노자 <도덕경> 제 6장 "곡신불사, 시위현빈. 현빈지문, 시위천지근(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에서 따온 말이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현묘한 암컷이라 부르고, 현묘한 암컷의 문은 천지의 뿌리라는 의미다. 유가가 입신양명을 위한 정상을 향하는 남성적인 도전이라면 도가는 무한한 생명을 잉태한 계곡을 향하는 여성성에 주목한다.

사유원의 정상에서 골짜기, 계곡을 생각하게 하는 현빈지문의 설계가 절묘하다. 현빈지문 옆에 탱자나무의 탱자가 노랗게 익어 가는데 탱자나무가 정원수로서 이렇게 멋들어지게 고전에 복잡한 생각을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리해주는 느낌을 준다.

내심낙원 (內心樂園)과 유원(瀏園)

유원에서 나와 첨단에서 내심낙원으로 내려가는 길에 탁족(濯足) 공간이 있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탁영탁족(濯纓濯足)이 떠오르는데 굴원의 <초사> '어부사'에서 따온 모티브이다.

내심낙원은 사유원 설립자의 장인이자 근대 한국 가톨릭계의 거장 김익진과 그와 영혼의 우정을 나눈 찰스 메우스 신부를 함께 기리는 경당이다. 내심낙원을 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책자 <두 아버지의 정원>이 전시되어 있는데 치허문에 문의하면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 내심낙원 (內心樂園) 내심낙원은 사유원 설립자의 장인 김익진과 그와 우정을 나눈 찰스 메우스 신부를 함께 기리는 경당이다.
ⓒ 김대오
▲ 유원(瀏園) 소나무와 조화를 이룬 유원의 풍경이다.
ⓒ 김대오
내심낙원에서 유원으로 내려가니 한옥의 기와 처마로 흘러내리는 빗줄기가 마치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과객을 맞이해준다. 소나무와 바위의 호위를 받는 유원은 설립자의 성을 딴 이름이고, 사야정(史野亭)은 설립자의 호로, 바탕이 겉꾸밈보다 두드러지면 투박하고, 겉꾸밈이 바탕보다 두드러지면 화려하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는 <논어> '옹야편'에 출처를 둔 이름이다.

유원 정자 앞 안내판을 보니 이곳에서 가야금 연주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림은 오랜 시간을 견디며 관객을 기다려주지만, 음악은 시간에 늦은 관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야정에 지필연묵이 놓여 있는데 광주 특산인 진다리붓이 있어 반갑다. 또 추사 김정희가 쓴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 글씨체와 흡사한 석재 서병오 선생의 현판 작품도 결려 있다.

유원에서 내려오는데 허유와 소부의 공간이라는 제목의 샤워기가 설치된 작은 건물이 보인다. <장자>에 나오는 허유소부(許由巢父) 고사를 표현한 것이다. 천하를 주겠다는 요임금의 말을 들은 허유가 더러운 말을 들었다며 냇물에 귀를 씻자 소에게 그 더러운 말을 들은 귀 씻은 물을 먹일 수 없다며 소부가 소를 몰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로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안빈낙도를 즐기는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백석의 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가 떠오른다.
▲ 허유와 소부의 공간 세속의 욕망을 내려놓은 안빈낙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김대오
봄이면 화사한 꽃을 피울 매화정원은 정영선 조경가가 조희룡의 그림 <매화서옥>에 영감을 받아 조성했다고 하며 그 위로 승효상 건축가의 관매헌(觀梅軒)이 자리 잡고 있다. 봄에 저 관매헌에 올라 불어오는 바람에 매화향기를 맡는 상상만으로 잠시 행복해진다.

소동파는 <사당기(思堂記)>에서 "적게 생각하고 욕망을 줄이는 것(少思寡欲)이 도에 가깝다"고 말한다. 사유원은 고전의 전고와 현대적 건축, 나무, 풀, 꽃, 바위, 물 등의 자연을 최대한 원림의 법도에 맞게 조화롭게 배치하여 편안함을 느끼며 소요하게 한다. 소요하며 사유하게 하는 사유원의 궁극의 목표는 어쩌면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빗속을 거닐며 사유원의 우중풍경과 몽롱미를 만끽하는 사이 세속의 홍진이 다소 씻기지 않았을까. 세속의 욕심과 삿된 생각을 내려놓는 연습을 위해 생각 정원 사유원을 한 번 거닐어보길 권한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