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념무상의 세계... 한번 걸어보면 느끼겠지
[김대오 기자]
[기사 수정 : 9일 오전 10시 46분]
폭우가 내리는 날, 대구 옆 군위 부계면에 자리한 사유원을 찾았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고 한다. 사유원(思惟園)처럼 <도덕경>, <장자>, <논어> 등 동양 고전의 인문학적 베이스에 기반을 두고 곳곳에 치밀하게 전고(典故)를 녹여 조성한 정원이라면 더더욱 여행 자체가 하나의 독서 경험이 된다.
여기에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루 시자의 3개 건축 작품과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 승효상의 9개 건축물, 중국 서예가 웨이량(魏良)의 서예 작품까지 둘러볼 수 있으니 사유원은 인문, 건축, 예술이 자연과 한데 어우러져 더없이 그윽한, 내용과 외관이 함께 잘 갖추어진, 너무 소박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문질빈빈(文質彬彬)의 고품격 정원이라 칭할 만하다.
▲ 사유원 입구 치허문 코르텐강으로 작고 단순하게 제작하여 정갈한 느낌을 주는 승효상 건축가의 작품이다. |
ⓒ 김대오 |
마음을 비우길 지극히 하고, 몸을 고요하게 지켜가길 도탑게 하라는 뜻이다. 머지않아 등장하는 장자의 좌망(坐忘)과 궤를 같이 하는 말이다. 사유원은 처음부터 노자, 장자의 핵심적인 인문 코드를 툭 던지며 관객을 맞이한다.
▲ 좌망심재(坐忘心齋) 좌망심재는 장자가 제시한 도와 합일하는 수양법이다. |
ⓒ 김대오 |
좌망심재는 장자가 제시한 도와 합일하는 수양법이다. 좌(坐)는 몸을 고요히 앉게 함이니 정(靜)이고, 망(忘)은 인위적인 것을 다 비우고 잊는 것이니 허(虛)와 같다. 심재는 마음을 가지런하고 깨끗하게 함이다. 들끓는 욕망을 내려놓고 마음을 굶기는 것이다. 몸은 고요히, 마음은 삿된 욕망을 비우고 생각의 정원을 거닐라고 일러주는 듯하다.
소요헌(逍遙軒)과 소대(巢臺)
좌망심재를 지나 더 오르니 붕소(鵬所)가 나오고, 이어서 소요헌 이정표가 등장한다. 북명(北冥)의 곤이라는 물고기가 거대한 붕새로 변하는 <장자>의 서막을 여는 '소요유(逍遙遊)'에서 따온 모티브들이다. 능선을 따라 산수유, 목련나무가 늘어선 초하루길 끝에 콘크리트 동굴 같은 소요헌 아트홀이 자리 잡고 있다.
▲ 소요헌(逍遙軒) 창문도 따로 없이 중간 중간의 빈틈으로 빛과 비와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구조다. |
ⓒ 김대오 |
▲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루 시자의 건축 작품 지그재그로 내려오는 철조 조형물은 지상을 향하는 게르니카의 폭격을 연상하게 한다. |
ⓒ 김대오 |
소요헌이 사유원 설립자의 간청으로 건축되었다면, 소대는 건축가의 부탁으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새집 형상의 높이 20.5m 전망대는 팔공산 방향으로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져 있다. 소대 곳곳에는 설립자와 건축가에게 허락을 받았는지 모를 제비들이 집을 짓고 입주해 있다.
소대 창문 역할을 하는 중간 중간 비어 있는 공간으로 빛과 바람이 소통하고 풍경이 차경의 이름으로 걸어 들어온다. 꼭대기 전망 테라스에서 멀리 비와 운무가 내려앉은 첩첩의 산자락을 바라보니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마주하는 듯하다.
소대에서 다시 소요헌을 거쳐 나가는 길에 요요빈빈(姚姚彬彬) 아트홀에 들렀다. 요요빈빈은 공자의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바탕과 겉꾸밈이 잘 어우러진 문질빈빈(文質彬彬)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곳에는 알바루 시자가 디자인한 가구와 드로잉이 전시되어 있는데 누드 크로키 작품들이 시선을 끈다. 좌망심재의 전통적인 수련과 모던한 건축 설계에 깃든 아방가르드 실험정신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사유의 스펙트럼을 풍부하게 한다.
풍설기천년(風雪幾千年)과 현암(玄庵)
왔던 길을 되짚어 오르니 소백세심대와 풍설기천년이다. 일본으로 반출되는 모과나무를 매입한 것이 계기가 되어 수령이 300년 이상인 모과나무 108그루를 수집해 조성한 언덕이다.
가장 오래된 모과나무는 수령이 651년으로 고려 공민왕 재위 기간에 해당한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고목의 두툼한 두께와 힘차게 드리운 뿌리를 마주하니 눈, 비 맞으며 어언 천년이라는 풍설기천년 정원 이름이 새삼 마음에 애틋하게 다가온다.
▲ 풍설기천년(風雪幾千年) 300년 이상인 모과나무 108그루를 수집해 조성한 언덕이다. |
ⓒ 김대오 |
▲ 현암(玄庵) 현암에서 바라본 소대의 모습이다. |
ⓒ 김대오 |
흘러내린 산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한 현암 앞으로 첩첩의 산들이 운해에 잠겨 출렁인다. 현암은 개방이 되지 않아 유리창으로 펼쳐지는 수평 파노라마 같다는 내부 풍경을 보지 못해 아쉽다. 현암 바로 아래로 와사(瓦寺)가 있는데 연못가에 누워있는 수도원에 착안해 만든 공간이라고 한다.
명정(暝庭)과 첨단(瞻壇)
▲ 명정(暝庭) 내면을 관조하는 마음 전망대는 높은 곳이 아닌 낮은 땅속에 있다. |
ⓒ 김대오 |
명정에서 나와 옆에 있는 최욱 건축가의 작품인 가가빈빈(嘉嘉彬彬) 카페로 가는데 호숫가에 남명(南冥)이란 글귀가 보인다. 장자의 붕새가 가는 남쪽의 바다가 바로 남명이다. 조선 전기 영남학파의 거두 조식 선생의 호이기도 하다. 사유원 초입에 붕소가 있었으니 관광객은 생각의 정원을 거닐며 물고기에서 붕새가 되어 이제 남쪽 바다인 남명에 도달한 셈이다.
▲ 첨단에서 내려다 본 풍경 첨단 아래로 ‘현빈지문(玄牝之門)’이 적힌 석문과 탱자나무가 서 있다. |
ⓒ 김대오 |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현묘한 암컷이라 부르고, 현묘한 암컷의 문은 천지의 뿌리라는 의미다. 유가가 입신양명을 위한 정상을 향하는 남성적인 도전이라면 도가는 무한한 생명을 잉태한 계곡을 향하는 여성성에 주목한다.
사유원의 정상에서 골짜기, 계곡을 생각하게 하는 현빈지문의 설계가 절묘하다. 현빈지문 옆에 탱자나무의 탱자가 노랗게 익어 가는데 탱자나무가 정원수로서 이렇게 멋들어지게 고전에 복잡한 생각을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리해주는 느낌을 준다.
내심낙원 (內心樂園)과 유원(瀏園)
유원에서 나와 첨단에서 내심낙원으로 내려가는 길에 탁족(濯足) 공간이 있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탁영탁족(濯纓濯足)이 떠오르는데 굴원의 <초사> '어부사'에서 따온 모티브이다.
▲ 내심낙원 (內心樂園) 내심낙원은 사유원 설립자의 장인 김익진과 그와 우정을 나눈 찰스 메우스 신부를 함께 기리는 경당이다. |
ⓒ 김대오 |
▲ 유원(瀏園) 소나무와 조화를 이룬 유원의 풍경이다. |
ⓒ 김대오 |
유원 정자 앞 안내판을 보니 이곳에서 가야금 연주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림은 오랜 시간을 견디며 관객을 기다려주지만, 음악은 시간에 늦은 관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야정에 지필연묵이 놓여 있는데 광주 특산인 진다리붓이 있어 반갑다. 또 추사 김정희가 쓴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 글씨체와 흡사한 석재 서병오 선생의 현판 작품도 결려 있다.
▲ 허유와 소부의 공간 세속의 욕망을 내려놓은 안빈낙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 김대오 |
소동파는 <사당기(思堂記)>에서 "적게 생각하고 욕망을 줄이는 것(少思寡欲)이 도에 가깝다"고 말한다. 사유원은 고전의 전고와 현대적 건축, 나무, 풀, 꽃, 바위, 물 등의 자연을 최대한 원림의 법도에 맞게 조화롭게 배치하여 편안함을 느끼며 소요하게 한다. 소요하며 사유하게 하는 사유원의 궁극의 목표는 어쩌면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빗속을 거닐며 사유원의 우중풍경과 몽롱미를 만끽하는 사이 세속의 홍진이 다소 씻기지 않았을까. 세속의 욕심과 삿된 생각을 내려놓는 연습을 위해 생각 정원 사유원을 한 번 거닐어보길 권한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통장 털어 불법 도박장으로... 강렬한 '타짜' 이렇게 나왔다
- 흑백요리사 심사위원들, 끝까지 안대 씌웠다면 어땠을까?
- 행담도휴게소 입구, 이곳에 감춰진 놀라운 역사
- 명태균 폭탄 발언에 대통령실 해명 "윤 대통령, 두 번 만났다"
- '검사 술접대' 무죄 파기, 박주민 "대통령님, 이제 사과하시겠습니까"
-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 '특활비' 두고 검찰·감사원이 한 황당한 행동
- 아버지 몰래 교회 다녀온 가족들이 겪은 일
- 옆에서 악쓰던 남편, 그렇게 1년 지나니 달라진 것들
- 권익위 국장 사망이 이재명 탓? 국감 파행으로 만든 정승윤의 한 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