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표' 새 독립기념관 추진... 이 정권의 진짜 속내?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윤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를 함께 돌아보았으면 합니다"라며 "3·1운동을 기점으로 국내외에서 여러 형태의 독립운동이 펼쳐졌습니다"라고 한 뒤 이런 말을 했다.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무장독립운동을 벌인 투사들이 계셨습니다. 국제정치의 흐름을 꿰뚫어 보며 세계 각국에서 외교독립운동에 나선 선각자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역량을 갖추도록 교육과 문화독립운동에 나선 실천가들도 계셨습니다."
이렇게 그는 독립운동가들을 투사·선각자·실천가로 분류한 뒤, '선각자'와 뜻이 통하는 '선구적 노력'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이렇게 강조했다.
"제국주의 패망 이후 우리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선구적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투사·선각자·실천가의 활동을 종합하는 대목에서 '독립은 선구적 노력의 결과'라고 결론지었다. 이승만 등이 활동한 외교 분야에 좀 더 방점을 찍는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뒤 "저는 이 모든 독립운동의 가치가 합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고, 그 역사가 대대손손 올바르게 전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라고 언급했다. 무장투쟁보다 외교 분야 독립운동가들이 윤석열 정권의 남은 임기 중에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전망을 가능케 하는 발언이다.
한일 협력을 중시하는 윤석열 정권이 무장항일투쟁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은 3·1절 기념사가 발표된 직후에 나온 대통령실 관계자의 언론 인터뷰에서도 확인된다. <연합뉴스>와 통화한 이 관계자는 3·1절 기념사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과거 정부에서 무장독립운동만 진정한 독립운동으로 평가한 채 나머지 독립운동들은 친일파로 몰아간 경향이 있다"라며 "이러한 부분에서 균형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내민족독립운동기념관 추진 과정에서 무장항일투쟁을 다루는 비중이 크게 낮아지리라는 점은 국가보훈부의 28일 자 보도설명자료에서도 느낄 수 있다. 보훈부는 페이스북에 실린 이 자료에서 "보훈부는 광복 80주년 계기로 특정 독립운동가(인물) 중심이 아닌 국내에서 일어난 교육, 문화, 계몽 및 학생운동 등 다양한 독립운동 분야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후대에 계승하고자 추진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밝혔다.
국내 독립운동을 집중 조명하겠다는 윤석열 정권의 방침은 향후 의외의 '난관'에 부딪힐 수 있다. 국내 독립운동을 파헤치다 보면 평화적인 독립운동보다는 그렇지 않은 독립운동을 의외로 많이 만나게 된다. 국외 못지않게 '과격'했던 국내 독립운동의 실상을 맞닥트리게 된다. 그래서 윤석열 정권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마주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조선인촌주식회사 공장 노동자 여직공 170명이 동맹파업에 가담했다고 보도한 1931년 8월 26일 자 <동아일보> 7면 상중단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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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한국근현대사연구> 제78집에 실린 이 논문에 따르면, 죄명이 확인되는 서대문형무소 수감자는 4630명이다. 그중 가장 많은 유형은 오늘날의 국가보안법에 해당하는 치안유지법 위반자들이다.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치안유지법 위반(2745명)이 가장 많았으며, 보안법 위반(1171명), 국가총동원법 위반(479명), 소요(75명), 출판법 위반(47명), 강도 (20명), 살인(12명)의 순이다."
치안유지법·보안법·출판법 위반자와 소요죄 행위자들은 사상범으로 분류됐다. 논문은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이는 항목은 사상범죄"라며 "죄명 확인 인물 4630명 가운데 87.73%를 차지"한다고 설명한다. 국내 독립운동을 중점적으로 조명하다 보면, 이른바 빨갱이들이 다수였던 국내 독립운동의 실상을 피할 길이 없게 된다.
위 논문에 따르면, 국가총동원법 위반자가 10%를 넘는 479명이다. 윤석열 정권이 제3자 변제로 봉합한 강제징용은 바로 이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법을 거부한 사람들의 활동을 조명하게 되면, 강제징용·강제징병·물자징발 등에 대한 당시 한국인들의 저항이 확인된다. 전범기업의 책임을 덮어주고 제3자 변제로 봉합할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 명확해진다. 그래서 이 분야의 국내 독립운동은 윤석열 정권 굴욕외교의 반민족성을 부각시킬 수밖에 없다.
3·1절 기념사에서 윤 대통령은 외교 및 교육·문화 분야의 독립운동을 특별히 강조했지만, 국내 독립운동의 주류는 이 분야가 아니었다. 소작쟁의와 노동쟁의가 중심이었고 공산당 계열 독립운동이 주류였다. 국가보훈부가 웬만해서는 독립운동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이 분야가 실상은 한국 독립운동의 주류였다.
성냥이 인촌(燐寸)으로 불리던 시기에 인천의 조선인촌제조주식회사 노동자들은 총독부의 비호를 받는 이 일본인 독과점기업 밑에서 성차별과 민족차별을 받았다. 1929년에 대공황이 발생하자 이 일본 기업은 한국 노동자들에게 부담을 전가시켰다. 노동자 임금을 7~30% 삭감한 데 이어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을 10% 추가 삭감하는 일을 벌였다.
그러자 추가 삭감이 통보된 1931년 8월 15일, 김순이·이용림·윤기영·성하분을 비롯한 여성 노동자 180명이 사업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일제 경찰의 출동에도 굴하지 않고 버텨냈다. 그 결과, '임금 인하 조치의 무조건 철회'라는 항복 각서를 11일 만에 받아냈다. 그 뒤 상황이 역전돼 파업 참가자 상당수가 해고되기는 했지만 인천 성냥공장 노동자들은 항일투쟁의 성격을 띤 파업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뒀다.
1927년 5월 16일에는 일제의 어업 침탈에 맞선 항일투쟁이 제주 성산포 씨름대회를 계기로 폭발했다. 고은삼 등이 이끄는 500여 명의 제주도민들이 약 200명의 일본 어선 관계자 및 한국인 고용인들을 공격해 섬 밖으로 내쫓았다.
▲ 민족문제연구소, 광복회, 주요 야당이 지난 8월 10일 오전 11시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 윤석열 정권 규탄 집회'를 진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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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왕국(오키나와)은 조선보다 빠른 1879년에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됐지만, 1945년에 한반도 남부와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국은 한반도 남부는 한국인들에게 돌려주면서 오키나와는 유구인들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미국은 27년 뒤인 1972년에 오키나와를 일본에 도로 넘겼다. 유구인들도 언젠가는 광복을 맞이하겠지만, 일제를 일상적으로 괴롭힌 한국 민중들의 투쟁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총칼을 든 군대보다 무서운 것은 그 총칼에 맨주먹으로 맞서는 민중이다. 식민지 한국에서는 그런 민중들이 일상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제주도의 어민들은 물론이고 육지의 농민·노동자들이 맨주먹으로 그 같은 투쟁을 벌여 일본제국주의를 서서히 병들게 만들었다.
그처럼 무서운 항일투쟁이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있었다. 윤석열 정권이 국내민족독립운동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런 독립운동이 더욱 더 부각되지 말란 법은 없다. 윤석열 정권이 이런 독립운동을 회피한 채 건립 사업을 강행한다면, 이는 더 큰 논란을 증폭시키는 악수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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