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여성들이 매달 법원에 가는 이유 [쿠키청년기자단]

안겸비 2024. 9. 2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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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신변보호 여부·형량 기준 판단 등 ‘사법감시’를 통해 피해자와 연대하는 방청모임
-50대 여성 3명 “피해자가 배제되는 재판 환경에 문제의식을 느껴 시작”
-연대의 변화는 성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받아들여진 것이 계기
시민들이 재판을 방청하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달 13일 오전 10시. 50대 여성 3명이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 모였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소지품 검색대도 이젠 자연스럽게 통과한다. 검색대 왼편에 있는 ‘오늘의 공판안내’ 게시판 앞으로 걸어간다. 이들은 재판정의 호수 밑에 시간대와 사건 번호, 사건명이 일렬로 적혀있는 종이를 들여다보며 ‘강간’, ‘스토킹’, ‘성폭력’ 등의 단어를 찾는다. 사건 일정을 정리하는 김 모씨가 말한다. “303호에서 10시30분에 스토킹 사건, 11시30분에 성폭력 사건 있으니까 여기로 가면 되겠네요.” 손모씨와 채모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방청석에 앉은 이들은 왼쪽의 검사, 오른쪽의 피고인을 번갈아 보며 그들의 말과 행동에 집중한다. 사건별로 중요한 단어를 필기하기도 한다. 판결문을 읽는 판사의 입에서 ‘초범’, ‘감형’의 단어가 연달아 나올 땐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변호사와 피고인이 판사에게 인사를 하고 재판정을 나올 때까지 자리를 지킨다. 

“이것으로 재판을 마치겠습니다.” 재판 종결을 발표한 판사는 오전 재판 내내 앉아 있던 이들에게 어떤 일로 왔냐고 묻는다. “방청하러 왔습니다.” 판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판정을 나간다. 여전히 법조인들에겐 낯선 사람들, 이들은 방청연대다. 

법원에 가게 된 이유, 성범죄 피해자와의 연대 

방청연대는 지난해 10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 성범죄 재판 방청을 한다. 이들은 여성단체의 ‘성폭력·가정폭력 상담원 교육’에서 처음 만났다.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성범죄 재판을 직접 방청했다. 재판부가 피해자의 보호조치를 잘 이행하고 있는지, 개인정보를 노출하지 않는지 등을 중심으로 관찰하고 기록했다. 

이들은 방청을 통해 피해자의 목소리가 법정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현재 성범죄 사건이 다뤄지는 형사재판의 경우, 검사가 피고인인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을 목적으로 진행한다. 피해자가 재판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증인으로 출석하는 것이다. 피해자는 사건의 당사자임에도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기 어렵다.

이들이 방청 활동을 지속하기로 마음먹은 계기에는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라는 책이 있었다. 책의 저자인 연대자 디(가명)는 성폭력 피해자다. 그는 피해자를 배제하는 사법 시스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감시자’ 역할이 필요하다며 시민의 재판 방청 참여가 중요함을 역설한다. 법정에서 피해자 보호가 잘 이뤄지고 있는지 관찰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어야 사법 시스템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책에 재판절차를 자세히 기술하고, 절차별로 문제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 자료도 수록했다. 김씨는 “(책을 읽고) 방청석에 앉아 있는 것이 피해자를 지지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밝혔다. 이어 김씨는 “다른 두 분(손씨, 채씨)에게 방청연대를 제안했고 (두 분이) 수락해서 그때부터 법정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피해자가 예전의 자신 같았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법정에서 자신의 피해를 주장하기 어려운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보태고 싶었다고도 덧붙였다. 그 이유를 묻자, 이들은 소수자인 여성으로서 살아온 자신들의 인생을 떠올렸다.

손씨는 과거 직장과 대중교통에서 성추행을 많이 겪었다. 손씨는 그때마다 본능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느꼈지만 자신의 피해를 설명할 정확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손씨의 20대는 ‘성폭력’, ‘성추행’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손씨는 “(성추행을) 당해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고, 다들 별거 아닌 것처럼 넘어가니까 회피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초등학교 시절 성폭력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대처 방법을 몰랐고, 어떻게 자신의 피해를 설명해야 할지 몰라 불편한 감정마저 부정하게 됐다. 김씨는 “그때는 어리기도 해서 내가 당한 일을 밝히기 어려웠다”며 “(폭력 당시의) 이상하고 불편한 느낌을 지우기에 급급했다”고 밝혔다. 

채씨는 가정폭력을 겪은 적이 있었다. 채씨 역시 자신의 피해를 명료하게 밝히고 해석하기 어려웠다. 지원받을 수 있는 단체나 기관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채씨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어렵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나에게서 원인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며 “‘조금만 노력해라’, ‘남들도 그렇게 산다’는 식의 반응이 많았다”고 밝혔다. 

법정에서 연대의 변화를 발견하다

이들은 방청을 통해 연대의 변화를 체감했다. 그 중심에는 여성의 피해를 ‘범죄’로서 인정하는 사회 변화가 있었다. 김씨는 “전에는 피해자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조차 없었다”며 “연대가 존재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지금은 법정에서 ‘스토킹’이라고 다뤄지는 일들도 예전에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좋아해서 따라다니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손씨는 “전에는 사랑의 표현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이제는 법정에서 ‘범죄’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성폭력이) 다 같이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인식이 형성돼 연대의 필요성을 체감하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성폭력 피해가 개인의 문제로서의 범죄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서의 범죄로 인식이 바뀐 것이 연대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 계기라는 뜻이다. 

이들은 더 많은 사람이 법정으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채씨는 “재판부가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내리는지 재판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재판 방청을 더 많은 사람이 해보길 제안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안겸비 쿠키청년기자 gyeombi1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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